29살 여자입니다.제목에 남친이라 적었는데 이미 엄밀히 말하면 전 남친이 됐네요.
어제 있던 일인데 맘 좀 추스리고 글 씁니다.도저히 남친이 화 낸 포인트가 뭔질 모르겠어서요.
1년의 연애 끝에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서로의 부모님을 뵙는 수순을 밟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란 가정은 속된 말로 콩가루였습니다. 술먹고 폭력 휘두르는 아버지에, 맞고 집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꼭 딴 남자 집에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반년에서 1년도 딴 살림을 살고 오는 어머니.
3살 위 언니는 살길 찾겠다고 중학교 졸업하고 가출 비슷하게 해서 2년 전까지는 1년에 한 두번 얼굴 봤는데 매 해 알콜 중독이 심해지더니 연락도 안 닿습니다.
저는 공부머리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착실하게 공부 했었는데 고등학교 올라가고선 집에서 돈 벌라고 닥달을 해 대서 결국은 수능준비를 접고 알바를 전전했습니다. 대학을 못 갈 거고, 더 이상 제도권에서 공부를 해봤자 의미도 없고, 학교 다니는 시간이 그저 알바를 못하는 시간으로 보여서 자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18살부터 죽어라 돈 벌고, 부모한테 거짓말 치고 꿍쳐놓은 돈으로 자격증을 따서 조금이라도 좋은 직장으로 옮기며(그래봤자 중소기업이었지만요.)지냈습니다.
저 스무살 넘고는 부모가 정신이 든 건지 기운이 빠진 건지, 둘이 다시 합쳐서 평온하게 지내다가, 아는 사람이 일이 좀 험해도 일자리 있다했다며 전세금 빼서 동남아국가로 가셨습니다. 어차피 가족이 다 뿔뿔이 각자 알아서 생존해왔던지라 이제 별로 안부도 안 궁금합니다. 폭력에 대한 기억도 아직 남았구요.
어려서부터 고생을 한지라 산전수전 겪은 건 나름대로 제 재산이라 생각하지만, 주위에 그런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렇게 된 건지 방어기제인지는 몰라도 억세고 자기말만 옳다 하고 말을 툭툭 뱉는 것들을 보면서 그러지 않으려면 다시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에, 5천만원을 모아 투룸 전세를 구하고 나서 쓰리잡 중에 하나를 그만 두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인문 서적도 되는 대로 읽고, 관심가는 분야의 공부도 하고요. 대학에 들어가기는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시간도 너무 많이 쓰는지라, 혼자 독학했습니다.
제가 흥미 있던 분야가 있었는데 맨 땅에 헤딩으로 전공서적도 구해다 읽어보고, 모르는 건 찾으면서 더디지만 몇 년간 공부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있는 직장에 저로선 꿈같은 조건에 들어갈 수 있게 됐구요.면접 보신 분이 관련해서 공부를 길게 하신 분이고 업무에도 연관이 있는 분야인데, 전공으로 대학 졸업한 애들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다고 해 주셔서 이제까지의 시간들이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재작년에 나름 안정적인 직장 한 개, 전세방, 적금, 일주일에 이틀 쉴 수 있는 삶이라는, 매우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저에게는 정말 어려웠던 조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그러고 나니 이제 저도 조금이나마 즐길 수 있는 삶이 생겼다는 생각에 독서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너무 구구절절 길었는데 설명을 해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씁니다.
그렇게 남친을 만났고, 사귀게 됐습니다.남친이 먼저 다가와서 고백했고, 지적이고 분위기 있어보여서 반했다고 하더군요.
대학을 안 나온 걸 남친도 알고 있었고, 남친도 지방의 사립대졸이라 (지방 사립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남친 본인이 자기 학벌 별 거 없다는 식으로 말하며 이렇게 언급했습니다.)학벌이 관계의 장벽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3일 전에 과일과 간단한 선물을 사서 남친 부모님을 뵀는데, 부모님은 그게 아니었나봅니다. 솔직히 말한다면서, 요즘 세상에 2년제, 3년제라도 대학나온 아가씨들 쌔고 쌨다고, 맘에 안 드신다고, 지켜보시겠다네요.
결혼은 못하겠구나하고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남친 사랑했었지만, 그보다 공포가 더 컸어요. 지옥같던 가족에게서 겨우 벗어나서 혼자 이만큼 했는데, 가족이슈가 또 내 인생에 터지면, 제정신으로 못살겠다 싶더라구요..
난 결혼 못하겠다고 어제 남친 만나서 이야기 했어요.남친이 붙잡으면서 하는 말이 "지켜보겠다고 하셨으니 잘 하면 되잖아. 마음 돌리실 거야."라더군요.
제가 대학 안 나온 것도 맞고, 집안 안 좋은 것도 맞고 가진 건 쥐뿔 없지만 저는 그런대로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제가 재벌집에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결혼자금도 결혼할 때까지 비슷하게 맞춰 준비할 수 있을 만큼 남친 집도 그다지 부유하진 않습니다.제 학벌과 가족의 가난이 남친에게 짐이 될 일이 하등 없는데 그저 시부모 맘에 안 든단 이유로 제가 굽신굽신 할 바에야 혼자 늙고 말죠.
그래도 안 좋게 끝내지는 말아야지 하고, 부모님께서 학벌이 좀 괜찮은 며느리가 좋다고 하시니, 인연이 아닌 거 같다, 좋은 사람은 세상에 많고 그냥 우리가 될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부모님 맘에도 쏙 드는 여자랑 연애하고 결혼 하면 서로 좋고 행복하지 않겠냐, 여기까지 하자고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여기 적는 거 처럼 정리된 말은 아니었지만, 울거나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요.
그러자마자 남친이 뭐가 트리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분하고 화내기 시작했습니다.남의 부모님 욕하지 마라, 우리 부모 속물 아니다, 부모 욕한 거 사과해라 하면서요.
아무튼 그 뒤로는 저도 화가 나서 너는 나 학벌 없는 거 알지 않았냐, 부모님이 학벌 중요시하는 분이면 왜 언질도 없었고 그냥 덜렁 만나자고 했냐, 내가 거기서 상처 안 받았을 거 같냐, 따졌고,,,,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헤어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동남아에 계시고 저는 혼자 한국에 남아서 전세집에 산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남친이 생각한 건 좀 다른 그림인 거 같더군요... ㅎㅎ 싸운 뒤에 알게 됐지만요.
학벌 보시는 부모님이니 학벌 본다고 했을 뿐인데, 제가 부모님 욕한건가요?저는 아직 이 논리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부분을 콕 찝어서 헤어지자 하지 말고 다른 변명을 했어야 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