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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만 늘어놓는 신천지 거짓 고집을 어찌하리오...

*** 한국의 기독교(장로교 중심) 역사 

한국의 기독교(장로교 중심) 역사 

최초의 한국인 세례 

의료/교육사업 

교회를 설립 

성경번역/문서선교 

민족을 위한 기도 

교회조직/부흥운동 

수난속의 연합 

신사참배 강요 

조국해방과 교회재건 

교회성장과 사회참여 

\"최초로 한국인들이 세례받다\" 

19세기 말에 한국인들이 처음 세례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목숨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1876년 백홍준 등의 4명이 한반도 북쪽의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두 목사가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도왔다. 1882년부터 5년에 걸쳐 신약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들은 관리들의 눈을 피해서 성경을 국내로 반입해 들여왔다. 이들을 이어서 1879년에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1884년경에 황해도 솔내에 조그만 초가집을 예배당으로 정하고첫 교회를 세웠다. 순전히 한국사람들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이무렵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이도 있었다. 외교사절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수정이 1883년에 동경에서 미국인 선교사 녹스(G.W, Knox)에게 세례를 받았고, 마가복음 을 번역하여 1885년에 출판하였다.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하여 의료와 교육사업을 시작하다\" 

그 사이 조선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엄격하게 외국인들과의 교섭을 금하던 조선 정부가 1876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수호조약을 맺었다. 1880년에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통상과 더불어 외국 공관 설치가 시작되었다. 1884년 9월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알렌(H. N. Allen) 이 미국 공사관 의사로 입국하였는데, 그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이듬해 부활절에는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미국 북장로교회 파송을 받아 입국하였다. 안수받은 개신교 목사로서는 첫 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북감리교회가 파송한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부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지니고 입국한 그는 알렌이 설립한 병원(제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본격적인 복음 전도에 착수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만을 허락하였기 때문이었다. 1885년에는 광혜원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뒷날 세브란스 의전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1886년에는 고아들을 모아 교육한 언더우드 학당이 세워 

졌다. 이 학당이 오늘날 경신중 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같은 해에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이 학당이 오늘날 이화여대와 중 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에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을 세워 영어학교로 운영하였다. 오늘날에는 배재중 고등학교가 되었다. 

1889년 8월에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I. H. Davis)가 그의 여동생 메리(Mary)와 함께 입국하였다. 데이비스는 6개월만인 1890년 4월 15일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여행을 하던 중에 천연두와 폐렴이 겹쳐서 병사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첫 희생가가 되었다. 1892년 10월에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테이트(L. B. Tate)가 입국하였고, 1898년 9월에는 카나다 장로회 선교사 그리어슨(R. G. Grierson) 의사 부부가 입국하였다.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설립하다\" 

1886년 7월 18일에는 노춘명이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국내에서 최초로 베풀어진 세례였다. 노춘명은 생명을 건 결단이었고, 언더우드 목사도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결의로 세례식을 거행했다. 이듬 해 봄에는 솔내에서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와 결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언더우드는 국법을 어기는 일인 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세례를 주었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는 14명의 교인을 데리고 두 명의 장로를 선출한 후에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한반도 최초의 조직교회였다. 이 교회가 곧 새문안교회이다. 이 교회의 첫 교인들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 권서들을 통해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교회로 모이게 하였을 뿐이었다. 1887년 12월에는 언더우드 목사 집례로 국내 최초의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문서선교를 시작하다\" 

언더우드는 1887년 감리교 선교회와 함께 성서번역위원회 를 구성하여 신구약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1900년에는 신약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1910년에 구약이 완역되어 이듬해에 신구약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 1937년에 다시 전면적으로 개정되어 개역한글판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1892년에는 감리교 선교사 존스(G. H. Jones)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er)가 [찬미가]를 출판하였다. 1902에는 장로교 공의회가 공인하는 [찬성시]가 출판되었다. 1908년에 이르러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연합하여 [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897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신문을 발행하였다. 감리교회에서는 아펜젤러가 2월에 [조선 크리스도인 회보]를 창간하였고, 장로교회에서는 언더우드가 [그리스도 신문]을 4월에 창간하였다. 1905년 7월부터 장감연합신문이 [그리스도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 무렵 한글로 된 단행본 신앙서적들과 잡지들도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을 위해 기도하다\" 

이 무렵 조선은 근대 민족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전통적으로 조선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서구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교회도 민족의 운명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교회는 1890년에 중국주재 선교사 네비우스(John Nevius) 를 초청해서 3자정책-자치, 자립, 자전-을 중심으로 선교정책을 세우고, 선교지 분할을 시도하면서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선교사들은 '아래에서 위로' 전도하여 서민들의 입교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1898년에 정부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주동인물들을 투옥하였을 때, 이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옥중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에 설립되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근대정치제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그 중심인물인 서재필, 윤치호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로써 애국적인 경향을 갖는 양반 지식인들도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애국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 10년이 막 지났을 때 왕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서 암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국왕을 위해서 각국 공사관들과의 통역을 비롯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건이 지난 뒤 민중들 사이에 '선교사가 국왕을 구했다' 는 소문이 돌았고 교인들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강화하려들자 교회는 국가와 국왕을 위해 기도하였다. 1896년 국왕 탄신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다. 서대문 밖의 정부청사를 빌어서 개최된 이날의 예배는 최초의 공개적인 대규모 집회였다. 교인들도 주일마다 대문에 국기를 게양하여 애국정신을 널리 알렸다. 그 결과 일반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거리감을 해소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교회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애국정신은 YMCA, YWCA, 엡윗청년회, 그리고 면려청년회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활동은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국권의 수호를 위하여 시위나 무장투쟁에도 참여하는 교인들도 나타났다. 

\"교회가 조직되고, 부흥운동의 불이 붙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는 한편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아갔다. 1905년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화 로 나아갔다.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이 루고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질 때에도 교회는 계속 성장하였다. 1901년에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어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이 시작되었다. 1907년에는 장로교회는 전 한반도를 묶어 하나의 독립노회인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이 노회에서 최초로 한국인 목사 7명이 안수를 받았다. 그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 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 때 장로교인의 수는 7만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다. 총회는 창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감리교도 미북감리교회는 1908년에 한국연회를 창설하였고, 미남감리교회는 1914년에 한국연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로 통합되어 기독교조선감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는 동안 1907년 1월에 전국적인 대회개 및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선교사 하디(R.A.Hardie), 져다인(J.L.Gerdine)와 한국인 목사 길선주 등이 전국을 누비면서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길선주 목사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의 한사람이 되었고,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부흥운동은 수 년에 걸쳐서 전국의 교회로 퍼졌으며, 국경을 넘어서 중국으로까지 전파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진리를 새롭게 터득하게 하였고, 교회도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사경회라는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가 함께 협력하고,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에 에큐메니칼 정신이 구현되었다. 이 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 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게 되었다. 이 운동은 1910년에 100만명 구령운동으로 이어져 나아갔다. 

\" 수난 속에서 연합하다\" 

일제는 한국을 합방하고 난 후 동화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퇴폐문화 유입정책을 펴 나갔다. 일제는 교회도 조직적으로 탄압하였다. 1908년에 '안악사건'을 조작하였고, 1910년에는 소위 '105인 사건'이라는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기독교인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1915년에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성경시간을 정규시간에서 빼고 종교의식을 철폐하라고 강압하였다. 

제1차 대전이 끝난 뒤 전후 처리를 위해 1917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 하였다. 이를 기회로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을 초기에 주도하였던 민족대표 33 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교회의 피해도 컸다. 59개의 교회가 불에 탔고, 수원의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몇 교회에서 일본 군인이 교인을 학살하였다. 장로교회 총회에 보고된 자료 에 따르면, 교인 3,804명과 목사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지도자 202명이 체포되었다. 또 사살된 사람이 41명, 매맞고 죽은 사람이 6명이나 되었다. 3.1운동을 통해서 기독교는 비폭력, 무저항주의 를 주장하였다. 3.1운동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난을 당함으로써, 민족의 운명과 같이 하는 민족종교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수난 가운데서 교회는 연합을 이루었다. 1918년 3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 협의회가 발전하여 1924년 9월 24일에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다 되었다. 이전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 각 교파 선교단체 및 기독교단체까지 포괄하는 11개 교회, 단체가 회원권을 갖게 되었다. 이 공의회는 1928년 국제 선교협의회(IMC)가 주도하는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4명의 한국인을 포함하는 6명의 대표를 파송 하고, IMC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흥교회의 대열에 서서 세계 에큐 메니칼 운동의 조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그때에 세계 교회의 무대에 독자적으로 서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다\"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경제적으로는 먹을 것을 빼앗았고 문화적으로는 말과글을 빼앗았다. 마지막으로 종교까지 빼앗았다. 이것이 신사참배 강요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로 무한한 고통을 당했다. 일본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요구했다. 예수의 재림 과 만왕의 왕이 있음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말세와 내세를 밝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그런 찬송 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기독교 학교를 억압하고 폐교시켰다. 어떤 기독교학교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하여 스스로 문을 닫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이를 반대하였지만 압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따르는 사람도 있었고, 개중에는 진심으로 일본에 협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공식으로 가결하였는데 해방후 이 결의를 취소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의 순교자들은 목숨으로 신사참배에 항거하였다. 2천 여명의 신앙인들 이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투옥되었다. 200여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었다. 1943년에 이르러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장로교,감리교, 구세군 등의 모든 교파가 해산되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되었다. 이 때는 이미 70만을 헤아리던 개신교인의 숫자가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국교회는 가장 어려운 수난의 시기를맞이해서 크게 위축되었다. 

\"조국은 해방되고 교회가 재건되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우리는 독립을 회복했으나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그 위세를 업고 김일성에 의해 공산당이 조직되었으며 교회를 탄압했다. 많은 교인들이 살 길을 찾아서 월남하기 시작했다. 1947년 4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재건되었다. 1949년 제35회 총회는 그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하였다. 그 해에 장로회신학교도 복구되었다. 북한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친 공산당 조직의 기독교 단체가 만들어졌다. 

1950년 6.25동란으로 우리 민족과 국토가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입었다. 교회도 무섭게 큰 피해를 입었다.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남한으로 피난해 내려왔다. 남아 있던 목사와 교인들은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남한의 목사와 신부들도 납북되어 살해되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휴전 후 북한교회는 공산당에 의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평양에 공식적인 교회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한에는 교회가 재건되고 부흥하였으나 교회는 분열되었다. 특히 장로교의 분열이 극심하였다. 신사참배 처리 문제로 고신파 교회가 1952년에 갈라졌고, 신학노선 문제로 기장이 1953년에 이탈해갔다. 1959년에는 신학교 문제와 에큐메니칼 운동 참여 문제로 합동측 교회가 분립하였다. 남한에 세워진 민주정부에 기독교인들도 참여했으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의 4.19혁명과 1961년의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났다. 

\"교회의 성장과 사회참여\" 

60년대 이후에 산업 발전과 함께 근대화와 도시화가 추진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이 농촌을 떠나서 도시로 이주해 왔다. 교회는 이들을 찾아가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했다. 곳곳에 대형 교회들이 세워졌다. 1965년에 개신교 선교 8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복음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대 초에는 전군 신자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군 부대에서도 합동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1973년에는 3,200명이 동시에 세례를 받았다. 1973년에 빌리 그레함 목사 초청 부흥성회가 개최되었다. 대형전도집회의 시작이었다. 1974년의 엑스폴로대회, 1977년의 77 민족복음화 성회가 이어졌다. 이 대회의 개회예배는 일시에 80만 성도가 모여서 집회를 갖는 진기록을 남겼다.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70년대 말로 개신교 신도가 700만 명을 넘어셨다. 

한편 70년대에 한국교회는 \"유신\"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군사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노동자들을 찾아가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교회는 산업선교와 유신헌법 철폐를 부르짖었다. 노동자들을 찾 아가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교회는 산업선교와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 옥에 갖힌 인사들을 위하여 기도회 를 개최하였다. 교회는 선교 자유 수호를 결의하고 투옥인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는 정부의 선교 자유 침해에 항의하였다. 교회는 예언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30여년에 걸친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고, 교회의 사회선교에 대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1984년에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를 개최하였고, 국제선교운동(선교사파송운동)을 결의하였다. 언더우드 내한 100주년 기념 연합예배, 순교자 기념예배, 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이 이어졌다.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 선교 200주년을 기념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순교자 103명에 대해서 성인 시성식을 집전하여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뜻깊게 하였다. 

남북교회간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1986년 WCC 국제위원회의 주선으로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와 남한 교회 대표가 스위스 글리온에서 분단 이후 처음 만났다. 1988년에는 인천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교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민족 최대의 과제인 통일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 이르러 북한에 첫 예배당 봉수교회가 건립되었다. 북한 당국의 태도가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1994년 현재 119개국에 3,27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5만9천여명), 인도, 영국, 카나다, 호주, 독일에 이어서 세계 7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사회선교와, 새로운 가치관을 심는 경건절제와 환경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다. 교회 개척 운동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과 세계를 위한 사명을 감당하여 참된 의미의 민족종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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