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와 결별]
추수대회가 끝나고 난 뒤 기백은 꿈속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우선 주변 사람들이 추수대회의 챔피언이라며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긴 했다. 제임스를 기절시킨 (뇌진탕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의 공격이 유효한 공격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건 풍 노사의 멋진 시연으로 기가 한풀 꺾인 더글라스가 수그러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추수대회의 우승은 기백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태극권” 시합에서 “태극권”을 사용해서 “태극권”을 구사하는 상대를 꺾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사용했던 기술은 태극권의 외형을 가장한 유도적인 힘이었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아니, 꼭 유도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냥 선천적이고 늘상 써오던 힘이었다. 풍 노사에게 태극권 공방의 진수를 맛보았는데 그것을 모르랴!
다만 기백이 더욱 더 꿈속을 걷는 듯한 멍청한 아이로 변해버린 것은 풍 노사의 그 황홀하리만치 정교하고 부드러웠던 기술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고 하루 종일 궁리했기 때문이다. 균형을 깬다, 상대의 허점을 포착한다, 약한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요소는 다른 무술에도 있는 것이고 기백도 무수히 경험해본 것들이었다.
하지만 정작 새롭고 너무도 신비스러웠던 것은 풍 노사가 시종일관 보여주었던 그 황홀할 정도의 부드러움이었다. 풍 노사의 팔은 한번도 단단하게 경직된 적이 없었다. 풍 노사의 모든 동작, 모든 신체 부위에서 한 번도 저항감이 느껴진 적이 없었다. 흐르는 물에 저항할 수 없이 어느새 격류에 휘말리는 것처럼. 그리고 풍 노사는 마치 기둥처럼 땅에 뿌리박고 서있어서 밀건 당기건 요지부동이었다. 요지부동이지만 저항은 없었다니!
대회가 끝나고 다시 운동을 나가서 기백은 앤드류를 붙잡고 늘어졌다. 풍 노사님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풍 노사님의 추수실력에 대해 말해주세요. 추수에서 사용하는 힘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풍 노사님을 소개시켜주세요!
오호, 귀찮음의 극치가 이보다 더하였으랴. 앤드류는 기백만 나타나면 슬슬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백은 어떻게 해서인지 반드시 앤드류를 찾아내서 끝까지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물고 늘어지는 기질을 보여주었다. 이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태극권에서 “상대와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첨연점수의 비결과 상통하는 행위였다.
앤드류는 직업이 치과의사이고 건강과 취미를 위해 태극권을 연습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나이는 마흔 여섯인데 태극권에서는 5년차였다. 기백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이빨이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 것을 크나큰 낙으로 삼고 있는 착한 아저씨였다. 앤드류는 어느날 기백을 불렀다.
“기백아, 네게 할말이 있다. 나도 추수를 배워보려고 몇 번 시도해봤지만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 태극권은 선천적인 힘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얻어지는 전혀 새로운 후천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고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게 만만치가 않단다. 내 생각엔 약간의 사기성이 섞였거나 중국사람들이 과대포장하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추수에 대해서 나한테 제발 꼬치꼬치 묻지 좀 말아라... 특히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말이야.”
기백은 이런 말을 뱉는 사범에게서 더 배울 마음이 없어졌다. 사실 앤드류에게 태극권을 배운 것은 학교 안에 위치해있다는 지리적 편이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앤드류여, 잘 있거라! 그 동안 감사히 잘 배웠다.
[스승을 찾아서]
기백이 무술에 미쳤다고는 하지만 그도 엄연한 학생이다. 정통 태극권을 배우러, 추수의 진수를 얻으러, 풍 노사를 만나러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현실은 쉽지 않았다. 기백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시험에다 과제물에다 세미나에다 정말 바빴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서처럼 대강 인터넷에서 남의 글 퍼와서 과제물을 제출했다가는 퇴학당하기 십상인,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래도 기백은 틈틈이 태극권 도장들을 찾아다녔다. 풍 노사를 만나기 힘들다면 그 비슷한 실력이라도 다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도장과 체육관과 동호회와 건강센터와 주부교실... 태극권 관련된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찾아가보았으나 추수에 능숙한 스승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백은 많은 태극권 사범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가려들어야 할지 판단하기에 기백은 아직 너무 어리고 무지했으나 차츰 사람들이 추수 또는 태극권과 실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사범은 말했다. “태극권은 본질적으로 건강체조예요. 건강효과를 얻고 싶으면 굳이 추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명이 맞붙어서 싸우는 모습은 태극권의 평화적인 이미지와도 어긋납니다.”
어떤 사범은 말했다. “용의불용력(힘을 사용하지 않고 마음을 사용하라)이나 이유극강(약함으로 강함을 이김)과 같은 원칙은 옛날 사람들이 자기 무술이 신비롭게 보이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실제로 추수에서 그런 원칙은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단적으로 이것은 물리학의 법칙에 위배되잖아요.”
추수에 능숙하다는 사범들도 만나보았다. 물론 기백은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어떨 때는 흔쾌히 한 수 주고받았지만 어떤 때는 시대착오적 무식한 싸움꾼 취급을 받으며 쫓겨났다. 많지는 않지만 기백이 추수를 겨뤄본 사범들은 하나같이 기백이 기대했던 “부드러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완력과 근육의 힘에 의존하였고 유도선수 출신인 기백을 꺾은 자는 없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태극권의 실전성에 대한 맹신적 믿음을 지닌 기백이 망상론자이거나, 태극권의 실전을 부정하는 여러 사범들은 외도를 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