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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의 사망은 페미니즘의 부재의 결과다.

겜하기힘들다 |2019.10.16 17:36
조회 263 |추천 0
설리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흔히 미인이라고 한다. 혹은 미녀라고도 한다.미인은 예로 박명하다고 했다. 설리는 그 예의 가장 좋은 정점이다.설리의 첫번째 문제는 남자가 아니란 점이다. 이건 커다란 문제였고 지금도 커다란 문제다.두번째 문제는 유별나다는 점이었다. 이는 성격을 말하는게 아니다. 바로 생김새가 유별났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남자가 아닌데 유별날 경우, 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고,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그 관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전형적인 그 케이스라고 할 미인은 박명할수 밖에 없었다. 미녀는 두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하기에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갓이나 쓰고 사는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요즘은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시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 본질을 언제 어떻게 눈치를 채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격렬하게 달라지고, 온전한 자신의 장점으로 남을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언제나 파멸로 가는 열쇠일 수 있다.
 어릴 때 부터 우리는 동화를 통하여 세상을 배운다. 그러한 동화는 성실함, 용기, 희망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어릴때부터 세상의 진리인냥 배우면서 믿어간다. 그런데 그러한 동화에서 입장이 다른 사람들도 존재한다. 보통 동화의 주인공은 남자이고 여자는 객체화 되고 남자의 성취해야 할 전리품이 되기 쉽다. 흔히 이야기하는 용사는 공주를 구하고 결혼하여 나라를 물려받아 끝나는 동화는 실제 존재하지 않으나(신화에는 많긴 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건 난로앞을 통해서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의 규칙과도 같다.  그렇기에 여자는 처음에는 자기 역할을 오해한다. 자신이 용사가 아니라 공주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방 깨닫게 된다. 대부분 자기 자신에겐 그러한 수준의, 즉 용사가 목숨을 다툴 수준의 그런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가치는 처음부터 선별된 일부의 유별난 존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쨌거나 평범한 용사를 꿈꾸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자신도 분명히 공주가 될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인 여성(정확히는 남성이 아님)을 갖추고는 있으나 이제 그것은 큰 가치가 없고, 그 가치가 획득되는 순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사회적 엑스트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즉 용사가 공주를 구해서 오는 것을 박수치는 평범한 부부의 하나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끝까지 그 역할을 다르게 부여받은 존재는 존재한다. 앞서 말한 두가지를 전부가 가지고 있는 존재, 바로 남성이 아니며 동시에 유별난 외모를 가진 존재다. 이러한 존재는 실제로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역할이 공주라고 믿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대접을 받으면 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의 파멸을 위한 첫번째 열쇠임을 자각할 수는 없다. 지금의 세상에서 사실 남자라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다. 예전에는 그나마 영달을 위한 필요조건적 위치라도 획득했으나 이제 그 조건은 완전히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세상의 권력층은 그 조건을 상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공주를 위한 조건은 유효하다. 물론 눈치 빠른 사람은 가장 중요한 조건을 눈치챘겠지만, 그것이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두번째 비극의 열쇠다.
그렇게 그러한 존재는 자타공인 일반적인 자들과 다른 가치를 획득하게 되며, 주위에서 적어도 그 가치는 유효한 채 성장하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교육 환경이었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그 배움의 내용은 그렇기에 여기에서 충분히 보는 눈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보는 눈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면 그 다른 특별한 지위에 안주한 채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유별남을 그대로 살려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딱히 원해서 그렇게 된것이라기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내려오기 힘든 말 위에 올라탄 것에 가깝다. 어쩌다보니 이미 모든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위에서는 그러한 자신을 부러워하거나 혹은 다가가고 싶어 하기에 그것의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다.
 그리고 그녀들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꽃피우게 된다. 그 시기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은 겪어볼 수 없는 유별난 여성들만 가질수 있는 특권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특권에 대한 부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특권을 계속해서 누리다 보면 그녀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화무 십일홍이라고 했는가, 결코 그 특권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겨우, 남들이 진작에 깨달았던 한가지를 깨닫게 된다. 공주가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옛날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 조건은 바로 정통성이다. 애초에 미녀가 아니라 공주여야 이야기가 성립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면 슬슬 유별남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혹은 스스로 그 유별남을 먼저 발로차고 벗어던져버릴 수도 있다. 스스로 어리석게 잘못된 왕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그제서야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된다. 황금 사과는 누가 먹더라도 빛은 나지만, 결코 그 전과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렇게 손 댄 사과의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도. 물론 뭐든지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상실하는건 대다수 만물의 법칙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이야기 하는 진짜 동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 동화는 신데렐라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백설공주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그것을 바라봐야 하는 인어 공주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인어공주가 바락바락 악을 쓰고 왕자를 찔러 죽이고 어떻게든 구차하게 살아나가는 그런 동화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이제 진짜 자신의 운명, 동화가 바라는 자신의 운명이 어떠한지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미녀가 추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름답게 사라지기를 원한다. 의외로 찾아보면 그런 경우도 많다. 영웅을 각성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미녀도 많다. 화무 십일홍 이후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추악해지지긴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제와서 이제 알고보니 나도 같은 처지였다라고 돌아오는 것도 썩 반갑진 않다. 내 환상, 내 가치관이 깨지는 것도 달갑지 않고 사실 가장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을 모르던 어리석은 것을 이제와서 같게 취급해줄 마음은 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평범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시간은 오로지 화려한 시기를 만들기 전까지만 존재한다. 그것을 모르고 이미 피어났다면 되돌리는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후에는 그 유별남이 피어난 결과가 만들어낸 모든 영향력이 그녀 자신을 더 먼저 지배한다. 즉 그 이후에 와서 하나의 생명으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미인은 박명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실제로 그 본질이 그것에 머무르지 않음을 아는데도 왜 그렇게 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올 마지막 기회를 모르고, 혹은 알았더라도 차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럴 권리도 있다는 것을 왜 우리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법은 없다. 감정은 오로지 아는 사람에 국한되어 드러난다. 이 안다는 것은 결코 쌍방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아는게 아니라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기에 한쪽만으로도 충분히 성립한다. 그러나 결국 쌍방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한쪽은 무조건 받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나마 이것이 그렇게 괴롭지 않다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것이 괴로운 쪽으로 변하게 되면 당연히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악플은 결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내가 악플을 달았기에 그녀가 죽었다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당연히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악플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쌍방성의 결여는 엄청난 문제점을 가진다. 사실 직접적으로 달리는 악플은 그렇기에 제대로 힘을 쓰기 힘들다. 쌍방성에 의하여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미치는 영향을 버티는 것은 거꾸로 전리품인, 광대인 그녀들이 훨씬 잘한다. 그럼에도 혹은 어쩌면 그렇기에 우리는 쌍방성 자체를 여전히 용납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전리품에 감히 그러한 것을 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 그녀들은 사람이 아니다. 단지 사람으로서 쟁취해야할 하나의 가치에 불과하다.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의 머리속은 이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사실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에 대한 해답을 주고, 그리고 생각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사실 설리와 같은 흔히 그 '미녀'들은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이지만, 그녀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상은 평범한 인간이 가져야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동화속에서 '다른 역할'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그 미녀와 똑같이 객체화가 되고, 대부분 영웅을 위한 하나의 요소로 전락하게 된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단순한 전락을 피하는 능동적인 존재는 오로지 '왕'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페미니즘은 바로 그러한 외침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주의가 아니다. 실제로 페미니즘이라는 그 말이 생성되어 쓰이던 무렵에 페미니즘은 거꾸로 여성의 특징을 나타내거나 여성 해방(성적)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하여 진짜 페미니즘의 선구자들은 그러한 말을 쓰지도 않았다. 즉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이다. Homme (사람, 남자 =man)이 아닌 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쓴 하나의 단어일 뿐이지, 여자라는 요소를 강조하여 쓴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스스로를 여자로 규정짓는 사람은 없었다. 거꾸로 상류층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흉내내는 것들이 퍼졌고 그들은 스스로 다른 말을 만들어내 붙였다. 
 단지 그것은 남자(사람)이 아닌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동시에 그 사람이 아님을 규정짓는 말에 불과했다. 즉 내가 원해서 붙은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넌 사람이 아니다라고 규정되어 붙은 딱지에 불과했다. 그게 진짜 올바른 의미일 것이다. 당장 당시의 대 사상가 루소는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못밖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게 해야 올바른 것이었다. 어찌 감히 인간이 아니라고 이미 규정당해 있는 것에게 다시 인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것이 틀린게 맞는 것이다. 언어를 쓸 때 마다 그 의미를 밝혀서 규정하여 쓰는 사람은 없고, 당시 그 페미니즘이 나오던 서양에서 당연히 man이라고 할때 이걸 남자다 사람이다 굳이 콕콕 집어서 쓰는 사람은 없듯이 당시도 마찬가지이고, 그저 그렇기에 의미는 명백했다. 그런 와중에 감히 사람이 아닌게 나도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는게 어찌 정상으로 보였겠는가. 흑인 여자 같은 잡스런 것들이 이미 인간이 아닌데 인간 취급을 해달라니 얼마나 어이가 없고 가증스러웠겠는가. 물론 루소는 그 단어에 입각하여 인종은 사람을 구별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긴 했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외침은 가소롭고, 그리고 그렇게 외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그들은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지 못하여 여전히 '인간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그러한 모순은 당시 소위 페미니즘을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보여진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맨이 아닌 것은 맨이 아니었다. 단순히 맨만이 그것을 거부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맨이 아닌 것들도 그것을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것은 마치 노예가 주인이 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론 거꾸로 이 사상은 차라리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헤겔의 변증을 통하여. 그래도 적어도 슬레이브와 마스터는 인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맨이 아닌 것이 그러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긴 말이었다. 왜? 맨이 아니니까.
 그러한 착각과 괴리에 처음으로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게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하겠다. 그들은 아예 이제 스스로 인정을 했다. 나는 맨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렇기에 이제 나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그들은 아예 기존과 다르게 선언하고 나서서 투쟁을 결심했다. 그리고 사람이 되기 위하여 싸웠고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뒤에 기본을 갖추고 있다보니 마찬가지로 근본을 잊어버리고 추잡스러운 이득을 위해서 그 이후의 2세대 페미니스트,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이름값도 못하고 어떤 추잡스럽고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 안되는 것은 그렇게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끔찍함 속에서 오히려 그 끔찍함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나선 선구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것은 거꾸로 그 순간부터 사람의 자격을 그대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실제로 타인에게 인간이 아니더라도 나는 인간이라는 선언을 온 천지에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페미니즘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의 꼴페미란 년들이 감히 페미니즘을 입에 담는 그 더러운 꼴이 정말로 싫다.
 나 역시 어릴때부터 그 다르다는 이유(당연히 본인은 여자도 아니며 미인은 더더욱 아니다)로 무리에 끼지 못했고, 그렇게 무리에 끼지 못하는 나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기에 혹독하게 처벌받고 혹독하게 대우 받았다. 그러한 나를 깨우쳐 준 것도 바로 그 페미니즘이었다. 내가 인간인 이유는 남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내가 인간이고자 하기에 인간인 것이다. 데카르트가 옳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에 나일 뿐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실 그와 같은 것이 문제가 되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란 내가 인간이고자 하기에 인간이고, 자신은 온전히 자신이 결정하는 것임에도, 억지로 사람을 각종 상황에, 규제에 집어넣고 그렇게 꼭두각시가 되라고 세상은 강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꼴페미라고 하겠다. 꼴페미들은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라는 도구를 내세운다. 그걸 가지고 타인의 인간성을 부정하려고 한다. 물론 단지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굳이 그것을 문제 삼는 이유는 마지막에 설리가 돌아가기 위한 귀환의 수단으로 바로 페미니스트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페미니스트는 되는 그 순간에 스스로 사람이 되는 것임에도 부단히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꼴페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이 것이 안타깝다. 모든 자살자의 근본적 귀인에는 이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성적으로 인한 비관이던, 이지메로 인한 괴롭힘이던, 리벤지 포르노의 곤란함이던, 무엇이던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설리가, 그래서 그러한 선택을 할수 밖에 없었던 그 아픔이 안타깝다. 그리고 꼴페미들, 스스로 페미니즘을 논하면서도 그 근본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 근본에 대한 의미도 없이, 오히려 페미니즘의 이름을 더럽히고 끝까지 설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죽인 그들이 참으로 가엾다.
 먹고하고자고 같은 거나 발표하여 설리에게 다시 한번 그녀의 존재 처지 그리고 위치를 각인 시킨, 그리고 그 위치를 다시 한번 더 공유하면서 현실을 각인시켜준 그 남자들 역시 분명히 책임이 없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어떻게 보면 설리를 내치고, 숙명을 강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본다면 설리의 죽음은 어디에도 물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단지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운 동화속 역할놀이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페미니즘을 배워야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그 옆의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내가 사람이라고 인지할 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각성을 존중해주어야 진짜 사람들의 세상이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스스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세상은 삶을 살려고 노력함에도 쓰러지는 생명의 아픔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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