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 그 어느 계절에 우리가 만났었지. 둘 다 참 어렸어. 뭣도 모르고 서투르게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그 뜨거운 여름 아래에 핸드폰 하나로 대화하는 것으로도 행복했잖아. 그 여름, 아직도 못 잊어. 참 뜨거웠잖아.
여름이 차갑게 어는 겨울이 될 때, 서로에게 식어가는 걸 느꼈잖아. 내 잘못이었어. 입시를 핑계로 너에게 무심했어. 늦어지는 연락에 지쳐가는 네가 보였어. 미안했지, 지금 생각하면 콱 죽어 버릴 정도로 미안했어. 그때는 가볍게 생각했어, 연인이라는 이유로 네가 다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미안해, 무심했어서.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정신이 확 들더라. 지금까지 내가 무심했던 걸 뒤늦게 깨달은 거야. 내가 잘한 것도 없지만 울었어. 그날이 살면서 제일 크게 운 날이야. 끝까지 널 잡으려고 늘어졌지만 결국 잡는 거에 실패했잖아. 그때 알았지, 난 그제서야 알았어. 이미 마음을 굳힌 거겠지, 다시 잡아도 같은 이유로 헤어질게 보였어. 눈이 내리는 계절에 우리는 헤어졌어. 내가 흘리는 눈물이 눈송이가 되는 것 같더라. 야속하게도 하늘은 예뻤어. 그날의 예쁜 하늘처럼 넌 참 지독하게 다정했어.
다정하지 말지. 헤어지는 그날에는 좀 독해졌어야지. 내가 미워졌다고, 다시는 연락 받지 않을 거고 날 보지 않을 거라고 욕이라도 했어야지. 마지막까지 밥 잘 챙기라는 말이랑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네 말이, 지금까지도 나를 울려. 최근에 내가 들은 얘기도 날 울리더라. 헤어지던 그날, 너는 내 지인에게 내가 옷을 얇게 입고 다니는 걸 알고 잘 입고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며. 넌 참 짜증 나. 사람이 쓸데없이 다정해. 나는 네 다정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줄도 몰랐어. 그렇게 약 삼 년이 지난 지금도 네 생각에 잠을 설치곤 해. 잠만 설치면 다행이지, 밥도 자연스럽게 거르게 되더라. 너랑 헤어지고 살이 좀 빠졌어. 불면증에도 시달려. 바쁘게 살면 네가 잊혀질까 싶었는데,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는 않더라. 그래도 노력은 했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생각보다 널 잊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어.
네 기억 속 예전의 나와, 요즘의 나는 좀 달라. 가장 큰 점은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최근에 만나는 이 사람, 예전의 너보다 더 달큰하고 나에게 항상 다정해. 내가 뭘 하든 이해하고 기다려 줘. 어렸던 우리보다 생각이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야. 사소한 것도 기억해 주고, 내 생일에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 줘. 지나가다 보이는 예쁜 풍경이 날 닮았다면서 사진도 찍어서 보내 주고는 해. 아픈 상처로 울었을 날, 다시 웃게 해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 꽤 행복해. 네 생각이 지워져 가고 있어. 너는 삼 년을 쫓아다닌 내가 귀찮았을 거야.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게 너한테는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겨우 널 지운 거니까. 네 마음이 편할 거야. 그래야만 돼. 힘겹게 널 지운 나고, 힘겨운 날 기억 속에서 지웠던 너야.
또 달라진 점은 감정이 사라졌어. 어떻게 보면 좋은 것 같아. 너에 대한 내 감정 또한 무뎌진 거니까. 참 잘 된 일이야. 아마, 아마도.... 사람들이 다 묻더라. 감정이 사라졌으니까 걔에 대한 감정도 사라진 거냐고, 너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는데 말을 할 수가 없더라. 괜찮은 척을 하는 중이라서, 그래서 말 못했어. 나 좀 안 괜찮아.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으니까 됐어. 곧 괜찮아질 거야.
나, 네가 바라던 그대로 잘 살고 있어. 행복하지는 않아도 그저 그렇게 잘 사는 중이야. 네가 그렇게 못 이기는 척 연락을 받아줬던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하나는 확신해. 너나 나나 우리가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해서 몇 번을 다시 만난다는 걸. 그리고 이제는 다시 네가 나를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널 그리워하며 울었던 날들이 쓸데가 없어졌지만 괜찮아. 그냥 십대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생각할게. 네가 추천해 주었던 노래들을 들으면 그때의 너와 내가 웃고 있는 장면이 상상되지만 괜찮아. 내가 지우면 그만인 걸. 너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기억도 나지 않을 걸 알아. 네가 나한테 그려주었던 작은 하트 그림,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잖아.
있잖아, 난. 그때의 우리가 그리워. 작은 거 하나에도 웃고 떠들었잖아. 뭐가 그렇게 기뻤지, 우리는 뭐가 그렇게 달달했지, 뭐가 그렇게 좋았길래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나를 울리지. 그래도 지금은 나름 행복해. 지금 만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날 사랑해 줘. 연애할 때 나를 보며 예쁘다고 했던 네가 생각이 안 날만큼 날 당연히 예뻐해 주고. 진지한 고민이 있으면 잘 들어줘. 네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행복한 것 같아. (아마.)
같은 계절이 약 세 번을 지났어. 사람들은 새로운 봄과 더운 여름이라도 좋아했겠지만, 나에게는 모든 계절들이 추웠어. 시리고 시린 계절동안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마음도 없는 사람을 계속 만나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더라. 한 달도 못 가고 연락이 끊기는 게 슬슬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지더라. 그렇게 홀로 눈물을 흘리는 횟수가 많아지고, 외로움이 마음에 가득 들어찬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 사람 놓치지 않을 거고, 지금처럼 쭉 행복하려고 해. 예전처럼 널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해. 만나더라도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마주하자. 우리 이제는 그럴 수 있잖아. 너는 행복해도 돼. 무엇 하나라도 널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은 내가 가져갈게. 내가 그동안 널 힘들게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힘들게. 삼 년간 사랑했었어. 절반이 넘는 시간동안 한 외사랑도 좋았어. 널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고 행복했으니까. 진심이야, 사랑했어. 잘 지내야 돼. 내가 삼 년동안 널 사랑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게.
추신: 울면서 써서 앞이랑 뒤에 내용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 혹시 네가 이 글을 읽게 되는 날에는 나한테 꼭 사랑했었다고 해 줘. 그게 내 마음에 남은 10%의 널 완벽히 지울 수 있는 방법이야. 빈말이라도 좋아. 그냥 한 마디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