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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막리지 을지문덕 원수 평전』 ⑻

대모달 |2019.11.02 19:49
조회 109 |추천 0

 

4.제2차 여수전쟁


● 강이식의 은퇴와 을지문덕의 막리지(莫離支) 임용

돌궐에서 돌아온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영양태왕(嬰陽太王)에게 양제(煬帝)를 만난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영양태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왕은 수국(隨國)이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할 경우 돌궐(突厥)은 이번 전쟁에 중립을 지킬 것으로 짐작했지만 거란(契丹)이 걱정스러워 을지문덕에게 요서(遼西) 지역으로 가서 거란족들을 회유, 고구려 편으로 끌어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을지문덕은 여독을 풀 여가도 없이 다시 요서로 말을 달려 송막(松漠)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거란의 부족을 찾아갔다.

거란족의 지도자인 오사물(悟砂物) 막하불(莫賀弗)은 고구려에서 사신이 온다는 통보를 받고 여러 추장들을 대동한 채 송막을 떠나 무려라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하불이란 거란족의 부족장에게 붙여주는 칭호였다.

“그대가 수주(隨主)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을지문덕 공(公)이시오?”

“그렇소. 고구려의 북부욕살(北部褥薩) 을지문덕이라 하오.”

“돌지계(突地稽)를 돌려보내라고 오셨나본데, 그는 이미 수국에 귀부(歸附)하였소. 괜히 헛걸음을 하셨구려.”

노회한 오사물은 을지문덕을 떠보았다.

“내가 돌지계같은 소인이나 찾으러 여기까지 왔겠소? 여러분들께 긴히 드릴 말이 있소.”

“보아하니 고구려에 귀부하여 같이 수국과 싸우자고 말하러 온 모양인데 우리는 그럴 힘도 없고 의욕도 없소이다. 수국과 고구려가 겨루어 누가 이기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오사물이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을지문덕은 인내를 갖고 설득했다.

“막하불께서는 사세를 잘못 판단하고 계시오. 수국이 당장은 고구려를 두려워해서 거란에게 잘해주고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고구려와 수국 사이의 전쟁에서 수국이 이기게 되면 저들은 거란인들을 노예로 삼을 것이오. 예전 돌궐의 예를 잊지 마시오.”

을지문덕은 십여년 전에 서돌궐에게 패배한 동돌궐 사람들이 수국에게 투항한 후에 벌어졌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동돌궐인들은 수국으로부터 노예와 다름없는 멸시를 당했다.

오사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하자면 고구려가 수국을 이겨야만 하오.”

“그래도 수국은 우리에게 곡식과 재물을 원조하고 있소. 그에 비해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소?”

오사물 휘하의 추장 아율계(耶律契)가 나서며 을지문덕에게 따졌다.

을지문덕이 그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고로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도 있지 않소? 수주 양광도 무언가 이득이 있으니 재물을 보내는 것이오. 수주는 지금 고구려와의 전쟁에 앞서 주변세력을 정지하는 작업을 하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얼마 전에 유성으로 쳐들어왔던 거란이 뭐가 예쁘다고 그처럼 선심을 쓰겠소? 수국이 고구려를 제압하고 나면 거란족은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오.”

605년에 거란족이 유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수장(隨將) 위운기(韋雲起)는 수국에 복속된 돌궐족의 병사 2만명을 동원하여 거란족을 격파했다.

을지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술율적포(述聿赤抱)라는 젊은 추장이 나섰다.

“그렇다면 차라리 돌궐에 복속하는 것이 낫소.”

을지문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돌궐은 가난한 부족이므로 그대들에게 소와 말 등의 가축들을 요구한 것이오. 그에 비해 고구려는 물자가 풍요로운 부국(富國)이오. 그러니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곡식과 철제품을 지원해 주겠소. 그분만이 아니라 거란이 원한다면 예전에 우리가 사로잡았던 수인(隨人) 포로들도 보내줄 수 있소.”

을지문덕의 파격적인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때 소우창(蕭禹彰) 막하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을지문덕을 도왔다.

“삼년 전 저 괘씸한 수주가 돌궐을 꼬드겨 우리를 짓밟았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오. 그때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소? 수주 양광도 알고보면 양털 냄새나 풍기던 자였는데 중원을 차지하고 나더니 올챙이 시절을 잊고 난리를 치고 있소. 나는 고구려에서 오신 을지문덕 욕살의 말씀을 따르겠소. 그러니 수국이 좋은 사람들은 수국에 붙고, 돌궐이 좋은 이들은 돌궐로 가시오.”

소우창은 수국과 돌궐 모두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 둘씩 을지문덕의 편에 서더니 결국 고구려에 귀부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을지문덕은 다시 한 번 외교적 역량을 훌륭히 발휘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통해 을지문덕의 외교수완을 이렇게 칭송했다.

"…고구려의 지형을 보면, 동남쪽으로는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수국(隨國)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거란(契丹)·말갈(靺鞨)·돌궐(突厥)·선비(鮮卑) 등의 나라들이 있었다. 무슨 높은 산이나 큰 강도 없었고, 무슨 변경의 요새나 사막 같은 것도 없었으며, 그 강역(疆域)이 서로 이웃하여 가까이 붙어 있기가 마치 개의 어금니처럼 이어져 있어서 사방으로 적의 침입을 받는 곳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서는 수국의 기세가 열국들을 억누르고 굴복시켜서 모두 다 좌(左)로 돌라 하면 좌로 돌고 우(右)로 가라 하면 우로 갈 뿐 거역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라도 수국의 일부였고 백제도 수국의 일부였으며, 거란·말갈·돌궐도 또한 다 수국의 일부였으므로, 수국을 위하여 일하고 수국의 종 노릇하는 자들이 사방에 벌려 있으면서 수(隨) 천자(天子)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생략)

아, 기이하구나, 을지문덕의 외교수완이여! 손뼉을 치면서 한 번 칭찬해줄 만하도다. 결국 말갈도 우리가 이용하는바 되었고, 거란도 우리에게 이용되는바 되었으며,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날마다 청하던 백제도 결국 양다리를 걸치고 국경에서 관망만 할 따름이었으며, 일찍이 수국(隨國)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의 사신을 붙잡기까지 하였던 돌궐도 수국을 도와서 같이 치는 일이 없었으니, 그 사이에 사신을 보내어 오고 간 비밀스런 꾀와 기이한 계책들은 역사상 전하는 바가 없으나, 한 모퉁이에 홀로 서서 훌륭한 외교수완으로 적국의 무리들이 서로 돕는 것을 와해시킨 것만은 분명하니, 오호라, 진정한 위인(偉人)이로다."

이듬해에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영양태왕에게 고령(高齡)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주청했다. 영양태왕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강이식은 한사코 떠나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태왕도 강이식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강이식은 평양을 떠나며 을지문덕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영양태왕도 을지문덕의 능력을 잘 아는 지라 쾌히 그러겠다고 약조했다.

강이식은 수레를 타고 부여성을 방문하여 을지문덕에게 자신이 은퇴했음을 알리고 오직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데 힘써 달라고 당부한 뒤 백두산으로 떠났다.

강이식이 도성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양태왕은 을지문덕을 막리지(莫離支)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오늘날 국방부장관의 직책을 함께 내린 것이었다. 그러자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를 비롯해 태대형(太大兄) 부명호(扶明好),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 의후사(意候奢) 어문도(魚文道) 등이 격렬히 반대했다. 병권을 한 손에 거머쥔 막중한 자리를 근본도 알 수 없는데다가 관급이 대형(大兄)에 불과한 애송이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영양태왕은 옳다고 여길 때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강단을 지니고 있었다. 태왕은 끝내 귀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을지문덕을 막리지에 임명했으며 오늘날 육군참모총장 격인 병마원수의 직책도 겸직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을지문덕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을지문덕을 막리지로 임명하고 얼마 후, 영양태왕은 전국에 전시체제를 선포했다. 이때부터 고구려 사람들은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을지문덕은 먼저 전쟁에 쓰일 다량의 무기를 확보해야 했으므로 각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에게 명을 내려 무기 생산량을 늘리게 했다. 이때부터 관청의 장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소속 관청에서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두 배의 급료를 지급하여 사기를 끌어 올렸다. 관청에 속한 장인들 뿐 아니라 귀족들이 거느린 장인들도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해야 했기에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기의 생산이 늘어나자 자연히 철의 수요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 철의 생산량이 가장 많은 광산은 철산의 철광산이었다. 을지문덕은 철산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광부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사기를 고취시켜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광부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자 국내는 물론 멀리 말갈이나 실위에서까지 사람들이 광부가 되겠다고 몰려왔다. 이리하여 생산량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나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매일같이 철괴(鐵塊)를 싣고 광신을 떠나 무기를 생산하는 군기처로 가는 소가 끄는 수레들이 줄을 이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 못지않게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스러운 군사들이라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은 각 지방 관청에 명을 내려 곡식의 수확량을 늘릴 방책을 강구하고 전쟁을 수행할 때, 장기간 보관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건량(乾糧)을 연구하게 했다. 농부들은 수확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나락 하나라도 소흘히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아껴 군량미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곡식을 말려 미숫가루를 만들고 고기를 제염처리하거나 건조시켜 육포를 만들었아. 이때 동해안에서는 명태를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이 역시 군사들에게 더없이 좋은 건량이 될 것이었다.

장인과 농부 및 광부들이 이처럼 애쓰는 사이 상인들 역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은 사방 곳곳에 닿아 있는 그들의 교역망을 이용해서 수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상인들을 통해서 북방의 말을 비롯한 국내에서 부족한 전쟁 물자들을 입수했다.


● 양제(煬帝)가 고구려 침략에 동원한 수(隨)의 병력은 무려 1백 13만명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는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자, 을지문덕은 각 지역의 욕살을 비롯해 처려근지(處閭近支), 루초(婁肖) 등의 지방관들과 대모달(大模達)·모달(模達)·말객(末客) 등 주둔군을 이끄는 무관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을지문덕은 이 회의에서 전국 5부의 욕살(褥薩)들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남부욕살은 백제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동부욕살은 유사시 백성들의 피난 대책과 기밀문서의 관리를 책임져야 했고, 서부욕살은 서변에 대한 지원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더불어 을지문덕은 만일의 경우 수의 군대가 고구려 영토 깊숙이 쳐들어 왔을 때 각 지방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연계하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을지문덕은 지방의 방어체제를 정비한 후에 변방의 부족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들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큰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을지문덕이 그동안 애쓴 덕분에 말갈과 실위는 고구려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었지만 정작 수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돌궐이나 거란의 여러 부족들은 아직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방의 백제와 신라 역시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을지문덕은 영양태왕을 알현하고 이들 주변국들에 또 다시 사신을 보내 우호를 굳게 다져야 한다고 주청했다.

영양태왕 역시 철저한 대비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을지문덕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에 공감했기에 적극 동조했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여수전쟁(麗隨戰爭)에 앞서 북으로는 말갈족(靺鞨族), 서쪽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거란(契丹)을 포용했다. 이제 남은 일은 남쪽의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를 눌러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태왕은 백제와 신라를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한편, 대대로(大對盧) 연태조(淵太祚)를 사신으로 파견해 백제를 달래는 강온정책(强溫政策)을 펼쳤다.

제1차 여수전쟁 때에 전사했던 연자유(淵子遊)의 외아들인 연태조는 태왕의 명을 받들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에 당도했다.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잔뜩 화가 나 있던 무왕(武王) 부여장(扶餘璋)이 고구려의 사신을 반갑게 맞이할 리 없었다.

무왕은 연태조를 보자마자 큰소리로 따졌다.

“대고구려의 지체 높으신 국상(國相)께서 무슨 일로 우리 나라를 찾아왔소?”

연태조는 무왕의 냉대에 개의치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찾아온 목적은 백제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친선이라니? 우리의 송산성(松山城)과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해서 백성들을 잡아 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시오?”

고구려는 607년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고 3천명의 포로를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수국(隨國)과 통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동족(同族)인 백제가 이민족(異民族)인 수국의 편을 들었으니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이번에 변경의 두 성을 친 것은 단지 경고의 의미였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태왕께서는 백제와 화친하여 다시는 동족끼리 싸우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무왕이 연태조의 말을 듣고 보니 고구려 입장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무왕은 인상을 펴며 말했다.

“고구려의 태왕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단지 화평뿐이오?”

“이미 다 짐작하고 계시는 듯하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수와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면 신라의 도발을 막아주십시오.”

“신라를 막아달라?”

“그렇습니다. 이제껏 신라의 기를 꺾기 위해서 여러 차례 그들의 변경을 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청을 들어준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소?”

“예전에 사로잡았던 삼천 명의 백제 포로들을 돌려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향후 백제가 신라를 도모한다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무왕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실상 바다 건너 수국과 통교해본들 거리가 멀어 국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는 문제(文帝)가 파견한 30만 대군을 일거에 섬멸할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지녔다. 무왕은 선대(先代) 아신왕(阿莘王)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무왕은 심계가 남달랐기에 쉽게 동의하지 않고 짐짓 연태조를 떠보았다.

“만일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무왕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연태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별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라에 같은 제안을 할 수밖에요.”

무왕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왕은 예전에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배신했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백제의 성왕(聖王)은 한수(漢水)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수국과 손잡고 고구려에 대적할 수도 없었다. 이전의 여수전쟁이 좋은 본보기였다. 누가 감히 고구려가 엄청난 수효를 자랑하는 수국의 침략군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왕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구려가 예전처럼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사직조차 보존하기 어려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무왕은 짐짓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말했다.

“아하하, 짐이 잠시 그대를 시험했소이다. 우리는 고구려와 피를 나눈 혈맹(血盟)인데 내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 짐 또한 고구려와 잘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오.”

이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후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은 사실을 숨기고 줄타기 외교로 수국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인 611년 10월에 신라의 가잠성(暇岑城)을 공격하여 성주 찬덕(讚德)이 전사하게 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대운하 공사가 거의 끝나가자 대신들을 불러모아 고구려를 칠 뜻을 밝혔다.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짐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굴복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니 어찌 이를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이 시기에 수나라는 북쪽의 근심거리였던 돌궐마저 굴복시키고 만방에 그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고구려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 이후로 고구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도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으니 당분간은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양소(楊素)는 전쟁보다는 무리한 부역으로 인해 궁핍해진 백성들을 살피는 일이 먼저라 여겼다. 하지만 양제에게 있어 백성들은 물만 흐르게 해놓으면 언제든지 움직이는 물레방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대는 지난날 돌궐(突厥)에서의 일을 잊었는가? 고구려는 앞으로는 사신을 보내어 우리를 섬기는 척하지만 뒤로는 북방의 오랑캐들을 결집하여 우리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요 근래 들어서는 임유관(臨楡關) 앞에서도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 않느냐?”

양제는 양소가 말문이 막히자 모든 대신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결심한 바를 공표했다.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무거우며, 권세를 잡은 자들은 붕당(朋黨)을 지어 싸움을 일삼을 뿐 아니라, 뇌물을 받고야 일을 처리하니 백성들은 억울함을 풀 길이 없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으로 인해 집집마다 기근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름으로써 요역(了役)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부역과 재해로 힘이 다해 죽은 시체가 도랑과 구덩이를 가득 메우니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고구려 영토 안에서 비탄과 울음이 끊일 날이 없으니 짐이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하늘의 뜻에 따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일이 천하의 군주인 짐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신하들은 양제의 말을 듣다보니 마치 오늘날의 수국 현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수국은 모진 부역 때문에 민심이 이반하고 여기저기에서는 반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간하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은 자신의 치부(恥部)는 모르고 남의 잘못을 들추려 하는 양제의 주장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622년 탁군(涿郡)에 집결한 수의 고구려 침략군은 총 1백 13만 3천 8백명. 전군을 24군으로 편성했는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로 구성되었다. 1대가 1백명이었으므로 1군에 기병 4천명, 보병 8천명이었다. 이렇게 하면 전투병력은 28만 8천명밖에 되지 않지만 각군마다 치중대(輜重隊)가 전투병력 수만큼 편성되었다. 그 외에 중간에 보급기지도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한 경비병력과 병참부대도 있어야 하므로 총 113만이 된 것이다.

기병은 10대를 1단으로 하고, 보병은 20대를 1단으로 하여 군마다 4단을 두었는데 단마다 갑주와 깃발, 복장의 색깔이 달랐다. 이 엄청난 군대가 한 번에 출발할 수 없으므로 하루에 1군씩 출발시키되 군마다 40리씩 간격을 두게 했더니 전군의 길이는 9백 60리에 뻗쳤다. 이와는 별도로 양제를 호위하는 어영군 6군이 또 있었는데, 이들의 행렬한 80리였다고 한다. 이 광경은 과연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장관이라 칭할 만했으니 중국 역사상 초유의 병력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동원되었던 것이다.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대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영양태왕은 수군원수(水軍元帥)인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격인 막리지(莫離支)와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겸직하는 을지문덕, 그리고 국무총리 격인 대대로(大對盧)에 있는 연태조와 더불어 이에 맞설 방책을 의논했다.

“도적들의 수효가 무려 백만을 헤아린다 한다. 이를 어떻게 격파하면 좋겠는가?”

강단이 있는 영양태왕조차도 수군의 엄청난 숫자를 전해듣고는 다소 근심스러웠다.

“도적들이 백만 대군이라고는 하나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들을 제하면 실제는 오십만에서 육십만 정도입니다. 그것도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오합지졸입니다. 더구나 수주(隨主)는 지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사옵니다. 저들이 요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이개월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들은 엄청난 병력을 투입했기에 분명 보급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연태조가 상황을 정확히 짚어냈지만, 고건무가 그의 의견에 반박하고 나섰다.

“아무리 오합지졸이라 해도 숫자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탁군을 떠난 수의 대군이 임유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국경은 지금 초비상 사태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요서에 군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그러자 연태조가 다시 나섰다.

“우리는 먼저 이들을 대릉하(大凌河)에서 막을지, 아니면 요하(遼河)에서 막을지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연태조가 말을 마치자, 을지문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리하게 나아가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성을 굳게 지키며 도적들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대군인 저들은 보급에 문제가 생길테니 자연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를 노려 친다면 어렵지 않게 섬멸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건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대로 손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들판에 낱알 하나, 병아리 한 마리도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써야 합니다. 수군은 분명 많은 수효를 믿고 단번에 우리 성들을 함락시키려 할 것입니다. 군사의 숫자에서 열세인 우리 고구려가 저들과 정면으로 맞딱드려봤자 승산이 없습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고건무가 반박했다.

“저들이 우리 강토에 들어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오. 차라리 지난번처럼 요택에서 저들을 공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야말로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 여겨지오.”

잠자코 듣고 있던 영양태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군이 사오십만 정도의 군사라면 지난번처럼 오택으로 나아가 싸우겠지만, 저들은 도합 백만 대군이다. 요택에서 막아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을지문덕은 태왕의 말씀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 전쟁에서의 자신의 구상을 털어놓았다.

“지난 수국과의 전쟁 이후, 재침에 대비해 수백 명의 간자들을 수국 전역에 침투시켜 동향을 파악해 왔사옵니다. 또한 군사의 조련과 군비의 확충은 물론 변방의 성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유사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들은 요하를 넘는 즉시 우리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자신감이 넘쳤다.

이때 연태조가 신중하게 말했다.

“우리가 요동 방어선에서 수군의 주력을 묶어 놓을 수만 있다면 막리지의 계책이 좀 더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동성의 병력으로 수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을지문덕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요동성주(遼東城主) 고연탁(高連卓)은 침착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입니다. 그라면 아무리 백만 대군이라 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연탁 장군을 믿어보기로 하자.”

영양태왕은 결론을 짓고 나서 신하들을 둘러보며 명했다.

“막리지 겸 병마원수 을지문덕은 이번 전쟁에서 총 책임을 맡아 고구려 전군을 지휘토록 하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요동으로 떠나라.”

고건무는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을지문덕이 변방을 안정시킨 공로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에 있어서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자신이 그런 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태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왕의 동생인 고건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쓰린 속을 달래며 명을 받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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