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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막리지 을지문덕 원수 평전』 ⑽

대모달 |2019.11.02 19:53
조회 55 |추천 0
5.위대한 승전
● 평양성에 접근했다가 완패한 내호아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수국(隨國)의 수군(水軍)은 강회(江淮)지방, 그러니까 회수(淮水) 유역과 양자강(揚子江) 하류지역의 인원으로 구성한 군대였다. 이 군단 역시 전문적으로 배를 다루는 선군과 하역부대, 그리고 선단 방어를 위한 전투병력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투요원의 숫자만 최소한 5만은 넘었던 것 같다.

내호아의 함대는 풍파를 만나지 않고 대동강 언저리에 쉽게 당도하였다. 양제(煬帝)가 친히 통솔하는 육군이 요동성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내호아는 약속한 기일에 평양성에서 회전(會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공명심(功名心)으로 꽉 차 있었다. 내호아는 수군 단독으로 출전하여 일대 공로를 세우겠다고 별렀다. 부총관인 주법상(周法尙)이 육군과 합동작전을 벌여 평양성을 공략해야 한다고 만류했으나 내호아는 듣지 않았다.

수군(隨軍)의 함선들이 거침없이 패수구(浿水口)를 지나 강을 따라 오를 때, 주법상은 군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언제 강변에서 고구려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패수는 수심이 깊고 폭이 넓을 뿐 아니라 경사가 완만해서 수군의 오층누선처럼 큰 배도 어렵지 않게 항해할 수 있었다. 대규모의 선단이 이미 패수로 진입해서 평양성에서 지척까지 접근해 있는데 고구려 측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여긴 주법상은 내호아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고구려의 도성까지 가까이 왔는데 적의 반격이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혹시 복병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잠시 배를 멈추고 적의 동정부터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호아는 주법상이 지나치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고개를 저었다.

“적군은 우리보다 병력이 적다. 게다가 고구려의 도성이 가까이에 있지 않은가? 설혹 복병이 있다고 해도 그 수효가 얼마나 되겠는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종종 전쟁을 망치는 이유는 바로 노파심으로 인한 망설임이다.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

주법상으로서는 고구려군을 멸시하는 내호아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교훈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싸울 상대에 대해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전쟁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자만심에 차 있던 군대가 패전의 쓴맛을 본 예는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하지만 이런 불만을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한 내호아는 양제가 임명한 십만 수군의 우두머리였다.

내호아의 선단이 평양의 장안성에서 육십여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패수의 강폭이 좁아지면서 강가의 지형이 평야에서 삼림으로 바뀌었다. 주변에는 소나무, 전나무, 이깔나무, 물푸레나무 등의 다양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강바람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할 정도였다. 울창한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막히자 주법상은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주법상은 급히 누선의 꼭대기에 있는 망루로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강변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서 보니 마치 선단이 숲에 의해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숲 너머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숲 속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숲의 곳곳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더니 강의 양안(兩岸)에서 화살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수병(隨兵)들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져 갔다. 나무에 가려 어디에서 화살을 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장수들의 명령에 따라 수병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선창으로 몸을 숨겼다가 일어나 반격을 개시했다. 선창에 장착된 쇠뇌에서 크고 억센 화살이 날았다.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어림짐작해서 응사할 수밖에 없었다.

1천여 척의 배에서 일제히 화살이 날자 숲 속의 나무들은 완전히 벌집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병들은 계속해서 수풀을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수만 발의 화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타격이 컸는지 숲 속에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법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급히 내호아에게 달려가서 외쳤다.

“비명소리만 들릴뿐 정말 고구려 군사들이 죽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필시 우리의 화살을 소모시키려는 계책입니다. 당장 사격을 멈추어야 합니다.”

내호아는 그제야 깜작 놀라서 선창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화살을 낭비하지 마라. 배를 강변에 붙이고 상륙해서 고구려 군사들을 소탕하라.”

진장(鎭將) 염차(廉差)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제일 먼저 강의 좌안(左岸)에 상륙했다. 그 뒤를 이어 진장 장현욱(蔣鉉旭)의 부대가 강가에 도착했다. 이들이 상륙하자, 잠시 주춤했던 고구려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이 수장(隨將) 염차의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활을 쏘던 고구려군 병사들은 화살이 떨어졌는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염차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들을 휘몰아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치열한 단병접전(短兵接戰)이 벌어졌다. 고구려군은 비록 수가 적었지만 지형에 익숙하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아름드리나무에 피가 튀고 비명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양측 군사들의 시체가 가랑잎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때 주법상이 이끄는 후위군이 당도하자, 팽팽하던 균형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가뜩이나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분전하고 있었는데, 두세 배나 넘는 수군의 병력이 한꺼번에 당도하니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전멸될 위기에 놓였다. 고구려군은 수군의 공격을 받아치며 숲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먹이를 채어 달아나는 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염차가 그들의 뒤를 추격하려 하자, 주법상이 말렸다.

“저 뒤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네. 우리는 이곳의 지형을 잘 모르지 않나? 자칫하면 군사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어.”

염차는 피투성이가 된 칼날을 나무기둥에 꽂으며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배로 돌아온 주법상이 내호아에게 고구려군 병사들을 물리쳤다고 보고했다.

“내 뭐라 했는가? 저들의 방비가 이처럼 허술하니 평양성으로 곧바로 쳐들어간다해도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걸세.”

“이 모든 게 아군을 안심시키기 위한 저들의 술책일 수 있습니다. 일단 이곳에 정박하여 육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주법상은 간곡한 어조로 말렸으나 내호아는 한시바삐 평양성으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그대는 어찌 그리 소심한가? 장수가 적을 눈앞에 두고 싸움을 피하기만 한다면 언제 승리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겠는가?”

주법상은 아무래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내호아의 의지가 너무도 굳어서 반대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곳에 주둔하며 후위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맘대로 하게. 이번 일에는 많은 군사가 필요 없네. 내 단지 삼만의 병력만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보일 테니, 그대는 이곳에서 낚시나 즐기고 있게나. 내 들으니, 패수에는 살찐 물고기들이 지천이라 하더군.”

내호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주법상은 모든 모욕을 참아 냈다. 자신이 잠시 모욕을 감수함으로써 수하 군사들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적당한 곳에서 하선하여 대오를 짠 다음 평양성을 향해 나아갔다. 어느새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도 내호아는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국왕을 무릎 꿇릴 생각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 성벽 위에 횃불이 오를 무렵,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떼의 군마가 평양성의 서쪽 성문인 다경문(多景門) 앞에 당도했다.

“어서 문을 열어라.”

수문장(守門將)이 직접 횃불을 들고 살펴보니 무리 속에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의 모습이 보였다. 수문장은 황급히 성문을 열었다. 밝은 곳으로 나서자 고건무의 갑옷에 남아있는 생생한 전투의 흔적들이 드러났다. 뒤를 따르는 군사들의 형편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곧 적이 쳐들어올 테니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

고건무는 수문장에게 단단히 이른 후에 측신(側臣)인 고승(高勝)을 불러 은밀히 명령했다.

“고승 장군은 즉시 일지군을 이끌고 외성에 위치한 영명사(永明寺)로 가서 매복하시오.”

군사들의 배치를 모두 끝내고 성벽 위에서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아름다운 풍경들이 검은 먹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후 강가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발소리가 성벽 아래서 멈추었다.

날이 밝아 성벽 아래가 똑똑히 보이게 되었을 때, 성 위의 군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새 다경문 앞에 수병(隨兵)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었다.

고건무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별다른 동요 없이 침착했다. 그는 신기(神氣)에 가까운 기마술(騎馬術)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무사(武士) 풍잠(豊岑)을 불러 조용히 지시했다.

명령을 받은 풍잠은 전투 준비를 마친 후 휘하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그는 말을 타고 성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수문장에게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이 열리자, 풍잠은 장창(長槍)을 앞세우고 뛰어나갔다. 그의 뒤로 삼천의 기병이 함성을 지르며 따랐다. 고구려 군사들이 갑자기 치고 나오자 수군 진영에서 동요가 일었다.

풍잠은 곧바로 내호아가 있는 본진을 향해 말을 달렸다. 장현욱이 오십근짜리 대부월(大斧鉞)을 세워 들고 풍잠의 앞을 막아섰다. 두 장수는 군마(軍馬)를 몰아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여 삼십여합을 나누었다. 장현욱은 자신의 용력(勇力)에 대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풍잠의 마상창술(馬上槍術)이 너무 빠르고 현란해서 마치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내자 놀라고 부끄러워 온 몸이 달아올랐다.

장현욱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자, 염차가 재빨리 달려와 싸움을 거들었다. 풍잠은 적장 두 명의 협공을 받게 되었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을 받아넘겼을뿐 아니라 틈을 노려 상대의 허점을 찔러 들어갔다. 풍잠은 끊어짐이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장창(長槍)을 놀리면서 두 사람을 괴롭혔다. 염차는 영리하게 치고 빠지면서 상대 공격의 맥을 끊고 빈틈을 노려 도룡대도(道龍大刀)를 휘저었다. 장현욱은 쇠도 자를 듯한 강골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대부월을 풍차처럼 돌리면서 상대의 기운을 뺐다.

세 장수의 접전을 지켜보던 내호아는 합(合)이 이어질수록 자신의 부하들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명의 수군 장수가 단 한 명의 고구려 장수에게 눌리자, 내호아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적장의 손에 해(害)를 입도록 놓아두고 싶었다. 그런 정도의 실력으로 어찌 대수제국(大隨帝國)의 용장(勇將)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들의 패배로만 끝나는 일이었다면 내호아는 분명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수들의 싸움은 이번 전투에서의 승패를 가늠하고 기선을 제압하는 중요한 일전이었다. 이 싸움에서 수군 장수들이 진다면 고구려 군사들의 사기가 오를 테고, 그리 되면 고전(苦戰)을 할 수 있었다.

내호아는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수군(隨軍)들이 쇄도해 들어가자, 팽팽했던 균형은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고구려 군사들은 수군의 공격에 힘겹게 저항해 보았지만 계속해서 성 쪽으로 밀려났다.

두 적장과의 결투에 몰입해 있던 풍잠은 사세가 불리해졌음을 깨닫고 그곳에서 몸을 빼내서 재빨리 도망쳤다. 기세가 오른 수군은 성문으로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맹렬하게 추격했다. 평양성에서는 후퇴하는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성문을 열었다. 그런데 뒤쫓는 수군의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성문을 닫으려 했을 때는 이미 수군이 성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와 수군 병사들이 뒤섞이며 성문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틈에 내호아는 본대를 이끌고 성문을 점령해 버렸다. 졸지에 성문을 빼앗긴 고구려 군사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내호아는 곧 고구려의 국왕을 잡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밀어붙였다.

하지만 평양성(平壤城)은 외성(外城)과 중성(中城), 내성(內城)으로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성의 성문을 통과했다고 해도 왕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관문이 많았다.

외성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수국의 군대가 성안으로 몰려들자, 외성을 버리고 정양문(正陽門)과 함구문(含句門)을 통해서 중성으로 피한 후, 성문을 굳게 닫았다.

외성을 빼앗은 내호아는 중성과 내성 또한 곧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마침 날이 저물자, 내호아는 하루 종일 전투에 지친 군사들에게 성민(城民)들이 떠나 텅 빈 집들을 배정해 주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일단 외성에서 밤을 보낸 후, 전열을 정비하여 단번에 중성과 내성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평양성의 외성은 서민(庶民)들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구획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길가에 가로수들이 줄을 맞추어 서 있는 모습이 도성 전체가 잘 정돈된 느낌을 주었다. 각 구획마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어림잡아도 수만 채에 이를 듯 했다. 이것만 보아도 평양성이 얼마나 번화한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집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소담하고 정결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고구려 백성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수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모두 중성으로 대피를 마친 듯했다. 수국의 군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군량을 아끼기 위해서 집집마다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았지만 어찌나 철저하게 챙겨 갔는지 겨우 찾은 것이라고는 오래된 곡식 몇 자루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개와 닭 몇 마리 정도였다.

수군 병사들은 오랜 항해로 인한 피로와 고구려의 도성을 점령했다는 자만심에 군기가 해이해졌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피로에 지친 수군 병사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파수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은 온통 정양문과 함구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고구려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어둠이 몰고 온 정적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피워 놓은 화톳불의 불씨는 사그라들었고, 보초를 서는 군사들도 선 자세로 졸고 있었다. 그들은 간간이 졸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통에 놀라서 깨기는 했지만 주변이 조용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평양성은 언제 전투가 있었나 싶게 평화롭고 고즈넉했다.

이때 어둠 속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움직이는 한 무리의 그림자가 있었다. 무리는 점점 그 수가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길가를 가득 메웠다.

앞선 사내가 횃불을 받쳐 들며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불길이 일고 쇳소리가 울리면 적병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베어라.”

불빛에 비친 얼굴은 바로 고건무의 측신인 고승이었다. 고승은 고건무의 명령을 받고 영명사에 숨어 있다가 적군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성 곳곳에서 불길이 오르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외침을 듣고 놀라서 집 밖으로 뛰쳐나오던 수군 병사들은 밖에서 지키고 있던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창으로 수병들을 찌르다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목을 베었다. 저승사자라 해도 이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넓은 저택에 들어 비단으로 꾸며진 호사스런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내호아는 밖에서 일어난 소란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창밖에서 화광(火光)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내호아는 문을 열고 뛰쳐나오며 부하들을 찾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이때 진장 염차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집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고구려 군사들이 기습을 해왔습니다. 분명 중성으로 통하는 문들은 충분히 경계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군사들은 어찌 됐느냐?”

“각기 집을 배정해 분산해 놓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군사는 한 군데 모아 두어야 힘을 발휘하는 법인데, 이리 흩어져 있으니 아무리 수효가 많아도 고구려 군사들을 막아 내기 어렵습니다.”

내호아는 자만심으로 전술의 기본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서 군사들을 모으도록 해라. 저들은 이 외성(外城)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수효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곧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내호아는 염차를 대동하고 집 밖으로 나가 화광이 충천한 성안 구석구석 돌며 놀라고 흥분한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모이도록 했다. 그들이 다경문과 고리문을 잇는 대로에 접어들었을 때, 장현욱이 한 명의 적장과 자웅(雌雄)을 겨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현욱은 있는 힘을 다해 대부월(大斧鉞)을 내두르며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반면 장현욱과 맞서는 고구려의 장수 고승은 마치 어린 아이를 상대하는 듯 장현욱의 공격을 너무도 쉽게 피하고 있었다.

“제법 근사한 무기를 들었다마는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는 네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겠구나.”

고승은 교묘하게 장현욱의 비위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에 장현욱은 냉정을 잃고 마구잡이로 대부월을 휘둘렀다. 싸움에서 냉정을 잃으면 상대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그리되면 당연히 승리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마련이었다.

염차는 장현욱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달려가서 고승에게 덤벼들었다. 내호아도 군사들을 거느리고 그를 돕기 위해 달려갔다.

구원군이 달려오는 것을 본 고승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명(命)이 길기도 하구나. 이번에는 그냥 살려 두겠다. 되도록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오래 살 수 있는 길이니라.”

고승은 군사를 이끌고 정양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장에게 단단히 창피를 당한 장현욱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당장 만회를 하지 못한다면 어찌 군사들 앞에서 호령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스스로 칼을 물고 자결하는 게 나을 일이었다.

여전히 성안 곳곳에서 불길과 함께 고함소리와 창칼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현욱은 투구를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외쳤다.

“내 만일 이 치욕을 갚지 못한다면 살아서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장현욱은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양문 쪽으로 달렸다. 그의 안위를 걱정한 염차는 이를 말리기 위해서 뒤쫓았다. 달려가는 염차의 등 뒤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뒤에 남은 내호아는 대로변으로 도망쳐 나온 군사들을 모아서 반격을 준비했다. 인원을 점검해 보니 원래 인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실로 막심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내호아의 오기는 꺾이지 않았다.

“적의 기습은 전장에서 늘 있는 일이다. 비록 이번 일로 약간의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직 고구려군을 압도할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반격을 개시하여 애석하게 돌아간 전우들의 원한을 갚아 주도록 하자.”

내호아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반격에 나섰다. 해가 선명하게 붉은 얼굴을 드러냈다. 수군의 창검이 햇살을 받아 다시금 빛났다.

그때 멀리서 염차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군사들 역시 무언가에 쫓기는 듯 급히 뛰어왔다.

내호아 앞에 당도한 염차가 다급하게 외쳤다.

“고구려의 주력군이 함구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미 상당한 전력을 잃은 마당에 양쪽의 적군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벅찬 일이었다.

그때 염차가 고개를 푹 꺾으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내호아가 황급히 다가가 어깨를 잡고 일으키려 하는데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호아가 놀라서 그의 어깨 부위를 살피니 깊은 창상을 입었는지 피가 흥건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보게, 괜찮은가?”

염차가 잦아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장현욱의 시신을 찾아서 함께 고향으로 보내 주십시오.”

염차는 이 말을 남긴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면 장현욱 또한 죽음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내호아는 졸지에 수족(手足)을 잃은 듯했다. 아무리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그였지만 이번 충격에서는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내호아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황금 갑주(甲胄)를 입은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의 왕성 수비대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내호아는 급히 말에 올라 군사를 정돈하여 고구려 군사들을 맞았다.

고건무가 등편(藤鞭)을 치켜들고 내호아에게 큰 소리로 호통쳤다.

“네놈이 수(隨)의 수군총관(水軍總管) 내호아로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왔더란 말이냐? 너는 성지(聖地)를 더럽혔으니 당연히 큰 벌을 받아야 한다.”

내호아는 고건무만 죽이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장검(長劍)을 빼들고 고건무에게 달려들었다. 고건무의 호위무사인 풍잠이 내호아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창과 칼이 부딪치는 것을 신호로 고구려군 병사들이 일제히 수군에게 달려들었다. 수군 병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이에 맞섰지만 이미 사기가 꺾인 상태였으므로 무기를 버린 채 제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내호아는 풍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풍잠의 공격에 점점 팔의 감각이 무뎌졌다. 내호아는 더 버티다가는 목숨을 건지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풍잠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일단은 목숨을 건져 후일을 기약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내호아가 달아나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수군 병사들마저 무너져 내렸다. 이제 이들은 그저 살길을 찾아 헤맬 뿐이었다.

내호아는 호위 군사 십수 명의 호위를 받아 혈로를 뚫고 간신히 대동문(大同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미 풍잠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풍잠은 외성 안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앞질러 와 있었던 것이다.

“구차하게 살려 애쓰지 말고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풍잠이 장창(長槍)을 곧추 세우고 서서히 내호아에게 다가갔다. 내호아는 살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대동문이 열리더니 한 떼의 군사들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풍잠이 놀라서 손을 멈칫하고 있을 때, 백여 명의 수병(隨兵)들이 달려와 내호아를 감쌌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눈을 떠 보니 어느 틈에 주법상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이처럼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평소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통에 밉상으로만 여겼는데, 이제는 하늘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 보낸 신장(神將)처럼 느껴졌다.

내호아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서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고구려의 본군이 당도하면 남은 전력으로는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앞장을 선 주법상이 풍잠을 밀어 제끼며 무섭게 말을 몰아 나갔다. 내호아는 그새를 놓칠세라 황급히 뒤따랐다. 뒤에서는 “내호아를 잡아라”라는 고구려 군사들의 외침소리가 따갑게 들려왔다.

내호아는 온 힘을 다해 지친 말에 채찍을 내리쳐서 꽁무니를 뺐다.

이리하여 내호아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대동문을 빠져나가 선착장에 당도하니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호아는 배에 몸을 싣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호아가 탄 배는 곧바로 노를 저어 선착장을 떠났다. 점점 멀어져 가는 평양성을 바라보며 내호아는 한바탕 악몽(惡夢)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거느렸던 3만의 군사들 중 살아남은 수군은 겨우 삼십 명뿐이었다. 수군의 대참패였다.

“해가 한창 중천에 있는데 악몽이라니. 필시 낮도깨비에 홀린 것이 분명해.”

내호아는 고개를 저으며 측은하게 중얼거렸다.

해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고, 대동강의 시퍼런 물은 쉼 없이 하류로 배를 밀어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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