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지 6개월째에요.
아주 예전에 어릴 때 제가 짝사랑했던 사람인데 돌고돌아 성인이 되서 다시 보게 됬어요. 먼저 고백받았을 땐 믿기지가 않았어요. 그 땐 더 소심하고 부끄럽고 그냥 대화하는 거 자체가 너무 떨려서 고백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접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다시 만나서 고백 받으니까 ‘내가 만만하고 쉬워보이나..?’ 싶더라고요.
몇 번을 물었는데 그냥 ‘아 진짜 진심이구나’ 라는 느낌밖에 안 받으면서 다시 그 사람한테 설레더라고요.
저는 어릴 때 그 사람을 포기한 게 그냥 마음 깊숙히 묻어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 모래에 묻어둔거였네요. 시간이 흐르면서 바람에 점점 모래밑이 드러나듯 아주 얕게 묻혀있던 사람이었더라고요.
사귀는 10개월정도 동안 눈 한번을 제대로 못봤어요.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에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느껴지고 모든 게 멈춰지더라고요. 그냥 멍해져요. 얼굴이 빨개지는게 다 느껴질 정도로 멍해지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눈을 못 마주치고 그 사람 옆 모습만 엄청 봤었어요. 싫어서 눈을 못 마주친 게 아닌데 그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 기억할 지 모르겠네요. 나쁜 기억마저 미화시키고 있는 거 같아요. 헤어지기 두어달 전 정도부터는 학교 일, 자기 일을 우선으로 두고 점점 저한테서 멀어져가는 그 사람이 분명히 밉고 너무 지치고 힘들었는데 헤어진 지금은 좋은 기억만 잔뜩 나네요. 그 때 썼던 일기를 얼마 전 보게 됐는데 이 정도로 힘들어했는지 기억이 안나더라고요. 그만큼 그 사람이 미화되고, 좋은 기억들만 남아있는 거 같아요.
사진 찍는 걸 뭘 그렇게 싫어했는지 우리는 같이 찍은 사진이 몇 장 없어요. 거울에 대고 찍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우리 모습들 뿐이에요. 그나마 있는 그 사람 사진은 몰래 찍어둔 뒷모습이에요.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않아서 더 많이 사진찍고싶었는데 차마 그 사람은 못 담고 같이 먹었던 음식들, 그 날 하늘, 그 날 갔던 곳만 담아뒀네요.
사진 남기는 건 싫어했는데 나한테 노래만 잔뜩 남겨놨어요. 같이 들었던 곡, 노래방에서 불러준 곡, 추천해준 곡, 컬러링... 사람은 가고 노래만 남았더라고요. 지겹게 들어서 다 외울만큼 외웠는데도 지울 수가 없어요.
하필 일주일에 4번도 넘게 타야하는 지하철은 그 사람 집, 그 사람 학교가 있는 역을 꼭 지나쳐요. 7개월 전만해도 그 사람 집에 가려고 내렸던 역인데 이제는 그냥 빨리 지하철 문이 닫히기만 기다려요.
꿈에는 어느 순간부터 죽어도 안나오더니 너무 지친 날에 다 터져서 막 울다잠든 날엔 그렇게 다정하게 나오더라고요. 내가 가장 힘들고 다 포기하고싶은 날엔 꿈에 나오는데 깨면 허무해요. 헤어지기 전에도 그렇게 다정한 건 마지막엔 없었는데 무슨 개꿈이나 꾸고있을까 싶더라고요.
그 사람은 참 잘 지내는 거 같아요. 주변엔 예쁜 여성분들도 많고 사람들이랑도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자기 꿈을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거 같아요. 이젠 저보다 어리고 너무 예쁜 여자분들이랑 같이 학교다니는 게 언뜻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작아져요. 저렇게 예쁜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데 내가 기억도 안나는 게 당연하지 싶어요. 나는 원래 있던 적도 없었다는 듯, 흔적조차 없을 거 같이 느껴져요. 행복한지까지는 안 보이지만 적어도 헤어지는 날처럼 위태롭게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차마 잡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만큼 너무 힘들어보였는데 그런 건 안 보여서 다행이다 싶어요.
이렇게 하나씩 곱씹어보면서 이제는 안 울어요. 이게 잊어가는 방향이라면 차라리 좋겠어요. 연락이 올 것 같은 느낌도 스스로한테 주는 희망고문 같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천천히, 이번엔 모래가 아니라 진짜 깊숙히 묻고싶어요. 돌아오지 않을거라면 그냥 내 마음 속에 아예 가라앉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 사람한테 내가 아주 더럽게만, 나쁘게만 기억되지 않아도 차라리 좋을 거 같아요.
제가 괜찮아지기는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