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같은과 선배 이야기예요.
그 선배는 저보다 3학번 선배였지만 군대를 다녀와서 학년은 같았기에 거의 모든 전공 수업을 함께 들었어요. 그 선배 학번에 활동적이고 리더쉽 있는 선배들이 많아서였나 유독 내성적이고 숫기도 없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걸을 때에도 땅만 보고 구석으로 쫓기듯 걸어다녔어요.
너무 내성적이어서 처음 봤을땐 혹시 경미한 자폐증상이 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폐증상 가지고 계신 분들 비하 아니예요.) 본인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행위를 워낙에 꺼려했기에 모두들 알아서 그 선배에게는 말도 잘 안 걸고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지만 새학기 때 뭣모르는 새내기들이 인사라도 하면, 긴장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벌벌 떨면서 자기소개를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공부는 정말 잘했어요. 이과계열 학과였는데 어떤 문제든 골똘히 생각해서 계산 몇 개 끄적대고 술술 풀어내더군요. 신기했어요.
그런 선배였는데 학교 졸업하고 2,3년 후였나 갑자기 결혼한다고 술한잔 하자고 학교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하더군요. 평소 술자리는 커녕, 밥도 항상 학생식당에서 혼자 먹던 선배였는데 말이죠. 제게도 연락을 주셔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게 놀라웠어요) 무슨 상황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나갔는데 정말로 결혼하실 분과 함께 자리를 하셨더라구요. 거짓말 좀 보태서 저는 그 날 그 선배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여성분은 선배보다 두어살 연상이고 부모님이 굉장히 부유하다고 들었어요. 선배와는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선배의 순수하고 지적인 모습이 멋져보였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공부에 소질이 없는게 한인데 공부 잘하는 선배에 대한 동경이 사랑이 되었다고. 선배는 당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고 학부부터 줄곧 SKY중 한 학교였습니다.
그 여성분은 성격도 굉장히 좋으셨고, 좋은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신 듯한 여유와 기품이 말과 행동에서 드러났습니다. 선배에 대한 마음도 진심인 듯 싶었구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속물같이도) 선배에게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더군요. 심지어 그 자리에서조차 선배는 분위기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보다못한 다른 선배가 사회자처럼 주도를 해서 자리를 이어갔습니다.
문제는 선배가 흥이나서 술을 진창 마셔대고 취해버렸을 때 터졌습니다. 여성분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얘는 자기 없으면 못산다~ 노처녀로 죽을거 자기가 구제해 주는 거다~ 자긴 원래 독신주의 였는데 불쌍해서 결혼해 주는거다~ 자긴 큰 가슴이 좋은데 절벽이라 조만간 수술시킬거다~ 얘네집 돈도 자기 수준엔 부족한 편이다~ 뭐 그런.
당황한 다른 선배가 황급히 화제를 돌려 여성분의 주의를 돌리려 하자, 얘는 멍청해서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중간에 대화를 끊기도 했구요. 실제로 때리진 않았지만 머리 위로 손바닥을 들어 때리는 시늉도 했어요. 여성분은 굉장히 화가 난 듯 보였고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계시더군요.
선배는 엉망진창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결국 여성분의 지인 (나중에 알았는데 여성분 개인 운전기사님이셨다고) 에게 업혀서 가게를 나갔습니다. 가게를 나가서도 길바닥에서 헤엄치면서 난동부리다 양말이 벗겨졌는데 그 여성분을 향해 자기 양말 신기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정말 어후...
그리고 며칠 후, 파혼했으니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건너건너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좋은 언니였거든요. 그 날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몇몇 선배들이 여성분께 직접 연락을 드려 식사자리를 갖고 안부를 나눴는데, 선배가 난동부린 그 날이 처음으로 선배의 친구들을 소개받는 자리였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취한 모습도 처음 봤다구요. 뭐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처음 본거라 서로 놀란거죠.
그게 설연휴 며칠전에 있었던 일이라 몇년이 지난 지금도 설이 되면 그 선배가 떠오릅니다. 지금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던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