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권희로
별칭 : 김희로
국적 : 한국
출생지 : 일본
1928년 아버지 권명술(權命述)과 어머니 박득숙(朴得淑) 사이에서 출생했다.
권희로의 아버지 권명술은 권희로가 세 살 때 목재 하역작업을 하다 숨졌다.
이후 어머니 박득숙은 넝마주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1933년(3년 후) 김종석과 재혼했고
김희로란 이름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불려진 것이다.
그는 의붓아버지의 구박으로 열세 살에 가출하여 배가고파 음식을 훔쳐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터 험난한 인생이 보여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도시락으로 보리밥을 싸간 그가 일본인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뒤 중퇴했으며(시미즈 소학교 5학년 때 퇴학), 열세 살 때 절도죄로 처음 경찰서 출입을 시작한다. 일본 사회의 천대 속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여덟 차례나 이름을 바꿨지만 매번 쫓겨났고. 결국 소년보호원과 형무소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또한 한때 야쿠자 세계와 관계를 갖기도 하고, 술집도 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회상
"나는 다섯 살 때까지만 행복했다. 나를 끔찍이도 사랑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의붓아버지는 어머니를 늘 때렸다. 의붓자식인 나를 구박한 것은 물론이다. 나는 의붓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실행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이후 오늘까지 나는 불행했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 "조선인은 빵 쳐먹고 배타고 느그 집으로 가라"
부산에 살고 있는 권희로의 고모. 일본에서 권희로 일가와 함께 거주할 당시 들었다는 노래를 아흔이 넘은 고모가 또박또박 들려주었다. "조선인은 빵 쳐먹고 배타고 느그 집으로 가라"
權禧老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결혼과 사업에 실패하고 마흔 살이던 68년 2월 20일 밤 8시 반. 일본 국철 도카이도선 시미즈역 부근의 아사히쵸. 클럽 밍크스에서 울린 총성으로 야쿠자 조직원 두 명이 사살됐다.
채권자의 청부를 받아 빚 독촉을 하던 야쿠자 2명이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한 말에 격분해 라이플총으로 이들을 사살한것이다.
그는 장총과 탄환 150발, 다이너마이트 40통을 갖고 도주, 후지미야 여관에서 여관주인과 투숙객 등 13 명을 붙잡아놓고 벌인 88시간 동안의 인질 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쿠자 2명을 살해한 후 인질극을 벌이면서 민족 차별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뉴스의 초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뉴스를 움직일 수 있었다 . 적어도 88시간 동안 그는 민족 차별이라 는 명분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뉴스를 생산할 수 있었고,
그 약효는 8년여의 재판 기간을 포함한 감옥생활 31년 7개월 동안 줄곧 이어졌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인질극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는 단순히「범죄자를 죽인 살인범」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인질극을 벌이기 前 사기, 절도 등으로 소년원을 포함 해 20여 년을, 인질극을 일으키던 나이 마흔살의 정확히 절반 가량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의 위치로 올려놓은 인질극에 대해 『인질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후지미야 여관의 그 일을 쉽게 「인질극」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 할 수 없다.
물론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를 한정된 시간이지만 본의 아니게 구속한 것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지만, 세상에서 흔히 인식하고 있는 그런 인질극은 분명 아니었다.
재판과정에서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權씨는 또 인질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으며 심지어 기자로 가장한 경찰들이 그를 체포할 당시 「도망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경찰과 대치하다 4일 만인 24일 검거되었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 등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權씨의 말대로 88시간 동안 잡혀 있던 인질 들은 權씨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인질들이 인질범 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심지어 재판 정에서 유리한 증언을 해주었다
▲석방이 알려지자 야쿠자의 살해 위협이 뒤딸았다.
8월 말, 후추 형무소의 권희로에게 날아든 한 장의 협박 엽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죽였다!"
1999년 9월 권희로 씨 귀향
▲권희로씨의 가석방운동은 80년대 후반부터 삼중 스님과 재일동포 실업가 조만길씨 등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아들이 받을 벌을 내가 대신 받게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던 노모 박득숙씨는 이미 지난 해 11월 가케가와의 시립 양로원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삼중 스님은 석방 직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권희로를 위해, 8월 22일 가케가와에 있는 박득숙씨의 유해를 동경으로 옮겨놓았다.
▲재일교포 무기수 권희로씨는 7일 석방돼 김해공항에 도착하면 자신의 이름을 `김희로'가 아닌 `권희로'로 선언할 것이라고 그의 석방운동을 추진해 온 박삼중스님을 통해 밝혔다. 즉 의붓아버지가 아닌 생부의 성을 따라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권희로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희(嬉)'자도 `禧'로 바뀌게 된다.
▲석방 =권씨는 이날 오전 4시40분께 지바(千葉)형무소를 출감, 일본 법무당국 의 호위를 받으며 체크무늬 베레모에 하늘색 양복차림으로 나리타(成田)공항에 도착 했다. 권씨는 공항에서 삼중스님으로부터 태극기로 감싼 어머니의 유해를 넘겨받아 가 슴에 안고 긴장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 권씨는 당초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가 생전에 준비해둔 한복으로 갈아입을 예정이었으나 일본에서 출국할 당시 입었던 양복차림 그대로 입국했으며 고령에다 오랜 수감생활 탓에 다소 수척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오후 1시 38분께 일본항공(JAL) 957 기편 김해공항에 도착, 고국 땅에 첫 발을 디뎠다.
생전에 그토록 아들과 함께 돌아오고 싶어했던 어머니 박득숙(98년 11월 작고)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경찰 특공대의 삼엄한 경호속에 의전실을 통해 입국한 공항에서 한국말로 "동포 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쳐 죄송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사람처럼 살아왔지만 오늘 부터는 한국사람으로 살겠다"고 귀국소감을 밝혔다.
권씨는 자비사 신도회장과 이건개(李健介) 김동주(金東周)의원 등으로부터 환영 꽃다발을 선물받은 뒤 박삼중스님과 함께 `만세'를 삼창하고 연제구 거제1동 자비사 로 향했다.
▲모친 유해봉안= 오후 2시 10분 자비사에 도착한 권씨는 어머니가 생전에 준비 해 두었던 모시옷과 쪽빛 마고자로 갈아 입은 뒤 전날 귀국해 기다리고 있던 친 여동생 풍자(豊子.67)씨 형제 6명과 상봉, 인사를 나누고 법당에서 어머니 유해를 봉안한 뒤 20분 가량 불교의식에 따라 추모제를 올렸다.
권씨는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 부산에 왔습니다. 살아계실 때 모시지 못해 죄송 합니다. 제곁에서 편히 쉬십시요"라며 어머니에 대한 인사말을 올릴 때는 그리움이 사무친 듯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울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기자회견= 봉안식을 마친 권씨는 숙소인 해운대구 우동 조선비치호텔에 투숙,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5시부터 2시간동안 기자회견을 갖고 고국의 동포들이 보 내준 성원에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야쿠자살해 사건후 재판과정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 등을 밝 혔다.
권씨는 귀국 이틀째인 8일 오전 9시 30분 금정구 오륜동 오륜직업전문학교(옛 부산소년원)에서 원생들을 상대로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강연을 한 뒤 경주 나자레원의 방문, 일본인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등 소외계층을 찾는 것을 시작 으로 고국에서의 새 삶을 출발한다.
권씨는 정몽준(鄭夢準) 의원(무소속)이 마련해 준 부산 모처의 아파트에서 거주 하며 불교에 귀의해 모친 추모사업과 불우이웃돕기, 수기집필 등으로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경호 = 경찰과 국가정보원 등 보안기관들은 권씨에 대한 테러에 대비,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경찰 특공대 24명이 근접경호하는 한편 5개 중대 병력을 권씨의 이동 경로에 배치하는 등 삼엄한 경비를 폈다.
99년 9월 초 권희로 씨의 석방 및 '영구 귀국'은 '영웅 만들기' 과정.
▲신문과 방송사에는 "권희로를 잡아라"란 특명이 떨어졌고, 석방과 귀국과정의 모든 디테일이 연일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며 한국 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 1968년,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일본인 폭력단원 2명을 살해하고 인질극을 벌인 대가로 무기징역형을 살게 된 그의 비극적인 인생과 저항은 〈김의 전쟁〉이란 영화를 통해 이미 오래 전에 공개된 셈이지만, '동포'로서 그와 재일 한인들이 겪어 온 차별의 역사가 전국의 안방에 하루 종일 방영되며 민족적 감정을 이처럼 건드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권'씨는 그가 선택한 성이었을까?
권희로 씨가 세 살 때 생부 권씨는 사망하고, 박득숙 씨는 3년 뒤 김모 씨와 재혼하였다.
그 뒤 권희로 씨는 '김희로'로 66년을 산 것이다. 66년 간 한 사람의 정체를 대신했던 이름 대신 권희로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조국'에 '귀향'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
권희로 씨는 어머니에 대해 여러 차례 자신의 삶에서 '절대적인 존재', '부처님이나 하느님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 '내 삶 그 자체' 등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기왕에 새 이름을 주고자 했다면 왜 '박희로'란 이름을 줄 생각은 못한 것일까?
사실 가부장적 혈통주의야말로 재일 동포에 대한 일본의 차별을 가장 저변에서 뒷받침하는 논리인 셈이다. 66년이 지난 뒤에도 결국은 권희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일 한인이 일본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생활의 모든 기반이 그곳에 있더라도, 일본서 태어나 일본문화를 자기문화로 살고 있더라도 '일본인 생부'가 없는 한 정주 '외국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귀국은 권희로 씨의 희망사항이었을까?
어디선가 본 기사로는 권희로 씨는 실제 처음에는 석방 후 조국 행에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한국은 그가 태어나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그야말로 '낯선 땅'이기 때문이다.
▲1999년 9월이 지나며 권희로에 대한 대중매체의 관심은 완전히 식었다.
‘김의 전쟁’영화 기사
권희로 씨가 귀국과 동시에 자신의 일생을 영화화해준 한진흥업 한갑진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후견인인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월 9일 저녁 그의 집에는 권희로 씨와 박삼중 스님을 비롯 영화 ‘김의 전쟁’에서 김희로로 열연했던 배우 유인촌, 감독 김영빈 씨 등이 자리를 함께해 방송과 언론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자리에서 한갑진 회장은 권희로 씨의 고국 정착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무료로 영화 ‘김의 전쟁’ 필름을 제공, 그가 살아갈 부산 지역에서 영화 상영을 통해 생기는 수익금 전액을 권희로 씨의 후원금으로 쓰도록 했다.
권희로 씨의 귀국과 함께 영화 ‘김의 전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일부에서는 그에게 극장 재상영을 권하는 일도 있었다. ‘김의 전쟁’이 당시 백상예술대상에서 4개 부문의 상을 받는 등 영화로는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인 인물에 관한 작품을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상영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이를 일축해버렸다.
그는 당시 이 영화 촬영을 위해 골절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불편한 몸으로 권희로 씨의 연고지인 시즈오카와 인질극이 벌어졌던 산골의 사건 현장을 부인 손병희 여사와 수차례 방문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일은 흥행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이나 그 때나 금기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민족차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김희로 사건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일본 당국의 촬영 규제와 한국정부의 비협조 속에서도 영화 ‘김의 전쟁’은 완성되었고, 92년 상영이 끝난 후 결국 그는 20억원 가량의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 영화를 한갑진 회장은 권씨를 돕기 위해 기꺼이 무료로 내놓은 것이다.
옥중결혼을 했던 아내가 후원금을 가지고 도망치고 말았다.
돈씨와는 1999년 2월 중순 재결합해 후원인들이 마련해준 동래구 거제동의 아파트에서 함께 생활해왔다.
권씨는 구속된 지 10년째 되던 해인 78년, 신문에 나와 있는 한 살인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일본인의 현지처였던 돈씨가 지난 74년 자신을 찾아온 일본인 본처를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으로 돈씨는 무기징역을 언도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하고 있었고, 또 권씨도 10여년을 구마모토 교도소에서 보내고 있었다.
권씨는 자신과 같이 일본인을 살해하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돈씨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이후 권씨는 돈씨와 편지 왕래를 시작하면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싹 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83년 ‘옥중결혼’이라는 결실을 맺었고 호적에도 정식 부부로 올렸다.
90년 석방된 돈씨는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옥바라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권씨가 모아둔 돈(일본 현지의 후원금과 출판물에 따른 배당금 등) 3억원을 갖고 도망쳐 옥중의 권씨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었다.
이 돈으로 돈씨는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음식점과 찜질방 등을 벌였으나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연락이 두절됐던 돈씨가 권씨를 찾아온 것은 그가 고국의 품에 돌아온 지 5개월이 지난, 올 해 2월께.
“모든 것을 용서해 달라”며 애원했고 마음 약한 권씨는 이를 받아 들여 돈씨와 함께 살게 됐다.
한편 권씨의 석방에 큰 역할을 했던 삼중 스님 등 주변에서는 돈씨와의 재회를 적극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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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25일 오후 1시께 권씨는 아내 돈씨가 자신의 후원회에서 마련해준 현금 등 5800만원을 가로채 달아난 사실을 확인하고 이날 오후 4시께 부산 동래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돈씨는 권씨가 잠든 틈을 이용, 안방 장롱 속에 숨겨둔 현금 1200만원과 부산은행, 제일은행의 예금통장에 입금된 4,750만원을 챙겨 잠적했다는 것.
경찰조사에서 권씨는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 아내가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며 “돈을 돌려받은 후 돈씨의 처벌을 원한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두 사람이 호적상 부부사이여서 절도죄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권씨가 이 일로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씨의 도장을 갖고 가 은행 예금을 인출한 만큼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는 인정된다"고 밝혔다.
2000년 0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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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생활 정착금을 훔쳐 달아났던 동거녀가 도주 1년5개월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 동래경찰서는 25일 권씨의 전 동거녀 돈모(53ㆍ여ㆍ서울 은평구 불광동)씨에 대해 절도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001년 09월 25일
허탈해진 그는 내연의 여성 박 씨(43세)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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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서 그는 1년 동안 박모(43세)씨와 내연의 관계를 가지다가, 이것을 알게된 남편 안 모씨(46세)를 박 여인과 공모하여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기로 하고 죽창을 들고 집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우다가 붙잡혔다.결국 살인미수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법원에서 성격장애 판정을 받아 공주치료감호소에 수감됐다. (경찰에게 연행되는 권희로.2000년 9월 3일기사내용인용)
권희로씨 '그 여인'과 결혼 잘산다
2000년 9월 사귀던 여성의 남편에게 흉기를 휘둘러 구속됐던 권씨는 지금 사건 당시의 여인 박선희씨(48)와 결혼, 즐거운 황혼을 보내고 있다.
현재 부산 범일동 자유시장에서 박씨와 함께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권씨는 "지난해 3월 출소하면서 조촐하게나마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며 "요즘은 저녁 먹은 후 아내와 조깅도 하고, 아내의 장성한 두 아들과 영화를 보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권씨는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영화 <실미도>를 보고는 교도소 시절이 생각나 한없이 울었다"고 전했다.
권씨가 29세 연하인 박씨와 처음 만난 것은 귀국 직후인 99년 9월. 권씨는 부산 자비사 신도의 소개로 만난 박씨가 어머니 영정에 쓸 꽃을 매주 보내오자 몇차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권씨는 아내가 전재산을 챙겨 도망갔을 때 위로전화를 걸어준 박씨와 한층 가까워졌다.
그러다 박씨의 전남편과 다툼이 벌어져 권씨가 폭행죄로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후 두 사람은 특별한 사이가 됐다. 박씨가 죄스러운 마음에 하루도 빠짐 없이 옥바라지를 했고 1,0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교제 6개월 만에 '옥중결혼'을 했다.
권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사건의 내막도 모른 채 폭행만 부각시킨 언론에 상처를 받았다"며 "벤츠 자동차와 아파트, 어머니기념관, 지원금 35억원을 제시하던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슬펐다"고 말했다.
한국말이 서툰 남편을 위해 통역을 자청하던 박씨는 "가까이에서 본 권선생님은 남자답고 똑똑한 분이며 세대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속이 트인 분"이라고 자랑했다.
권씨는 "보통 한국 여자들과 달리 바가지를 긁지 않아 맘에 든다"고 농담을 던졌다.
3월부터 일본어 무료 강의를 할 예정인 권씨는 앞으로 한·일 민간 외교관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진향희 기자 iou@hot.co.kr
스톡홀름 증후군 심리학 용어
1973년 스웨 덴의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인질강도 사건에서 유래됐다.
은행 강도들이 4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 이 사건은 6일 동안 계속됐다.
강도 사건 발생 초기에 인질들은 강도들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강도극이 진행될수록 인질들은 강도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점차 경찰보다는 은행 강도들 에게 충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질 극은 끝났다. 인질들은 경찰이 인질범들에 대한 증언을 요구했을 때 인질범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여자 인질은 강도들 중 한 명에게 애정을 느껴 그 사건 이후 약혼자와 파혼까지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