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흔히 말하는 범생이 스타일이에요.
부모님이 두분 다 고위공무원이신데다 많이 엄하셔서
저도 무조건 5급 행시, 못해도 7급은 해야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오랜 수험 생활 끝에 시험에 합격한 28살까지 공부만 하느라 꾸미는 거나 외모에 관심이 없었어요.
전남친은 카메라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였어요.
되게 차분하고 지적이고 말하는 거 한마디 한마디에서 인품이 느껴져서
그렇게 전남친을 짝사랑하게 되고 카메라를 빌미로 친해져서 제가 고백하게 됐어요.
전남친은 "날 좋아해줘서 되게 고맙다. 너도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이렇게 말끝을 흐리면서 거절했죠.
그때 이미 알았어야 했나봐요.
그냥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걸로는 부족하고, 여자로서 매력을 느끼려면 예쁜 외모도 필요하다는 걸요.
저는 전남친이 첫사랑이고 연애도 남자도 아예 모르니까
착하고 좋은 사람인 거 아는데 사귀지는 못하겠다는 건지 납득을 못했어요.
그래서 마냥 떼쓰듯이 사귀어달라고 계속 매달렸어요.
그렇게해서 결국 전남친이 저를 받아줘서 사귀게 되긴 했는데...
사귀면서 제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저에게 무례하고 못되게 굴거나 나쁜 짓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전남친은 인격적인 사람이고 성품이 착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항상 최대한 예쁜 말만 골라서 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최대한 다정다감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묘하게 억지로 하는듯한 애정표현이랑
왠지 모르게 사무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엔 사귄지 얼마 안돼서 어색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그냥 시간이 흐르고 저희 사이가 더 가까워지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가면 갈수록 더 전남친이 저에게 대하는 태도가 억지로 애써서 다정하게 대해주는 느낌이 강해졌어요.
결국... 잘 안 됐죠.
제가 헤어지자고 하니까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가
알겠어. 미안했어.
이 두 마디만 남기고 그렇게 헤어졌어요.
1년이라는 시간이 저 두 마디로 1초만에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랑 전남친 둘 다 카메라 동호회 활동은 계속 했어요.
저는 동호회 총무라 그만둘 수가 없고 전남친은 동호회에 친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만둘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보내던 시간이 지나고
두달 뒤 전남친은 새 여친이 생겼더라고요.
동호회에 새로 들어온 여자 회원인데 대학생이라 나이도 동호회에서 제일 어렸고
외모도... 정말 귀엽고 예뻤어요.
같은 여자가 봐도 아이돌처럼 정말 앙증맞고 귀여운 분이었어요.
남자 경험이 없다보니 쑥쓰럼 많이 타서 무뚝뚝하고 여성적인 성격이랑은 거리가 먼 저랑 다르게
애교도 많고 전남친한테 하는 애정 표현도 정말 자연스럽고
그냥 몸에 사랑스러움이 배여있는 분이었어요.
저는 그때도 여전히 전남친에게 마음이 남아있었지만
전남친은 정말 착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어서
그 사람이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했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로 동호회에서 둘이 얘기하는 것도 몰래 지켜보고
저는 하지도 않는 SNS 염탐도 하고 그랬는데...
보면 볼수록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ㅎㅎ...
여자분은 전남친에게 귀엽게 떼쓰고 앙탈부리면
전남친은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다 받아주고
그러면 또 여자분은 전남친한테 귀엽게 애교부리면
전남친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자분을 쳐다보고...
저랑 사귀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던 사람이었지만
저런 표정은 저랑 있을 땐 한번도 본 적 없었거든요...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면서 솔직히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여자분이 많이 어리고 되게 예쁘니까 자기가 갑인 것처럼 행동해서
지친 전남친이 헤어지는 그런...
현실은 여자분도 전남친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해주고 아껴주고 배려해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가 전남친이랑 하고 싶다고 꿈꿨던 그런 연애를
전남친이랑 그 여자분이 하고 있는 모습만 계속 보게 되네요 ㅎㅎㅎ...
전남친처럼 저렇게 좋은 남자는 저렇게 좋은 여자랑 사귀는 게 이치에 맞는 건데
제가 너무 제 주제보다 과분한 남자를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ㅎ
전남친이랑은 어색한 것도 많이 풀어졌고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데
그 사람은 모르겠죠?
제가 어떤 마음이고 어떤 심정인지...
저도 전남친의 여자친구분처럼 어리고 예뻤으면 전남친과 헤어지지 않았을까요.
낮엔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한 척 하며 사는데
새벽만 되면 많이 우울해지네요...ㅎㅎㅎ
긴 넋두리 읽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