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다는건...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오놀은 모처럼 한가한 일요일이다. 아침엔 밥을 먹고, 뭘할까 고민하고...남은시간엔 2학기 분량의 교과서를 외워버렸다. 외우는건 내 특기다. 할게 없거나 심심할때 입으로 중얼중얼 거리며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되는게 외우는거곤했으니까.
그러면 내 머리는 마치 깨~~끗하게 인쇄되는 새 종이처럼 맑게, 그리고 또박또박 그 글씨 하나 하나를 기억한다.
'딩동딩동'
'누구세요?' 무심결에 묻고 말았다.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걸 난 소리친 후에야 실감할 수 있었는데 지금 벨을 울리고있는 이 평화로움속의 불청객은 누구란 말인가?
어차피 대답은 한거고 문을 열수밖에 없는상황이었으니.. 문틈으로 빼꼼히 눈을 내밀던 나는 놀라움을 감출수 없었다.
'우리야'
미래, 가영이 하영이,해미까지... 정말 얘네들은 왜 맨날 단체로 다니냐? 혹시 나 빼놓고 계모임이라도? 그리고 그들뒤로 보이는건 권. 우. 혁. 거기다가 그 녀석이 들고있는건 맥주? 오징어까지...~ oh~No~
여자혼자사는 집에 남자애까지 동원한 술손님을 들이다니....옛날 같았으면 문전박대의 일인자겠건만 시대가 바뀐만큼 나는 안에서 밖까지 올라오는 김을 무릎쓰고 애써 웃으며 그애들을 들여놓았다.그런데 이것들이 방안에 들어오더니 펼쳐져있는 교과서를 보고 하는 가영의 말이 나를 열 바다의 극치로 몰아붙인다.
'헉 미란이 너 무슨짓이야? 신성한 방학에 공부라뉫~' 무슨짓이긴 무슨 짓이겠니? 난 다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도 해야할 학생의 본분을 지키려는것 뿐이란다.
'보면 몰라?공부중~ 어? 공부중~왜 갑자기 몰려와서 이 난리야?'
가영이가 말한다.'어헛 난리라뉫~ 우린 자기 걱정되서 와줬거만.'
미래, 하영이가 일제히 맞장구친다.'맞아..' , '그래..
해미가 거든다. '그..그렇고 말고...그리고 미란이도 좀 쉬어야지..그치? 미란아?' 유해미...너 죽고잡냐~?끄흥~
이어지는 권우혁의 결정타로 인해 우리는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야 니들은 계속 싸우고 이거 어디다 놔?'
에혀~ 어쩔수 없이야 어쩔수없이..
그러더니 이제는 우리집을 둘러보며 한마디씩 한다.
'야 근데 집이 좀 위험하게 생겼다.' 해미는 자나깨나 걱정이다.
'이런집에서 혼자지내다니 너무 위험한거 아니니?' 하영이는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즘세상이 얼마나 무서분데...장난 아냐..' 가영이는 세상을. 아니 나를 모른다.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이 있다 그리고...그들을 응징하는 나같은 애도 있다.
'이야~ 장미란 너 무서운게 아무리 없다그래도 혼자자려면 무섭겠다야..' 미래가 우혁이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한다는건 뭐냐고?
이걸 끝내는 권우혁의 열통터짐의 극치의 한마디가 내 머리를 화살처럼 쏘고 지나갔다.
'뭐...그럼 우리집에 같이 있음 되겠네. 아님 내가 여기로 오던가..'
그러더니 이녀석 어느새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어깨를 안으며 말한다.
'내가 올까? 니가 갈래?'
난 우혁에게 귓속말했다.'오가긴 개뿔~ 그만해 어차피 술마시러 여기 온거면 좀 조용히하고 먹다 가라..사람 성질 드럽게하지 말고.' 어깨를 빠져나오면서 하영을 보니. 우혁을 넋나간 표정으로 보다가 거의 기절직전이다. 이런게 멋있냐?
'어헐~ 장미란 눈초리 무서분데..야야 걱정마.. 오늘은 언니들이 같이 자줄게.' 가영이의 말투가 수상했다.
내가 물었다.'그게 무슨소리야?'
'아 우리 전부 여기서 자는거 허락 받고 왔거든.'해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말했다.
권우혁은 식탁위에 맥주를 놓고 컵을 꺼내놓는다. 그리고는 접시를 꺼내 오징어까지 뜯어놓는다.여기가 자기집이야? 저런~ 얌체대왕~왕짜증이다..
난 설마 하는 의미로 아이들한테 손짓하며 물었다 '쟤도?'
'우혁인 그냥 따라왔어.' 미래가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난 하영이가 가자 그랬다고 절~대 말 못한다~' 가영이는 하영이한테 메롱 하며 혀를 놀렸지만 하영은 들은척, 본척도 안하며 우혁이에게 넋이 나가있다...으으..정하영~ 못말려 증말~
식탁에 한 상을 늘어놓고는 소리치는 저 눈치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모르는 놈~ '야! 이리와~먹자~'
'야 권우혁! 여기가 느네집이냐? 꼭 새색시 챙기는 팔불출같다~'가영이가 맥주를 따르면서 말한다..누가 새 색시란 말인가?
'난 맥주 안먹어~'라고 말은 했지만 어느새 맥주를 세잔째 마시고 있었다..이것들 다 주거떠~
햔 5분정도 지나고 눈을 떠보니 2~3잔에 애들은 모두 뻗어있었고, 그녀석은 해가 진 하늘을 보며....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녀석 하늘을 보는 표정이.....좀 그렇다..저번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 생각하나? 싶어 물어보았다.
'야 무슨 생각하냐?'
그녀석은 내가 자는줄알았는지 놀라서 되묻는다.'어? 뭐냐? 너 언제 일어났냐?'
난 술이 깬 표정으로 말했다.'잔적도 없다.'
녀석은 생각의 잠긴 표정으로 일관한다.'그러냐?'
난 그녀석옆으로 가서 앉아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야 친구한테 말 못할게 어딨어?'
'음....우리 어머니..'
'어?'난 햇갈리기 시작했다.이녀석 자기 엄말 술먹으면서 생각할만큼 좋아하나? 혹시 말로만 듣던 마마보이? oh~No~
그런데 그녀석이 술을 마시며 얘기했다.'지금계신 어머닌 새어머니고, 친엄만 돌아가셨어..'
'음...' 내가 말이 없자 녀석은 계속 중얼거린다.
'우리 엄만 내가 강하고 똑똑한 남자가 되길 바랬어. 어쩌면 그래서 돌아가셨는지 모르지..'
'돌아가셨어?'
'음...내가 13살때...자살하셨거든..'
'자 자살?' 뜻밖이었다. 그 정도 부잣집의 후계자를 낳았는데 뭐가 부족해서 자살을 택한거지?
'훗 사람들이 우리 엄마가 자살하셨다 그럼 너처럼 놀라더라구...그리고 돌아오는 멘트도 똑같애.. 그래? 안됐구나...그리곤 눈을 아래로 향하고...한숨을 한번 쉬어..너도 그럴래?'
난 이 아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건....그만큼 힘들다.
'글쎄...좀 더 들어보고...음...왜 자살하셨다고 생각해?'
그녀석은 맥주를 한모금 들이키고는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닐 사랑하셨어..하지만 어머닌 아버질 사랑하지 않으셨어..'
난 놀랐다.. 대부분의 재벌집 남자들이 바람나는 드라마처럼 연상되던 내 상상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었다. 우혁은 쓸쓸하게 하늘을 보며 ....계속했다.
'다른사람을 사랑하셨어...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가 아닌 그 사람만 바라보셨지. 아버진 장례식에서 술을 하시고는 어머니가 죽은건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랬어..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로 난 종종 내가 이 세상에 있는게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성격은 점점 반항적으로 비뚤어져가고..그러다가 미란이 널 만난거야. 아무도 못 들어오던 내 비수꽂힌 성격에서 비롯된 행동을 비뚤다며 타박하는 널 보면서...늘 빛바랜 옛연인 사진만 놓고 보시던 어머니에게서조차 느끼지 못한 걸 느낄 수 있었어.'
우혁은 내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넌 나한테 이미 어떤 어머니보다 더 중요한 존재야.'
난 녀석을 처음 봤을때가 생각났다. 그 알수 없던 안타까운 눈빛...
'근데 그런 내가 널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후계자 자리를 내놓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 때문이야..평생을 다른남자의 여자였던 어머니 그늘에서 사시다가 모든걸 알아버리신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의 아들인 날 후계자자리에 올려놓으셨어. 그리고.그 댓가로 얼마전에는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주선으로 회사경영에 도움이 되는 새어머닐 맞이하셨거든..난 어쩌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아들인 나에게 해주신 마지막 배려를 지켜드리고 싶었는지도 몰라.'
하늘을 보니...짙은 어둠이 있었다. 그런하늘을 보다가 문득 한쪽 어깨가 따뜻하게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 옆을보니...그녀석이 내 어깨에 기대 잠들어있었다. 난 그런 그아일 보며 혼잣말했다.
'인심썼다.넌 불청객 명단에서 빼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