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란 것 같다.
15평 남짓의 작은 집에서 할아버지, 부모님, 언니,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게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처가살이 한다며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 내면서도 자식들 만큼 잘 키워내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바등바등 우리를 길러 내셨다.
둘째였던 나는 새 것을 산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흐릿했다. 물려 입는 것이 당연했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억은 딱 한 번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 가족은 화목하다고 느꼈다.
초등학교 시절 사춘기를 겪으며 내성적이면서도 예민한 성격이 되어버렸고
중학교 시절 할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며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알게되었으며
소중한 것을 더 이상 잃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하겠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무렵 나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고소득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처지에 있는 나라도 세상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이라고.
그래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계속 원했던 만화가라는 직업은 포기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예술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부모님을 도울 수 있는 멋진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겠지.
(이렇게 웹툰 시장이 확장될 줄 누가 알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죽어라 공부만 했던 고등학교 시절, 단체로 영화관에서 체험 학습을 했던 것
외에는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 자체가 드문드문하다.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 학생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과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아
쉬는 시간에도 수학의 정석을 끼고 있었던게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그렇게 수능을 보았지만 외국어 영역에서 실수도 했고,
무엇보다 원서 지원에 대한 상담을 받지 않은 채 전략 없이 높은 경쟁률의 학과에 지원을 해서
3지망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재수 학원에서 주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재수를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부모님에게 짐이 될 테니까.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4년의 기간 동안 미국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도 다녀왔고 경영학을 복수전공으로 이수했다.
딱 한번 과 1등을 한적도 있었다.
그렇게 칼졸업 한 후에 로스쿨에 입학했고 이마저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일정 성적을
유지하려고 했다. 학생회 일원이 되면 주어지는 장학금을 받으려 학생회 총무로 일했고
2학년 때 까지는 두 학생의 과외 선생님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책값에 강의 값에 사실 모자란 돈이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한번에 좋은 성적으로 변호사시험을 합격했고
지금은 남들보다 조금 높은 연봉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다.
시댁의 도움과 내 명의의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배우자와 작은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지금 현재에 이르렀다.
나는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비슷하게 살 것이다.
내 친구들은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남들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고소득자이기 때문에 청약 신청을 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국가에서 좋은 조건으로 지원해 주는 임대주택이나 전세주택을 신청할 자격도 되지 않는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높은 급여를 열심히 모아서 시장에 나와 있는 주택을 사야 한다.
나는 그럼 내가 태어나고 평생을 살아 온 서울이라는 곳에서 멀쩡한 아파트 한 채를
가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세금도 꽤나 많이 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부유하고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