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바라는 것
ㅇㅇ
|2021.02.23 00:00
조회 398 |추천 2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럼 나도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고 하니까. 좋은 사람은 뭘까 생각했다. 많은 가치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나한테 좋은 사람이란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함께 하는 사람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인 걸로 결론냈다.
글쎄 중학생 때 친구앞에서 말했던, 자기 코도 닦고 내 코까지 닦아줄 여유있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까.
좋은 사람이고 싶어 내 시간에 충실했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 안일한 생활을 바꿔주고 싶었다.
조언같은 건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니까 다르다고 답했다. 나는 적어도 그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난 그 대답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지만 아무 생각 없는 그 행동이 나한텐 무책임으로 다가왔으니까. 그건 나한텐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아이를 가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안일한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그날, 위험하단 걸 알고도 그가 안일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실낱같이 믿었다.
난 삼십대의 연애 중이었기 때문에 각오는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충의 육아비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임신 소식을 알렸다. 바로 오겠다 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안도했다 나는. 두려운 와중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에게 오는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올까. 지금은 이렇지만 어떻게 하면 된다 괜찮다, 안심시켜줄 거라고 믿었다. 나한테 좋은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아니었다. 자신이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책임은 져야 하는데, 라며 말끝을 흐리곤 나한테 답을 구하는 얼굴로 앉아있다. 이건 아무 생각 없이 온 거다. 아니 비겁한 회피였다. 나는 다시 한 번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안되겠구나. 정말 아무 생각이 없이 계획도 없이 왔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랑 살면 나는 평생 모든 걸 떠안고 판단하고 결정해야만 하겠구나. 난 어른이 아닌 사람을 믿었구나. 내 믿음은 고작 몇 개월짜리 불장난밖에 안된 거였구나. 내가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이걸 감내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지우자고 했다. 되려 나한테 따지듯 물었다. 이유는?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삼켰다. 내가 느낀 걸 그대로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듯 보였다. 이 상황에 웃기지도 않은 자존심이라니. 내 뱃속에 생긴 자신의 아이를 위한 선택이,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의 미래가 아닌, 자기 기분이 우선인 사람과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병원을 알아보고 수술 날짜를 잡는 동안 그사람은 계속해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허우적댔다. 실망은 역시나로 바뀌어 갔다.
난 혼자가 되었다. 온몸으로 내 안에 아이를 느끼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철저히 혼자였다. 시시각각변하는 감정선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내 몸에 대해 그는 전혀 관심이 없다. 병원에 가는 날이 아니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 같다.
의미없는 대화는 허공에 맴돌고 내 마음은 닫혀만 간다. 그때마다 가슴에 새겨진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내 힘듦을 공유하고 싶고 내 불안함을 다독여주길 바랐다.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무관심에 기인한 무책임한 대답들이었다. 알량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나는 이제 수술을 기다린다. 작은 세포 하나가 온 몸을 지배하더니 이내 이제 심장을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수술을 기다린다. 허접한 삶을 살게 될까 무서워서 나는 혼자 이러려고 열심히 산 게 아니니까. 내 몸이 아깝고 열심히 살아온 나한테 미안하고 내 몸에서 매일 자라난 아이한테 미안하고 이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할 내가 불쌍하고 이런 남자인 걸 알아보고도 진작에 그만두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날 사후 피임약을 먹었어야 했다. 너무 신경을 안써서 나는 생각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처음부터였다. 기억에도 없는 순간 멋대로 내 옷을 벗기는 사람을 용서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 신고를 했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 내가 사람을 잘못 택한 것이다.
그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 자신의 아이가 죽기위해 기다리고 있단 걸 알고 있을까? 아니 느끼고 있을까? 알량하게 세우는 자존심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같잖은 가식으로는 부족하다.
당신도 처절하게 이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평생 기억했으면 좋겠다. 최선도 다하지 않은 채 수술비 몇푼 쥐어준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큰 오산이니까.
나는 사람을 잘못 선택한 죄로 감내하겠지만 당신의 무능력과 비겁함은 당신 탓이니 그마저 나를 탓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온몸으로 느낀 이 모든 걸 느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게 그나마 책임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거니까.
머리로 합리화하지 않고 진짜 자신의 선택이 무엇인지 마주하길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