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저 수혜 예요! (수혜 story)
저...
수혜 예요...
지수혜...
이제부터 제 얘기 좀 들어 보실 래요...
...
...
민혁 이와 전 남들이 흔히 얘기하는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민혁일 처음 본 게 그러니까...
아! 그때 에요.
한참 녹음이 푸르르게 짙어가던 5월의 어느날...
저는 그때 한참 학교비리 문제로 단식 투쟁 중이었거든요...
투쟁의 주 내용은 총장사퇴와 비리 연루 교수의 일괄 사퇴였죠.
7-80 년대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투쟁하던 시대는 아니고 또 그다지 호응도 많진 않았지만 그 어떤 불의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젊은 그 때의 나 였죠?
저요? 전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었고 그 또래의 제 친구들 대부분은 한창 행정고시다 외무고시다 준비에 바쁠 때였죠.
지금 그때 일을 돌이켜 생각 컨데 철이 없었는지도 몰라요.
그땐 다른 생각 없이 내가 하는 일 이 너무 옳은 일이고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이더니...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건 데 맘에 걸리는 일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민혁 이에 관한 것이고...
또 한가지는 엄마에 관한 것인데...
어느 날은 제가 등록금 투쟁을 한다고 2학기 등록금을 내지 않고 있었죠.
이제 마감 일이 지난지도 한참이고 우린 등록금을 내려 주는 그 날 까지 절대로 우리의 뜻을 굽히지 않으려고 결심했는데...
그렇게 등투를 하며 학우들에게 등록금 무단연기를 독려했지만 사실 낼 사람들은 다 냈죠.
......
......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날 아마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나봐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우리엄마가 얼굴이 초긴장이 돼서는 학교로 절 찾아 오셨을 때...
어려운 살림에 등록금을 어렵사리 마련해 학교 잘 다니는 줄 알았더니 학교에서 등록금을 내지 않아 불가피하게 제적해야겠다고 했으니...
하던 일이고 뭐고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져서는 학교에 찾아 온 어머니는 도서관 앞에 앉아 투쟁중인 나를 보고는 그 많은 학우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일이...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엔 더더욱 뼈에 사무치게 그리운 것을...
어머닌 그리고 1년 후,
아버지 없이 나 하나만을 뒷바라지하시다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고 그렇게 돌아가셨죠.
참 민혁이 얘기하다 말았죠?
그렇게 총장 사퇴를 위한 단식 투쟁 중이었는데...
투쟁시작하고 2일째 되는 날이었거든요
난 목소리 높여 학우들과 같이 총장사퇴를 열심히 외치고 있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부슬부슬 오고있었고 오전 내내 앉아 있었던 나는 많이 지치고 또 비에 젖어 있었죠.
그래 피곤이 밀려왔는지 잠깐 그 앉은 자세로 잠이 든 것 같아요.
살폿 들긴 했는데 순간 난 누군가가 내 앞에 계속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곤 눈을 떴는데 한참을 올려다봤죠.
그였어요.
그는 예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죠.
언제부터 서있었던 걸까? ...
전 그 때 처음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접고 그냥 예쁜 여대생처럼 미팅이나 하면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그는 내 앞에다가 영양제 한 알과 영양음료 한 병을 놓으며 쭈그리고 앉는 거예요.
그리고 날 쳐다보면서
" 단식 투쟁해도 약은 먹을 수 있는 거죠? "
하면서 해 맑게 웃어요.
그래 나도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그냥 편안한 웃음이 나더라 구요.
그렇게 그랑 처음 만났어요.
그 후 우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캠퍼스 커플이었죠.
그는 참 편안하기도 하지만 우선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부정적이거나 토를 달거나 참견하거나 하지 않고 그냥 지켜봐 줬죠.
어떤 면에선 그와 나는 정말 다른 면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에게 끌렸는 지도...
그리곤 그 다른 면이 또 그를 버리게 했는지도...
일단 살아온 배경...
성격...
가치관...
우선 살아온 배경을 얘기하자면 그것이 우리가 결혼하려 했을 때의 너무나 큰 걸림돌이었죠.
그의 어머니는 내가 민혁 이와 사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늘 얘기했었죠.
그래서 그를 포기했는지도 몰라요.
제 성격상 굳이 그렇게 까지 치졸하게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
글쎄요?
전 그런 건 별로 믿지 않았죠.
저에겐 소녀 같은 감수성 같은 건 없었거든요.
지극히 현실적이었죠.
성격...
그는 굉장히 온순하며 조용한 성격이었어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미덕을 지녔죠.
전 그의 그런 모습에 은근히 질투가 났어요.
부유한 집에서 별탈 없이 편히 자란 왕자님과 같은 분위기...
늘 여유 있는 웃음...
우리 같은 치열한 삶을 산 사람들에겐 부러움이면서 괜히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같은 것이 느껴지게 하잖아요.
그래서 그를 좋아하면서도 일면 그를 싫어했었는지도.
그리고 전 진취적이고 투쟁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인데 반해 그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그가 내가 아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서 호감이 갔었죠.
그러나 만남이 지속될수록 점점 답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대학을 졸업하고 근 1년은 이렇다 하게 하는 일없이 보내다가 어렵사리 작은 출판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그는 아직도 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그는 나에게 정말 헌신적이었고 날 정말 사랑했다는 걸 알아요.
그러나 전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동료들을 만나다 보니까 그가 마냥 어리게 만 느껴지더라 구요.
그래서 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2년 후 직장동료와 결혼했어요.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받아 드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에게 미안한 것은 그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다는 것...
그러나 전 현실적인 판단을 한 거죠.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가 분명히 반대 할거라는 그 이유하나만으로도 그와 결혼할 이유가 없었어요.
저의 선택이 어떻든 지금도 후회는 없지만 남들이 보기엔 잘못된 선택이었죠.
제 남편...
우리 결혼에 있어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나였고,
그가 저와 대화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을 결심했죠.
그러나 우리의 결혼 생활은 대화만으로 지속될 수는 없었죠.
삶이 팍팍하다 보니 연애 시절엔 그렇게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던 생산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결혼 하면서는 대화시간이 짧아지고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오히려 더 큰 단절을 경험하게 되더라 구요.
그리고 우리는 이 삶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무작정 이민을 떠났고 거기서 더 쓰라린 경험을 하고 재작년에 돌아왔죠.
그 해에 우연히 민혁일 본적이 있어요.
그의 눈은 여전히 사랑이 담겨 있더군요.
제 얼굴에서 삶의 무게를 느꼈는지...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더라 구요...
전 그저 편하게 그를 보고는 헤어졌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래 고아나 다름없는 저 인지라 이럴 때 민혁이 생각이 나더라 구요.
그래서 그때 그가 적어줬던 핸드폰 번호로 전화했죠.
여기는 병원 영안실인데...
저, 지금 너무 슬프거든요.
아! 그가 저기 와요.
난 그를 보자 눈물이 너무 나서 하염없이 울면서 그를 바라봤어요.
그가 너무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안아주네요.
그리곤 날 앉히곤 나보다 더 슬픈 얼굴을 하고있어요.
그가 죽어서 슬퍼하는 걸까요?
제가 마음 아파 할까봐 슬퍼하는 걸까요?
" 민혁아, 미안해... 근데 나 어떡해야 할지 몰라서... 무서워서..."
" 수혜야, 걱정하지마... 내가 지켜줄게 "
그렇게 그는 계속 내 옆에서 든든하게 날 지켜 줘요.
그랑 사귈 때 느껴보지 못했던 든든함이...
오늘도 그를 보내지 못했어요...
장례식을 다 치르고 집에 왔는데...
집에 혼자 남게 되는 게 너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 민혁아, 차 한잔할래? "
" 응 "
차 마시는 중...
" 민혁아... "
" 왜? "
" 너 아직 두 나 좋아하니? "
" ... "
" 너, 결혼은 안 했어? "
" 결혼... 했어... "
" 그래, 그럼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니? "
" 괜찮아... "
" 아니야, 들어 가봐.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네 생각을 미쳐 못했다."
" 아니야. 오늘은 네 옆에 있어주고 싶어. "
" 고마워, 사실 나 무서워. 혼자 못 있을 것 같아. "
......
......
" 네 와이프 얘기 좀 해줘."
" 나중에... 근데 나 궁금한 거 있는 데... 너 그때 정말 날 사랑하지 않았니? "
" 글쎄, 잘 모르겠어. 그때 난사랑 따위엔 흥미가 없었거든... 누구를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었어."
" 그럼 그 후에는 내 생각이 안 나던..."
" 왜, 나지. 힘들고 외로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너 였는데..."
" 그래... "
" 너, 와이프한테 연락은 했어? "
" 아니... "
연락? 연락...을 못했구나... "
" 야, 전화해. 많이 걱정하겠다. "
그래, 누나가 많이 걱정하겠다...
미안해 ...
누나 ...
22.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죠.
오늘이 4일짼가?...
이젠 화가 나기보다 걱정이 앞선다.
전화를 해볼까?
전화를 해보려는 생각은 지금까지 100번은 한 것 같은 데 선뜻 전화기로는 손이 가지 않는다.
일종의 자존심 같은 건가? ...
나도 잘 모르겠다.
따르릉...
......
따르릉...
......
따르릉...
......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여기 병원인데요? 사모님 저 선생님 오늘도 병원에 안 나오셨는데요? "
" 아, 네... 전화 안 했나요? "
" 아뇨? 전화연락도 없이 안 나오셔서 수술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신데... "
" 아, 그래요. 급하게 일이 생겨서 나가셨거든요. 오늘도 못 나가실 지도 모르겠네요...
핸드폰으로 연락 한 번 해 보실 래요? "
" 핸드폰을 안 받으세요. "
" 그래요... 아무튼 연락 주실 거예요. "
" 네..."
병원도 나가지 못할 정도의 일이라...
연락도 없이...
기분이 무지 꿀꿀하네요.
그리곤 전화길 들어 그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다.
따르릉...
......
따르릉...
......
따르릉...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핸드폰 배터리가 없나...
와~ 궁금해서 안되겠다.
따르릉...
.....
따르릉...
.....
" 여보세요? "
" 개판씨! 저 경자 예요? "
" 와, 경자씨, 웬일이 예요? "
" 저 민혁 이가 병원에도 출근을 안 해서요? "
" 아, 그래요..."
" 저기 개판씨... 핸드폰도 안되고 개판씨 한 텐 연락 안 했어요?"
" 제가 그저께 전화 해보긴 했어요. "
" 그래요? 그럼 어떤 일인지 개판 씨가 잘 알겠네요? "
" 그게 전화 상으론 좀 그런데... "
" 그럼 제가 개판 씨네 까페로 나갈게요."
" 그럼 그렇게 하실 래요. 밖에 추우니까 옷 단단히 입고요. 길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세요.
"
개판씬 날 어린애로 아나?
엄마가 유치원가는 아이 단속시키듯 얘기한다.
개판 씨네 까페는 민혁이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개판씨 말대로 어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얼어서 길이 미끄럽다.
그나마 큰 도로로 나가니 염화칼슘을 뿌려서 그런지 이미 녹았는데,
우리 집 앞 언덕 내리막길은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난 연거푸 두 번을 넘어질 뻔한 걸 간신히 버둥대며 벽을 잡고 용케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습은 넘어지는 것보다도 더 우스꽝스러웠다.
그렇게 개판씨 가게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져 가는 오후였다.
바람도 많이 불고 정말 추운 날 인데...
그렇게 얼굴이 벌개 가지고는 난 까페로 들어갔다.
시내 요지에 있어서 그런지 테이블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들어가자 개판 씨는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 경자씨! 이쪽에 와서 앉으세요. 많이 춥죠? "
" 아. 네! "
난 상기된 볼을 만지면서 앉았다.
그리곤 뜨거운 물이 한잔 나왔고 정말 따뜻해서 손에 꽉 쥐고 있었다.
" 경자씨 뭐 좀 마실래요? "
" 네, 따뜻한 우유한잔 주세요."
" 네, 민경씨 여기 우유한잔 만 "
잠시 후 민경 이라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우유를 들고 왔다.
전에 왔을 땐 없었던 학생 같다.
그리곤 내가 한 동안 말없이 우유 잔만 만지고 있자 그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 민혁이 지금 수혜랑 같이 있어요. "
" 수혜... 누구예요? "
" 아마 민혁이의 첫사랑일 거예요. "
" 첫사랑...? "
" 네. 민혁 이와 수혜는 대학교 3학년때 학교에서 만난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
" 민혁 이가 참 많이 좋아했었죠. 처음엔 수혜도 많이 좋아했었는데.... 남들이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다정한 커플이었는데...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부터 수혜가 민혁일 점점 멀리 하더니 결국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요.
" 수혜랑 민혁인 서로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요. 그게 서로를 끌어당긴 매력이었는지도 모르죠. "
" 경자 씨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민혁인 정말 순정파예요. "
" 수혜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기 전까지도 수혜의 사랑을 너무나 믿고 있었고 그녀만을 사랑
했기에 그로 인한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 그 후에도 민혁인 종종 수혜 얘기를 했죠.세상에 어떤 여자도 수혜를 대신 할 수 없을 거라고..."
" 의외네요. 민혁이 한테 그런 면이 있었다니..."
" 사실 계속 지켜본 제가 봐도 민혁인 그 때랑 많이 달라졌죠. 수혜일 이후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니까 아무나 가볍게 만나는 거겠죠. 아마도 마음을 잡지 못해서 그랬을 거예요. "
" 그래서 경자 씨랑 결혼했을 수도 있죠. "
" 저랑요. 왜요? "
" 글쎄요. 민혁이 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수혜이후로 경자 씨가 그래도 민혁이 에게 큰 의지가 됐던 것 같은데..."
" 전 그래서 사실 경자 씨와 민혁 이가 잘돼서 민혁 이가 좀 안정을 찾았으면 했어요."
" 근데 수혜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됐네요."
" 수혜 씨가 결혼했다면서 왜? 혹시 이혼이라도 했나요?"
" 아니요, 남편이 그때 전화했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대요. 그래서 막상 급하게 연락 할 때가 없으니까 민혁 이한테 한 것 같아요. 수혜 씨는 고아나 다름없거든요."
" 그랬군요."
" 경자씨, 힘내세요. 그냥 일이 급하다 보니까 그런 거지 수혜 씨도 다른 맘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다른 마음이라...
어떤 ...
" 경자씨, 기분이 어때요? "
" 글쎄요. 그냥 뭐... 대충 느끼고 있었던 그대로예요."
" 개판씨 그럼 저 그만 가볼게요. 고마워요. 그래도 얘기 들으니까 막연한 불안 같은 것은 사라지네요. "
막연한 불안....
오히려 그게 더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 경자씨, 저녁시간 됐는데 여기서 저녁 먹 구 가요? "
" 아니 예요. 다음 에요. "
" 그러지 말 구요.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 드실 거 잖아요. "
그래 어차피 혼자구나...
" 네..."
" 경자씨 저희 집 주방장이 스파게티 잘하는데 그거 드실래요? "
" 네..."
스파게티 하니까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네...
그렇게 저녁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말 바람이 매섭게 분다...
아, 춥다...
어쩌면 그를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담담해 졌다...
그래 슬슬 그를 보낼 준비를 해야지...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언덕을 오르면서 생각했다.
이 언덕은 더울 때도 곤욕이고 추울 때도 곤욕 스러워..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가 싫어 손을 주머니에 꼭 넣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길 여러 곳이 무슨 국제 수준의 아이스 하키 장처럼 빙판이 져서는 자꾸 걸음이 더뎌졌다.
정말 추워 죽겠구만...
무사히 집 근처에 거의 다 와서 너무나 안심을 한 나머지 우리 집 앞에 져있는 그 넓은 빙판에서 그만 발이 쭉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아이구야! 넘어가네!!!
넘어지면서도 오만가지 상상이 다 된다.
이 어둠 속에 보는 사람 없으니 챙피하진 않겠으나 일 단 넘어지면 전치 한 5 주는 나올 듯 싶다.
게다가 주머니에 손까지 넣고 있으니 지금 넘어가는 분위기가 거의 뒤로 발라당 이다.
뇌진탕의 우려까지...
오! 하느님 제발 도와 주세요.
전 아픈 건 정말 싫어요.
그리곤 다 포기 ...
와~ 하느님이 내 말을 들었나보다.
누군가가 넘어가는 날 잡아주는데...
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넘어가고 그 누군가는 내 넘어가는 상체를 받아 안는데...
누구지?
어쨌든 고맙습니다.
그리곤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올려다보니,
어! 민혁 이네...
" 누나, 좀 조심해서 다녀. 다치면 어쩌려구 그래..."
난 갑자기 멋쩍은 웃음이 나서 웃었다.
" 민혁이 구나, 오랜만이다. "
히죽~ 이 웃는 나...
남들이 보면 속 두 좋다구 하겠다.
" 고마워... 넌 진짜 내 생명의 은인이다! "
" 은인까지는 무슨? 춥다. 들어가자, 누나 "
" 그래, 야, 진짜 춥지 않냐? 으~ 추워. "
그가 먼저 들어가며 현관문을 연다.
" 야, 너 전화도 한 통 없 구 그러기야. 난 네가 유괴라도 됐나 싶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 유괴는 무슨 내가 어린애야 "
그가 웃는다.
어때요. 제가 더 고단 수죠.
전 자존심 하나는 지키고 싶어요.
최후의 순간 그를 보내야 한다해도 치졸하게 매달리거나 울고불고 하진 않을 거예요.
" 민혁아, 밥은 먹었니? "
" 응..."
" 그래, 어딜 가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어."
" 어..."
" 누나? "
" 응? "
" 미안해 "
" 뭘? 괜찮아 "
" 근데 연락은 좀 해라. 걱정돼 잖아. "
" 걱정했어? "
" 그럼 당연하지 집에서 키우던 똥개도 집 나가면 걱정이 돼는 데 ... "
" 뭐, 똥개? "
" 아니, 얘가 말을 끝까지 안 듣고 잘라 먹냐? 자, 끝까지 들어봐 "
" 하^ 물 ^ 며^ 사람이야 더하지. 이게 끝이야 "
그가 웃는다.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민혁아, 근데 너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
" ... "
" 너, 혹시 어디 잡혀가서 마늘 까다 온 거 아냐? "
" 아니면 새우 잡이 배에 잡혀갔다가 죽기 살기로 도망쳐왔거나? "
" ... "
" 아니 얘가 입에 풀칠을 했나? 얘기하기 싫음 관둬라 뭐. "
그리곤 일부러 삐진 척 하면서 2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곤 오늘 역시 추위에 떨고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 하고 걱정을 해서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얼굴에 열이 달끈 오르는 게 감기기운이 도는 것 같은데...
따뜻한 물로 씻고 푹 쉬어야지...
1층으로 내려가 대충 씻고 올라오는 데 민혁 이가 부른다.
" 누나, 맥주 한 잔 할래? "
맥주! 또 왜 맥주타령이야?
" 아니, 다음에.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으슬으슬 한게 감기가 오려나봐. 너 전에 먹던 약있지 그것 좀 찾아 줘. "
" 응 "
그가 방에 들어가 약을 찾아 가지고 나온다.
난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따뜻하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고 있었는 데...
그가 그 목걸이 선물을 준다.
" 누나, 이거 내가 그때 못 줬어, 미안해 "
난 그것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받고 싶지 않았다.
" 민혁아, 미안해, 그건 다음에 받을 게. 이미 네가 준 이걸로도 충분해. "
그러면서 난 그가 사준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리곤 물을 식히고 약을 먹고 올라가려는 데...
그가 내 팔을 잡는다.
" 누나, 얘기 좀 해 "
" 야, 누나 지금 진짜 몸이 안 좋다니까, 내일 몸 좋아지거든 들으면 안될까? "
그가 다소 침울한 분위기다.
" 야, 왜 그래, 미안하게... 진짜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오늘 푹 안 쉬면 누나 내일 아프단 말야. 알았지? "
그리곤 올라와서 잠이 들었다.
진짜 몸이 으슬으슬해서 몸을 떨면서...
아침에 눈을 떴는 데도 어제의 몸살 끼가 그대로다.
목소리도 잠기고 기침까지 해 대는 것이 심상치 않다.
목소리가 완전히 맛이 가서 누구에게 ' 나 아파요' 라고 자랑 안 해도 다들 무지 아프겠다고 하게 생겼다.
어쩐다...
이대로 출근할 것을 생각하니 몸이 정말 따르질 않네.
순간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싸, 그냥 푹 자면 그만이네...
그리곤 정말 꼼짝 않고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열기가 조금 있어서 인지 잠이 깊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전에 걸렸던 독감처럼 그렇게 심하게 아픈 것 같진 않고 그냥 만사가 귀찮고 누워있고 만 싶은 것이다.
그렇게 낮인 것 같은 데 커튼이 쳐져있어서 모르겠다.
병원도 못 가겠고 약도 이젠 없고 그냥 이렇게 쉬면서 낫기를 바래야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누나. 뭐해? "
" 어, 들어와 "
우아, 내가 들어도 목소리가 엽기스럽다.
" 누나, 많이 아픈가보네. "
" 응, 그래도 견딜만해 .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엽기스럽냐? "
" 네가 들어도 이상하지? "
" 응, 많이 잠겼네... "
" 누나, 내가 약 사올게. 어디가 어떻게 아파? "
" 아니야, 추운 데 관둬. 일요일이라 약국 문 연대도 없을 거야. 견딜만해 "
" 아니야, 이럴 때 약이라도 먹어야 초기에 잡지. "
" 그래? 그럼 목하고 기침이 좀 나고 열이 좀 있어 "
" 알았어, 금방 갔다올게 "
그리곤 그가 약을 사 가지고 왔다.
약과 함께 따뜻한 병으로 된 약을 복용하고 누우려고 하는 데 민혁이 핸드폰이 울린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받더니...
들려오는 목소리가 여자인 것 같다.
그리곤 들고 나가서는 한참...
수혠가 보네...
그가 다시 들어온다.
" 누나, 괜찮겠어? 이제 누워서 푹 자. "
" 알았어, 난 괜찮아. 견딜만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나가서 네 볼일 봐. 알았지? "
난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고는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그가 내 옆에 앉는 폼이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려나보다.
나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서 그러는 건가...
오히려 부담스럽네...
" 민혁아, 네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부담스러워서 잠이 안 오잖아. "
" 무슨 부담 ? "
그가 좀 머쓱했는지 웃으며 얘기한다.
" 어쨌든... 빨리 나가, 너 땜에 더 잠이 안 온다니까... "
" 왜? "
" 왜는 너 같은 멋진 남자가 내려다보는 데 심장이 떨려서 잠이 오겠냐?"
그가 기분 좋게 웃는다.
" 야, 너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보네. 이젠 잠이 잘 오겠다. 얼른 나가. "
" 알았어. "
그리곤 그가 나갔다.
그리곤 두 시간쯤 잤나?
내 핸드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 경자씨? "
" 네, 개판씨. 웬일이세요? "
" 경자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우아! 아주 우아하시네요. "
" 놀리지 말아요. 감기가 걸려서 그래요. "
" 많이 아파요. 안 그래도 민혁 이가 전화했더라 구요."
" 뭐라 구요? "
" 경자씨 많이 아픈 것 같다 구 잠깐 좀 와 달라 구."
" 민혁인 요? "
" 글쎄 급한 볼일이 있는 것 같던데... "
" 아, 네..."
" 경자씨 지금 괜찮아요. 제가 지금 갈까요?"
" 아니요. 정말로 괜찮아요. 목소리 이상한 것만 빼면..."
" 기분은 어떠세요? "
" 기분이요. 기분도 뭐 좋아요. 오늘은 혼자서도 가뿐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 그래요. 그럼... 많이 아프거나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주세요. 상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 네~에 "
그리곤 끊었다.
민혁이 얘 뭐야?
자기가 못 있을 거면 그냥 가면 돼지 왜 개판씰 오라 가라야.
흥 오히려 기분 나쁘네...
그나저나 그 여잔 뭐 그리 급한 일 이 있다 구 시두 때두 없이 불러내고 그래.
완전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