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면.
헛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면.
정말 나쁜 것들을 증오할 수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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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에렌!"
다급한 목소리가 이불을 뚫고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아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르고도 이른 새벽녘이었는데도, 이미 기상 시간은 지나고 있었다.
"일어나! 안 그러면, 어... 우리 다 큰일날 거야! 교관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거라고...!"
눈을 감았다 떴다. 초점이 흐릿해지더니, 이내는 아르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아르민이구나... 으, 그렇지. 벌써 아침이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카사는 어느새 훈련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팔에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그 망할 완장! 에르디아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채운 수갑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숨에 머리가 핑 돌아갔다.
"서둘러, 에렌...!"
"알겠어. 내가... 내가 꼭, 거인을 계승해서 벽을 처부수고는 그 망할 악마들을 구축해버릴 거니까 농땡이 부릴 시간이야 없지! 아르민, 빨리 훈련복을 차려입자!"
아르민의 말에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빠르게 환복하기 시작했다. 그래, 열심히 해야 전사가 될 수 있지. 그래서... 으, 팔이 안 빠져! ...시조를 탈환할 거야! 그렇게 중얼대는 저에게 여느때처럼 미카사가 조용히 다가왔다.
"에렌, 체조까지 마치고 갈 수 있겠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그나저나 우리끼리 있을 땐 그 완장 좀 벗어."
굳이 완장을 차려끼운 미카사에 왜인지 눈살이 찌푸려졌고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미르의 백성들이 저지른 짓에 우리까지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린 적어도 그 완장을 태워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망할 유미르의 백성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마레의 에르디아인들은 거인의 힘으로 이 세상을 지배할 생각은 커녕 오히려 옛 죄를 속죄하고 싶다는 주장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 전사 후보생에겐 거창한 계획이려나. 어쨌든간에, 미리 앞서 나가서 우리는 그 완장을 찰 필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시 찰 시간이 없어서-"
쾅.
"에렌 예거! 미카사 아커만! 아르민 알레르토! 더러운 에르디아인 주제에 행동도 느리고, 뭐 하는 거냐! 에르디아인의 사정을 우리 우월한 마레인이 이해해 줄 필요도 없으니까, 당장 준비를 마치지 못해?"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으... 알겠습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우월한 불청객의 존재에 기분이 팍 상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당장 뛰쳐나가 이미 뛰고 있는 대열에 슬그머니 합류했다. 온갖 모욕적인 말들 - 이를테면 더럽고 역겹고 추악한 에르디아인 같은 - 을 들어가며 죽을만큼 힘든 훈련을 마무리하고 저희를 기다린 것은 물만큼이나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 조각들 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건 정말이지... 진절머리나."
숟가락을 든 채 조용히 중얼댔다. 전사 후보생, 그리고 전사라는 이름의 영예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어리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미르의 백성들을 내 손으로 처죽이기 위해서, 이 훈련들은 필요했다. 꼭 전사가 되어서 시조를 탈환하고 벽 안의 벌레만도 못한 유미르의 백성들을 짓밟을거야. 그런 상상으로 하루를 버텼다.
어차피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희망적인 꿈은 이것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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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가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환상적인 꿈을 꿀 수 있었다면.
정말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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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애니!"
여느 때처럼 가장 먼저 일어나 놀자고 오는 것은 해맑고 소심한 나였다. 쨍한 햇살이 창살을 뚫고 전해지는 이상적인 아침 시간대, 라이너와 애니는 몸을 일으켜 눈을 부비작대며 큰 뜰로 뛰쳐나왔다.
"으응, 왔구나. 애니도... 그러고 보니, 애니는, 어... 어젯밤에 좋은, 꿈 꿔, 꿨어?"
오늘따라 푹 잔 듯 포근한 인상의 애니가 걸어나오자 절로 얼굴을 붉히며 타고 있던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라이너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애니를 툭툭 쳤다. 괜찮았던 애니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잠시 망설이고는 입을 열었다.
"...어, 거인이 모두 없어진 꿈을 꿨거든. 현실은 어차피 벽에 보호되고 있는 거지만..."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이을 말이 없기도 했거니와 애니가 의외로 자유를 갈망한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호탕한 라이너의 웃음이었다. 작게 짹짹대는 새소리가 그 소리에 묻혀 희미해져 갔다.
"하하하! 웃긴 꿈이네. 그래도 언젠가는 현실이 될 거니까... 그러고 보니 벽 너머에는 진짜로 애니, 네가 책에서 봤다던 것들이 있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레 대답하는 애니에게 뻘줌한 헛웃음을 지어 보이는 라이너였다. 다시 어색함이 짙어지는 분위기에 얼른 주변의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서는,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서... 알아맞히기 놀이 하자!"
곁눈질로 라이너와 애니의 반응을 슬그머니 살폈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라이너가 곧 대답하려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그, 그래! 좋아! 애니, 어떤 것 같냐?"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애니가 나뭇가지를 주워드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곧 주워든 나뭇가지로 슥슥 모랫바닥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일단 단순한, 사과. 둥근 하트 모양의 열매 위에 잎사귀와 가지를 그려넣었다.
"와, 완성... 뭐 같아?"
"...모르겠어. 이게 뭐냐? 베르톨트, 이거... 잎사귀 맞는 거야?"
조금 고민하다 모르겠다고 내뱉는 라이너에 조금 충격을 먹었다. 그렇게 못 그렸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괜히 속상한 마음에 열심히 좀 더 세밀한 보충을 하려는데 애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 맞지?"
"...! 어, 어. 맞아!"
애니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띄워졌다. 마치 내가 이겼어, 하는 듯한. 이후로도 몇 번을 그리고 지우고 알아맞히다 질릴 때 쯤에 강가 계단에 앉아 커다란 벽을 바라보았다.
"...베르톨트, 라이너."
"으응?"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애니에게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반응했다. 웅크린 포즈로 웅얼웅얼대는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야, 말에 집중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차렸다.
"진짜로 저 벽 너머에 모든 게 있을까? 자유가?"
"...아마도?"
"그렇다면, 나는 꼭 벽 밖에 나가보고 싶어."
"그래도 조사병단은 너무 위험하니까 안 돼..."
"...누가 조사병단에 간대? 이 바보가."
"아, 알겠어...! 미안해, 애니."
"..."
"뭐, 우리 셋이 언젠가는 꼭 나가 보자."
"...좋아, 라이너. 약속이다?"
"당연하지."
"그 때 나도 갈래."
"애, 애니 없인 나도 안 가니까... 걱정 마!"
"걱정 안 해."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망상밖에 없었으니까.
지각 미안해...!! 되게 오글거리지만... 읽어줘서 고마워 마레와 파라디 반전 if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