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배와의 연애
그 선배와는 과CC였다. 과 행사 때문에 둘이서만 연락 할 일이 많았고 그대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
연애를 한번도 못해본 내가 봐도 그 선배는 날 좋아하고 있었고 나도 선배를 좋아했다.
그때 한창 썸타고 2주안에 안 사귀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말이 돌았었다.
근데 그 선배는 언제 고백할지도 모르겠고 이러다 2주는 넘어갈것 같고 그래서 내가 고백했다.
드디어 나도 연애를 해보는구나 싶었다.
우리 둘은 잘 맞는 것 같았다.
대화를 하면 내가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싶었고
화젯거리라고는 없던 내 삶에 반해 일생이 태풍이었던 그 선배의 인생 얘기가 날 더 선배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어느날 친구가 그랬다.
-너가 아직 연애 초반이라 그래. 100일 넘어가는 순간 싸움 시작이야.
그때는 싸우면 싸워봤자지 얼마나 싸우겠냐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확히 100일이 넘어서자마자 싸우기 시작했다.
사귄지 1년 좀 안 되었나. 영화를 보러 간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선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는 근처 맛집으로 향했다.
저녁 웨이팅을 하면서 선배가 영화 얘기를 시작했다.
-OOO(공포영화제목) 나온다더라. 나 그 웹툰 진짜 재밌게 봤는데 우리 나중에 그거 보러 가자.
선배는 며칠 뒤에 개봉하는 공포영화를 보러가자고 했다.
나는 티비에서 공짜로 틀어주는 공포영화도 안 보고 공포 웹툰도 안 보고
깜짝 놀래키고 벌벌 떨리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다.
괜히 또 싸울까봐 나는 살살 웃으면서 가볍게 넘겼다.
-나는 무서운 거 싫어. 평소에도 무서운 거 안 본단 말야.
-아냐. 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같이 보러가자. 이거 웹툰도 봐바. 진짜 재밌다니까?
선배가 옆에 있는 거랑 내가 무서운 거 안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본인이 듬직하게 옆에 있어줄테니 마음껏 무서워 하라는 건지,
아님 본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섭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선배가 옆에 있던 말던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하지만 내가 또 안 본다고 그러면 무조건 싸우겠지.
남들 다 있는 곳에서 분위기 흐려가며 싸울 수는 없어서 이따 집에 가서 보겠다고 억지로 말했다.
-아 그리고 다음에 마블 영화 나온대. 우리 그것도 보러가자.
마블은 선배가 좋아하는 영화다. 또 선배가 좋아하는 영화다.
나는 이전부터 계속 히어로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나는 별론데...
-아냐. 너가 마블을 처음부터 안 봐서 그런거라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집에 가서 처음부터 하나씩 다 보자.
나는 처음부터 마블 영화를 보지 않아서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다.
디씨 영화도 안 좋아한다.
나는 로맨스나 힐링, 가족 영화를 좋아한다.
더 말해봐야 싸우기만 할테지.
배는 고픈데 줄은 줄어들 생각을 안 하고 날도 더웠는데 기다릴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길바닥에 30분 넘게 서있었다.
밥먹으러 들어갈 때까지 나는 선배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싸우기 싫었다.
하지만 뭐가 문제였을까.
식당에 들어가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선배는 말 없이 밥만 우걱우걱 먹었다.
평소였으면
-내 것도 먹어봐. 맛있지? 나도 너 거 먹어볼래.
이러면서 내 밥이 제 밥인 마냥 먹었어야 하는데 선배는 눈도 안 마주쳤다.
나도 이미 웨이팅 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상황을 잔뜩 마주했던 터라 기분이 나빴고 더이상 선배 기분에 맞춰줄 기력이 없었다.
매번 선배가 화내고 짜증내면 내가 잘못했건 잘못하지 않았건 내가 먼저 사과했었다.
내 상황을 아는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싸울 때는 절대 너가 먼저 화 풀어주지 마. 항상 이상한 걸로 화내면서 왜 맨날 네가 먼저 사과하냐. 그리고 네가 먼저 사과하니까 선배도 너가 사과할 때까지 미안하다고 안 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그런가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배가 우걱우걱 밥만 쳐먹어서 10분도 안 돼서 밥그릇을 싹 비우는 동안 나는 한숟갈도 뜨지 않았다.
선배도 나도 아무것도 씹지 않고 10분을 더 기다렸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말 할 생각을 안 하길래 종업원에게 남은 밥 포장을 부탁드렸다.
계산하고 식당을 나오자마자 선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버려두고 저 멀리 걸어갔다.
이미 멀어진 선배를 나는 뛰어가서 잡았고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났냐 물었다.
-나는 밥먹을때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 밥 먹을 때는 행복해야 하는데 네가 웃지를 않아서 기분이 나빴어.
-지금 내가 밥 먹을때 안 웃었다고 화가 났다는거야?
-응. 나는 웃으면서 맛있게 밥을 먹고 싶었는데 네가 안 웃어서 화가 났어.
내가 안 싸우려고 억지로 대답하고 억지로 맞장구 쳤던 행동들이 표정에는 다 드러나 있었겠지.
그러면 내가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선배도 알고 있었다는 건데 선배는 내 기분을 풀어줄 생각을 하기는커녕
내가 밥 앞에서 생글생글 웃지 않아 자기 기분을 망쳤다고 되려 화를 내고 있었다.
선배의 생각치도 못한 대답을 듣고 나는 벙쪄서 잡았던 선배 손목을 놓아주었다.
내가 손목을 놓자마자 식당에서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가버렸다.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은 참 무기력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 자신이 비참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도 밥먹을때는 선배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웃어야 하는 사람인 건가.
나는 내 감정을 억누르고 선배만을 생각하면 내 생각은 누가 해주는 걸까.
이번에도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하는 걸까. 언제까지 나는 먼저 사과를 해야하는 걸까.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게 맞나.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할까. 누가 맞는걸까.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절대 먼저 미안하다고 말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선배가 버스정류장에 앉아있었다.
하필 집에 돌아가는 버스가 같은 버스였고 그 버스 배차간격은 40분이었다.
나는 멀리서 선배를 보고 오늘도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첫 연애를 잘 이끌어나가고 싶었고 나만 숙이고 들어가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것 보다 내가 선배를 더 많이 좋아하니까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나는 선배 옆에 앉아 살며시 손을 잡았다.
-미안해.
선배는 아무 말 없었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선배 옆모습을 보며 가만히 선배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댔다.
화가나도 나를 뿌리치지는 않으니까 괜찮았다.
싸움이 나면 사과는 내가 하면 되는 거였고 나만 참으면 이 연애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연애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