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한국에 온 첫 미국 선교사
제너럴셔먼호 사건 조사차 쉐난도어호 서해안 방문…
마티어 목사 통역으로 동승, 성경 반포
옥성득 (UCLA 교수)
그동안 내한 첫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서 몇 번 글을 썼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32년 첫 방문: 독일계 유태인 루터교회 목사 귀츨라프
1866년 첫 내륙(평양) 방문에 '순교': 영국인 토마스 목사
1867년 첫 방문 미국 선교사: [오늘의 주인공 1]
1868년 첫 방문 미국 선교사: [오늘의 주인공 2]
1883년 개항장들과 서울 첫 방문: 중국내지선교회 영국인 다우스웨이트 의사
1884년 개항장들과 서울 방문 첫 감리회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매클레이 목사
1884년 첫 내한 주재 선교사: 미국 북장로회 알렌 의사
1885년 첫 내한 주재 목회 선교사: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
1885년 첫 내한 주재 감리회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스크랜턴 의사·목사
오늘 주제는 한국을 방문한 첫 두 미국 선교사로, 그 주인공은 중국 산둥반도 지푸의 북장로회 선교사 코르베트(Hunter Corbett 郭顯徳, 1835~1920)와 캘빈 마티어(Calvin Wilson Mateer 狄考文, 1836~1908) 목사다. 마티어는 1868년 한국 황해도와 평안도 해안을 방문, 성경을 반포해 한국을 방문한 첫 미국인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방문은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과 신미양요(1871년)와 한미 조약(1882년),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1884~1885년)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중간고리 역할을 했다. 곧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미국 교회의 한국 선교 배경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전말
150년 전 병인년(1866년), 큰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큰 돛대 여러 개를 단 검은 이양선들이 서해안에 자주 출몰했다. 작은 크기의 중국인 해적선들도 노략질을 일삼았다. 정월부터 몰아닥친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되었다. 8월(양력)에 독일 유태인 오페르트(Ernest J. Oppert)가 탄 미국 상선 '스프라이즈'호가 평안북도 철산 부근 해안에서 조난당했으나 식량, 의복, 약품, 담배까지도 보급받았다. 대원군의 명령으로 의주와 고려문까지 호송받았고, 심양을 거쳐 영구영사관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W. E.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2), 391.]
그러나 8월 말 중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자, 평양군민은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켰다. 토마스(Robert J. Thomas, 1839~1866) 목사 등도 타살(打殺)했다. 10월 말에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 제독이 강화도와 양화진에 침입하였다.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강화성을 점령하고 서적을 약탈했으나 조선군이 격퇴했다. 병인양요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좀 더 살펴보자. 8월 말 대포로 중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여름철 물이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총을 쏘며 한국 상선의 양식을 약탈하고 주민 7명을 살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 지휘 아래 포수와 사수가 총과 활을 쏘며 맞섰다. 마침내 9월 3일 평양 쑥섬 부근에서 여러 작은 배에 가득 실은 짚에 불을 붙여 화공으로 선박을 불태웠다. 서해안부터 대동강을 따라 한문 성경을 반포하며 전도했던 토마스 목사와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Preston)은 뱃전에서 뛰어내려 강변으로 나와 목숨을 구했으나 잡혀서 결박당한 채 성난 주민들에게 타살되었다. (올해 9월은 토마스 목사 '순교' 150주년이 된다.)
같은 해 스프라이즈호는 조난당해 물과 식량을 제공받았으나, 제너럴셔먼호는 여러 차례 경고를 무시하고 평양까지 올라와 총과 포를 쏘고 해적선처럼 호전적으로 나와 관민이 함께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처음에는 병인박해 때문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로 알았으나, 나중에는 중국인 선원 때문에 중국인 해적선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한편 로즈 제독은 조선 해안을 탐색한 후 일단 10월 초 산둥의 지푸(芝罘, 현재 옌타이)로 돌아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침몰하고 선원 전원이 사망한 사실을 외교관들에게 알렸다. 제너럴셔먼호에 화물을 실었던 메도우회사(Meadow &Co.)도 피해 사실을 미국영사관에 보고했다. 이에 지푸의 미국 영사 샌드포드(E. Sandford)는 북경에 있는 미국 공사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에게 사건을 보고했고, 벌링게임은 국무장관 수어드(William H. Seward)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곧 대원군이 천주교인들과 프랑스 신부들을 살해한 병인박해를 구실 삼아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로즈 제독의 함대가 한강을 따라 10월 26일 서울 양화진까지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40일간의 침략 기간에 강화도 서고가 약탈당했고, 조선 병사 다수가 사망했으나, 프랑스군을 물리친 대원군은 해안 봉쇄를 강화했다. 높은 돛대를 가진 검은 이양선(異樣船, 군함이나 무역선)이 난파할 경우에는 물과 양식을 주고 선대했으나 주민과의 접촉, 내륙 접근은 엄금했다.
미국 군함 와슈세트호 파견, 코르베트 목사 내한
1866년 말부터 중국에서는 제너럴셔먼호 생존자가 평양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867년 1월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와 선원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위해 군함 와슈세트호(USS Wachusett)를 파견했다. 슈펠트(Robert W. Shufeldt) 함장은 조선 정부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파괴한 관리들의 처벌을 요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군함에는 130여 명의 해군 해병대가 타고 있었다.
슈펠트가 산둥 치푸항을 출발할 때 통역자로 북장로회의 코르베트(Hunter Corbett) 목사가 동행했다. 제너럴셔먼호 뱃길을 안내했던 중국인 길잡이(수로 안내인) 유화태(兪和泰)도 동승했다. 코르베트 목사는 1년 전에 마티어 목사와 함께 중국 산둥에 파송되어 중국어와 한문을 배우고 있었다. 이후 선임 선교사 네비어스(John L. Nevius) 목사와 더불어 산둥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코르베트는 선교 지부의 결정에 따라 통역자로 동승했다. 와슈세트호는 23일 백령도에 도착했는데 대동강 입구로 착각했다. 황해도감사와 연락을 시도하면서, 6일 동안 주민과 접촉했으나 셔먼호 선원의 몰살 이야기만 들었다.
9월 29일 해주감사는 답신에서 제너럴셔먼호의 침략을 비판하고 와슈세트호가 즉시 한국 해안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슈펠트는 서신으로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한 이유에 대한 설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만일 처벌하지 않으면 미군이 상륙해서 직접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대동강 입구 쪽으로 나아갔다. 조선 정부는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슈펠트와 코르베트는 해변에서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이 중국인 해적으로 인식되어 한국인 주민들의 공격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슈펠트는 이 설명에 만족하고 철수했다.
이처럼 와슈세트호의 임무가 군사적인 것이라 통역 코르베트는 한국인과 거의 접촉할 수 없었다. 육지에 내려서 전도하거나 성경을 전달한 기록이 없다. 그를 첫 한국 방문 미국 선교사로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베이징 미국공사관의 윌리엄스(S. W. Williams) 서기는 조선 사절단을 만나 제너럴셔먼호 침몰과 주민에 의한 선원 몰살에 대해 들었다. 또한 1867년 제너럴셔먼호의 길잡이를 했던 유화태도 만났다. 그는 대동강에 선박의 동체가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작도에서 온 한 조선인은 선원들을 살해한 자들이 그곳 주민과 농부였지 수령이나 군인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쉐난도어호의 서해안 탐색과 마티어 방한
미국은 이어서 1868년 4월 군함 쉐난도어호(USS Shenandoah)를 파송했다. 군함은 4월 8일 산둥의 치푸를 출발하여 4월 중순 백령도 부근에 도착했다. 선장은 페비거(Captain John C. Febiger) 함장이었고, 통역에는 마티어가 선교 지부에 의해 선임되어 승선했다. 지푸의 미국 영사 샌드포드와 중국인 수로 안내인도 동승했다. 총 승선 인원은 230명이었다.
군함은 4월 10일 백령도 연안에 도착했다. 16일 목요일(음력 3월 24일) 황해도 장련(長連) 오리포(五里浦) 앞에 정박했다. 샌드포드와 마티어는 마을에 내려가 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동네 훈장인 임병정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으며 그에게 성경을 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두고 떠났다. 임병정은 이들과 만난 것을 상부에 보고했고, 박규수가 그 내용을 서울에 보고했다.
오리포의 훈학인(訓學人) 임병정(林秉正)이 묻기를,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이 나라에 왔는가?" 하니, 그들이 글을 써 보이기를, "나는 미국 사람 적고문(狄考文)인데 재작년에 미국 배가 여기에서 없어졌으므로 우리들이 탐문하러 왔다." 하였습니다. 임병정이, "탐문한다는 말을 모르겠다"고 하니, 미국 사람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그 배의 종적을 찾아보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미국 사람이 또 서대장(徐大將)의 이름을 물었는데 임병정이 의심스러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람이 또 묻기를,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가? 평양 강인가?" 하였으나 또 의심스러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람이 또 묻기를, "이 강의 이름은 무엇이며, 포구의 이름은 무엇인가?" 하니, 임병정이 대답하기를, "강은 바로 오리포이고, 포구는 대진포구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미국 사람이 또 묻기를, "여기서 성이 얼마나 멀며, 무슨 성이 있는가? 마을에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동네에 가봅시다" 하니, 임병정이 대답하기를, "다른 나라이고 법이 다른 만큼 나가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미국 사람이 또 묻기를, "이곳에 와서 선생이 이야기해 주기 바란다. 당신들의 글방이 어디 있는가? 나를 데리고 가서 한 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나는 원래 도리상 풍속도 묻고 법으로 금지된 것을 물어봐야 하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리 인색하게 굴면서 말하지 않는가? 공자의 글에 격물(格物) 편이 있다. 미국 사람은 사물의 이치를 잘 연구하니, 한 번 자세히 강론할 수 있다" 하였으나, 임병정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등주(登州)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성명을 이광내(李光鼐)라고 하면서, "미국 사람이 중국에서 예수교를 전도하고 있는데 나도 믿고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달걀이 있습니까? 우리가 사려고 합니다. 내일 우리가 다시 오겠으니 당신은 미리 닭과 달걀을 준비해 두기 바랍니다. 내가 은을 주고 당신에게서 사겠습니다" 하고, 책 두 권을 소매에서 꺼내어 모래밭에서 주었습니다. 받지 않고 도로 던져 주자 그 사람도 즉시 도로 던져놓고 종선을 타고 도로 큰 배로 들어갔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제목을 <마가전복음서(馬可傳福音書)>라고 하고 다른 한 권은 <신약전서(新約全書)>입니다. 책 속에는 글을 쓴 푸른 종이쪽지가 있어서 부득이 봉해서 수영에 올려 보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미국인 적고문(狄考文)이 바로 캘빈 마티어(Calvin W. Mateer) 선교사다. 그는 한문 필담을 통해 제너럴셔먼호와 토마스 목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함께 온 중국인 예수교인 이광내는 한문 <마가복음서>와 <신약전서>를 한국인에게 주려고 노력했다. 이광내(李光鼐)는 중국인 개신교인으로는 처음 1868년 황해도에 와서 성경을 반포한 인물로 기억되어야 한다.
4월 20일 군함은 평안도 해안으로 올라갔다. 샌드포드와 마티어는 해변에 상륙하여 한국인들과 만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누구도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이때 1867년 와슈세트호 방문 때 슈펠트가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이 전달되었다. 마티어는 왕에게 보낼 서찰을 며칠 동안 작성했다.
한국 방문 때 마티어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의 4월 30일 자 일기에는 군함이 대동강 입구에 정박하고, 돛섬 주변의 섬들 가운데 한 곳을 방문했다고 기록한다. 샌드포드와 마티어는 섬에 내려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올랐다. 그들은 그곳에서 십자가 한 개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와 연관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여러 정보를 통해 제너럴셔먼호 탑승자 중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대동강 하구 일부를 조사한 후 5월 초 지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