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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강점기 일본에게 나라를 팔먹은 매국노 5인방 을사오적

ooooooooo |2021.08.21 17:40
조회 349 |추천 3

 윗줄 좌측 권중현, 박제순, 아랫줄 좌측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조선 말기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즉,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을 일컫는다. 

을사조약은 외교권 포기, 통감부설치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대외적 주권을 행사할 수 없고
대내적으로 감독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되어
주권국가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훼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는 의미를 갖는 조약이었다. 

1. 권중현(1854년 11월 27일(음력 10월 8일) ~ 1934년 3월 19일)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개화파 정치인이었으나 초기에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초명은 재형, 호는 경농, 충청북도 영동 출생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충청북도 영동 출신으로 양반가의 자손이었으나 그는 서얼이었다.
초명은 권재형으로 을사조약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자
가계을 숨기기 위하여 권중현으로 개명했다.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서 개화파에 가담하면서
친일 개화 관료의 길을 걸었다.
1883년 동래감리서 서기관 발령에 이어
일본 주재 서기관 등을 거쳐
1891년에는 인천항 방판통상사무를 지냈고,
같은 해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참가했다.
한성부윤, 의정부 참찬, 표훈원 부총재 등을 거쳐
1899년에 법부대신에 올랐다.
1904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다.

1901년에 군부대신 임시 서리를 맡으면서
국방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일했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에는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도 겸했다.

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 조약에 찬성,
을사오적으로서 오명을 남겼다.
을사오적에 포함된 뒤 1907년 나철의 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 암살 기도에 노출된 바 있다.
이후로도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 진압 명령을 내리며
의병 운동을 탄압하였다.
1908년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 5만원을 수령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정5위에 서위되었으며,
1915년에는 다이쇼대례기념장이 서훈되고
1918년에 종4위로 승서되었다.

2. 박제순(1858년 12월 7일 ~ 1916년 6월 20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과거 급제 후 외교관과 이조, 호조의 참의, 이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충청도 관찰사 재직 중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
당시 청나라, 일본군 외에 경군 등과 협력하며 동학 농민군 진압에 기여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 겸 기연해방군사마가 되고
이후 여러 번 텐진을 다녀왔으며 부교리, 정언, 장령 등을 역임했다. 

1893년에는 민씨 정권의 뜻에 따라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교섭하였고,
이듬해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직접 보은군에서 궐기하여 충청도로 확산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대한제국에서 의정부 의정대신 서리와 내각총리대신 서리를 역임했고,
의정부 참정대신과 외무 대신, 내무 대신을 역임했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며,
을사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며
한일 합방 당시에는 내무 대신이었다. 

을사 조약과 한일 합방에 서명하였다가
대표적인 매국노의 한 사람으로 몰려 사후 오랫동안 지탄받아왔다.

3. 이근택(1865년 9월 30일(음력 8월 11일) ~ 1919년 12월 17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다.
본관은 전주이며 초명은 근용이다.

조선 성종대왕의 아들인 경명군의 후손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이듬해 돌아와 한성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가가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4. 이완용(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관, 정치가이자 관료이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자는 경덕, 호는 일당.

문과 급제 후 수구파로서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구했고,
신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로서 내각의 실세가 돼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챙기고 대한제국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일시적으로 실각당하기도 했다.
왕정을 고수하고 국제 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을 기울였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친일파로 변신,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을 체결케 함으로써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을 도왔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정미 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을 일본 제국에 넘겼다.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 제국에 넘겼으며,
1910년에는 최종적으로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철저히 일본 제국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소위 '일선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정책에 호응하여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을
3차례에 걸쳐 발표하면서 만세 운동이
"불순 세력의 선동에 의한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경거망동일 뿐이다"
라고 비난했다.

5. 이지용(1870년 ~ 1928년)은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관료이다. 

을사오적 중 하나이며, 을사 조약 체결 당시 내부대신이었다.
자는 경천, 호는 향운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이다.
고종의 5촌 조카였다.

이지용은 조선의 왕족으로 황실의 근친이었다.
남연군의 증손이자 흥선대원군의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로,
이희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재긍에게 입양되었다.
고종 황제에게는 오촌 조카가 된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감찰사, 황해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 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를 조인에 협조했다. 

나중에 법부대신, 판돈녕부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 조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지용은 정 3위 훈 1등으로 1928년 사망했으며,
그의 작위는 이영주가 그해 습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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