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작곡가, 행위 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세계성과
한국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서울. 거부의 아들로 태어남
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白樂承) 씨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한 무역상이었다. 그의 부친은 당시 종로 5가와 동대 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대부 격이었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임

백남준은 애국 유치원과 수송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남자가 시끄럽게 피아노를 뚱땅거리면 못쓴다"는 부친의 엄격한 훈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큰누이 희득(熙得)의 피아노 레슨 시간을 이용하여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피아노를 배웠다. 그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게 된 때는 경기 공립 중학교(당시 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경기 중학 음악 교사는 피아니스트 신재덕(申載德) 선생(전 이화여대 음대학장, 89년 작고)이었다.
신재덕 선생은 재주덩어리인 백남준에게 피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과 성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음악 수업을 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가 이건우(李建雨)를 만나 백남준은 음악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질은 뛰어나서 이건우로부터 사사 받고 있을 무렵에 다섯 개의 간단한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일본으로 유학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백남준은 집안의 대이동 등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51년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거기서 백남준은 전후 일본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타케우치 토시오(竹內敏雄) 교수로부터 미학을,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로부터 음악학을,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시라이시 아키오(白石顯雄) 교수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특히 노무라 요시오 교수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에다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던 경력을 가진 평화주의자였다.
백남준은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뮌헨 대학 대학원의 음악과 석사 과정에 응모하여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독일에 도착한 56년에는 백남준은 뮌헨 대학에서 음악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당시 준비 중이던 안톤 베버른에 관한 음악사 석사 학위 논문을 중단하고 보수적인 뮌헨을 떠나 보다 전위적인 음악이 환영받던 프라이부르그로 옮겨버렸다. 그 곳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의 기본에 관한 다양한 사항들을 배었다.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케이지는 서양 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18세기 악기가 내는 소리만을 음악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고정 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다.
그는 종래 음악의 정의를 폭넓게 해체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공격적인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년 5월에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조셉 보이즈을 만났다. 보이즈는 낯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함께 열어 자신과 동반자 관계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켜주었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 백남준과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관여되어 있다.
독일 부퍼탈에서 음악을 전시함
63년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절에 부친이 보내주는 학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혁명이 나면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어렵게 되자 부친은 학비를 더 이상 부쳐줄 수 없다는 연락과 함께 마지막 송금을 하게 되었다. 그 마지막 송금액으로 그는 텔레비전 13대 샀다. 그리고 3월에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 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 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이벤트인 동시에 비디오 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 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 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우연적으로)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 문화를 관객의 지배 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 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미국 뉴욕으로 옮겨감
64년 6월, 미국 뉴욕에서는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이 전위 음악가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과 백남준은 '괴짜들'을 멋지게 공연한 뒤, 당시 뉴욕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던 팝아트의 물결을 응시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정착하였다. 그곳에는 케이지가 있었고, 플럭서스의 동지인 조지 마치우나스, 알란 카프로우, 조지 브레히트, 벤자민 패터슨, 앨리슨 노울즈 등 독일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그의 뉴욕 정착을 적극 돕고 나섰다.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 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 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당시 뉴욕 예술계는 예술과 외설 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 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판결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백남준 미학-참여와 소통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예술은 이 때문에 늘 공격적이고 반미학적이며 매체 저항 의지를 담고 있다. 또 관객이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관계하고 작품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되었는데 관객 참여 방식에 의한 예술적 실천은 백남준 미학의 중요한 하이라이트이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간주하였다.
백남준 예술의 재미는 역시 예술과 대중의 만남이며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이다. 예술 대중주의를 위한 백남준의 시도는 바로 인간화된 예술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그의 시각은 그래서 위력적이다.
백남준은 단순히 비디오 예술의 첫 개척자나 시행자가 아니라 새로운 비디오 예술 도구나 방법론을 개발해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비디오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속성을 다양한 컬러와 이미지효과를 곁들여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 예술을 창조한 것은 백남준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koreandb.net/koreandb_services.asp?URL=/WKPeople/WKPeopl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