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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이 좋은 사람만은 아니야. 균형있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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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는 군자금의 대부분을 신민부의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재만동포의 의무금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창립총회에서 논은 소상(小) 2원(元), 대상(大) 3원, 밭은 소상 1원, 대상 2원 5각(角)씩, 상인들에게는 소유재산의 20분의 1을 징수하도록 하였고,註 186 1925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매호당 6원의 의무금을 징수할 것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우선 당시 북만동포의 대부분이 소작농으로서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북만청년총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의 조직적인 반대공작이 있었다. 그 결과 1928년 11월 18일에는 빈주사건(賓洲事件)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북만지역에 있던 재만농민동맹과 주중청년동맹(住中靑年同盟) 등이 빈주현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신민부를 탈퇴하도록 한 데서 일어났다. 빈주현은 신민부의 관할구역으로 오래 전부터 의무금을 내던 곳이었다. 이에 신민부원인 이백호(李白虎) 등이 이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권총을 발사해 사상자를 낸 것이다...또한 훈춘(琿春)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신민부원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재만동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대립의 결정적인 계기는 빈주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민정파에서는 동포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한 살인행위라고 하고,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賣族的) 주구(走狗),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정신 등을 매장하라”라고 김좌진·정신 등 군정파의 주요인물을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 혁명적 사기한 등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이때 군정파에서도 성토문을 내어서 군정파와 민정파는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었다.註 220 이러한 양자의 대립은 곧 신민부의 세력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해체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군정파, 즉 무장투쟁단체의 폐단...무장부대는 적을 토벌하고 적 기관을 파괴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 친일한국인의 암살 및 국내진입을 위한 예비공작 등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공작의 수행은 희생적 모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민부가 통치하고 있는 구역의 농민들이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생활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가난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무장대원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협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부 주민의 항일민족의식의 부족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무장대원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마치 무슨 권력이나 쥔 듯이 위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농민들을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군정파의 중심 인물인 김좌진의 총애를 받던 이백호였으며, 앞서 언급한 빈주사건은 그러한 이유로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농민들은 자연히 군정파에서 멀어져 갔다. 또한 김좌진을 “마왕(魔王)·폭군”이라고까지 칭하게 되었다.
...일반동포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 단체라고 존경하는 척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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