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너무 감명 깊게 봐서 써버린 글... 참고로 현대물...
환생한 에루리로 할지 드림으로 할지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써벌임...
이제 내일이면 연휴도 끝인데 다들 즐겁게 보내라구~
-------
비쥐으엠: https://kko.to/57V0T-rfB
-------
"아저씨, 난 끝이 너무 싫어요."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엘빈은 담배를 태우며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다. '왜'라는 물음도 없이.
"영화가 끝나면 삼일을 앓아요. 좋아했던 드라마가 끝나면 일주일을, 장편 시리즈 소설이 끝나면 근 한 달을. 좋아하는 만큼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이 큰가 봐요."
붉게 타던 태양이 완전히 사라져 어둠이 찾아든 골목엔 희미한 가로등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근데 사람한텐 그게 안 돼요. 너무 기대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애당초 그 기대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길게 늘어선 상점의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고, 엘빈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남은 담배의 개수가 하나. 담배 한 대가 타들어 가는 만큼의 시간을 벌었다. 엘빈이 입에 담배를 문다.
"아저씨 은근 골초인 것 같아요. 금연해 본 적 있어요?"
"아니."
"절연은 있어도 금연은 없다던데. 아저씬 딱히 절연도 아닌가 봐요."
"이미 끊어야 할 것들로 충분하니까."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구멍 난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게 아저씨한텐 썩은 동아줄인가 봐요. 아, 욕하는 건 아니고, 하늘이 쇠줄을 내려줄 일은 없을 테니까."
엘빈의 눈이 깊게 내리 깔린다. 기척을 따라 내려앉았던 시선이 서서히 올라온다. 그러나 어깨선을 넘기지 못하고 곧 멈춰 섰다.
인기척을 만들어 내던 이가 뒤집어쓴 후드의 지퍼를 죽 잡아 올리며, 빗소리를 뚫고 다시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 또 올게요."
엘빈은 거센 비를 온몸으로 떠안으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담배 연기가 폐를 깊숙이 훑고, 다시 공중으로 흩어진다.
----------
사흘 연속으로 비가 내렸다. 지난여름은 엘빈의 평탄하지 인생 중 가장 최악의 날이었다.
길어진 장마에 날은 습습했고,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비보를 실어 날랐다.
'장마에 강풍과 폭우가 몰아치면서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오늘 저녁 7시쯤 영갈숲길공원 인근을 달리던 7.5t 화물차가 빗길에 넘어졌고, 그 과정에서 화물차에 실려있던 콘크리트 자재가 도로에 쏟아졌습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정부 청사 방면 3개 차로가 1시간가량 통제되면서...'
거의 반년을 준비한 노력이 일순간 허사가 됐다.
하고많은 다리 중 하필 가장 빠른 경로에 위치한 다리가 잠겼고, 급하게 우회한 길에서 또 하필 다중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하필의 연속으로 낌새를 챈 쥐새끼들이 자리를 털어버린 바람에 결국 간발의 차로 머리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비로 인해 엉망이 돼버린 이 작전은 실행에 옮기기까지 준비만 반년. 그리고 조사를 시작한 지는 실질적으로 20년을 막 넘어선 사건이었다.
썩어가는 마음만큼 타들어 간 담뱃재가 길게 늘어지다 검은 구두 위로 떨어졌다. 엘빈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선배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꼬리 잡았으니까 단단히 붙잡아 흔들면, 머리도 같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잘린 꼬리 백날 흔들어봐야 뭐 하나."
"도마뱀도 아니고, 그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꼬리를 자릅니까. 선배님도 그러셨잖습니까. 이 새끼들 꼬리 없어지면 재생능력 없는 병신들이라고."
"잘린 거다. 자른 게 아니라."
"그 말은 혹시..."
"속으로 삼켜. 뱉으면 냄새 퍼지는 거 한순간이니."
고민이 늘어 심란한 표정의 후배가 동료들의 부름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거리에 홀로 남겨진 엘빈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드디어 꼬리까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잘나가던 아버지가 한순간 차가운 시체로 돌아와야 했는지.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아는 이가 어째서 한 명도 없는 건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이가 갈리게 펜을 붙들고, 몸이 부서져라 구른 시간이 무려 20년이었다.
엘빈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벌써 세 개비째였다. 식당의 소란스러움이 열린 문의 문턱을 타고 흘러나왔다.
"거지 같아."
엘빈의 눈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짧은 눈길 한 번을 남기고 다시 돌아왔다.
"아저씨. 우산 있어요?"
엘빈의 눈이 다시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기울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히 우산을 내민다.
"이거 쓰고 가요. 있어도 그냥 이거 써요."
10년 넘게 이 짓을 하면서 이젠 눈빛만 봐도 웬만한 인간은 다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엘빈은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들었다. 이미 우산이 있었고, 근처에 차도 있었지만 그냥 받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자신의 손에 우산을 준 이가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당겨 더 깊이 눌러썼다. 그러고는 빗속을 걸어 사라졌다.
방금까지 복잡하게 머릿속을 괴롭히던 생각이 손에 들린 우산 하나로 일순간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 엘빈은 생각이 복잡해지면 그곳을 찾았다. 머릿속이 단순해지면 의외로 풀리지 않던 숙제들이 풀리기도 했다.
그렇게 반년이 흐른 지난겨울,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날. 엘빈은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마주쳤다. 지난여름, 자신에게 우산을 건넸던 이를.
"검사인가 봐요?"
엘빈은 질문을 건넨 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자신의 눈빛을 의혹쯤으로 이해한 상대방이 말을 덧붙인다.
"출,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양복 입은 직장인이, 법원 주변을 제집처럼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일은 잘 없으니까. 배지가 없으니 변호사는 아니고, 법원에서 관련된 일을 하거나 법원에 볼 일 있는 사람일 텐데 눈빛이 딱 검사라. 그냥 어림짐작 겸 추측한 번 해본 거예요."
엘빈은 다시 하얀 길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며, 품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아냈다.
"더러운 거 잡아넣는 사람들은 저 눈처럼 깨끗하게 살려나."
엘빈은 자신에게 질문을 건네는 이의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검사는 속이 깨끗한 사람들만 할 수 있나 싶어서."
"아니."
엘빈의 대답을 들은 상대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긴. 깨끗할수록 더러워지기 쉬우니까."
그 말을 끝으로 엘빈은 묵묵히 담배만 태웠고, 상대방은 흩날리는 눈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던 상대방이 머리 위로 후드를 뒤집어쓴다.
눈 내리는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던 걸음이 뚝. 멈추더니 뒤를 돌아본다.
"좀 더 있다가 가요. 여긴 석양이 질 때가 제일 예쁘거든요."
그렇게 일 년.
석양이 지는 그곳에서 의미 없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지가 벌써 일 년이었다.
--------
"아저씬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뭐가 남는다고."
"풀어야 할 비밀이 있어서."
"그거 풀고 나면 뭐 할 건데요?"
"글쎄."
엘빈은 불을 붙인 담배를 가만히 바라봤다. 빨간 불이 타들어 간 자리를 회색 담뱃재가 채운다.
"어차피 죽으면 가진 거 하나 없이 돌아갈 게 뻔한데, 다들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밤에 눈을 감았다가 뜨면 또다시 아침이 찾아올 텐데, 기왕이면 반복되는 하루라도 즐겁게 사는 게 나으니까."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오랜 고통을 견디는 거 사실은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엘빈은 다시 한번 '글쎄.'라는 애매한 대답을 던졌다. 자신의 답보다 상대방의 답이 이어지는 게 이상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보같이 살기 싫어서 그래요. 바보 같은 세상을 혼자 견디라고 던져 넣기엔 힘들어할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냥 지켜볼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용기 내는 거예요. 내가 너무 소중하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소중해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살아가는 것에 정해진 답은 없으니까.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근데 그 용기는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난 우울한 게 좋아요. 우울해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바득바득 버티고 있는 날 보면, 그래도 아직 나 혼자는 아니구나. 날 지키고 있는 게 나 혼자는 아니라서 이렇게 버티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조용한 적막이 찾아오고 엘빈은 곧 발걸음을 돌린다. 방금 자신이 태운 담배가 마지막이었단 걸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엘빈의 귓가를 비집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 내일 또 와요?"
질문하는 이는 엘빈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엘빈은 잠시 멈추어 설 뿐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짧은 인사를 마친 엘빈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
"검사님, 오늘 회식 오실 거죠?"
"아. 가야 합니까."
"한 검사님 오늘만 기다린 거 아시면서. 벌써 모 계장님이랑 가게 고르겠다고 사다리 타기하고 난리 났어요."
"그렇습니까."
엘빈은 손을 들어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대답을 재촉하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런 날은 그냥 한 번쯤 맞춰주세요. 잠깐 풀어줘야 다시 또 당길 힘이 생기죠."
"주소 넣어주세요."
회식 시간에 늦지 않게 나온 엘빈은 찬 바람을 뚫고 익숙한 거리를 걸어간다. 눈에 익은 가로수와 가게 간판을 지나면, 늘 그렇듯 한결같은 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가 있다.
엘빈은 항상 머물던 그 자리에서 하늘같이 붉게 타오르는 라이터의 불을 입에 문 담배에 가져다 댄다. 탁탁. 몇 번의 소리 끝에 담배 끝에 불이 붙는다.
"난 다시 태어나면 물이 되고 싶어요. 강이 되고, 바다가 돼서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구름이 되면 땅으로 쏟아져 내리게."
"물은 생명이 아니지 않나."
"아저씨 이과죠?"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인지 입을 열던 엘빈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자신을 재촉하는 모 계장의 목소리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고민하던 엘빈이 방금 꺼내려던 물음을 떠올렸다.
"아. 괜찮아요. 혼자 떠들어도 돼요."
엘빈은 입을 뻥긋거리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아섰다. 모 계장의 목소리가 꽤 다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빈이 뒤를 돌아본다. 무언가 털어낸 듯 홀가분한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또 만나요."
짧게 긍정 섞인 몸짓을 보낸 엘빈의 등 뒤로 미처 전하지 못한 혼잣말이 흘러나온다.
'많은 비가 아니어도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
토독. 그 작은 소리 한 번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 소리가 들리면 내가 이 세상을 살았다고. 그렇게 기억해 주세요.'
-----------
'여름 장마가 기승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비 소식으로 인해...'
2년 전과 같이 긴 장마가 안타까운 비보를 쏟아내고 있다.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엘빈의 우산 위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빗방울들이 토독. 토독. 우산을 두드리고, 엘빈은 손을 뻗어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을 손에 담는다. 쓸쓸한 미소가 손바닥 위에 머물렀다.
무엇이었을까. 떨어진 빗방울 중 무엇이었을까.
엘빈은 아직 같은 곳에서,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세상에 머물러있다.
'아저씨. 사람이 살아있다고 느껴질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을 때예요. 그러니까 누군가 기억하고 있다면 그건 살아있는 것과 같은 기분일 거예요.'
언젠가 이곳에서 주고받았던 대화였다. 끊어야 할 게 많았던 그 시절과는 달리 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엘빈의 손에는 담배 대신 우산이 들려있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엘빈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영화가 끝나면 삼일을 앓아요."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맴돈다.
"좋아했던 드라마가 끝나면 일주일을, 긴 장편 소설을 다 읽었을 땐 근 한 달을 앓았는데, 그런 것들이 사람에 대한 아쉬움만은 못하더라고."
엘빈이 뒤를 돌았다. 가을의 하늘보다 맑고 푸른 미소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이 짓을 10년 넘게 하면 눈빛만 봐도 얼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출, 퇴근 시간도 아닌데 법원 근처에서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며, 배지를 달고 있지 않은 사람. 법원에 볼 일이 있거나, 법원에서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어림짐작 겸 추측해 보건대 저 눈빛은 검사였다.
"또 만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