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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이동변기 매화틀

완소혜교 |2006.11.16 09:31
조회 123 |추천 0

1)경복궁에 뒷간은 어디에 있을까?

   왕의 이동변기 "매화틀"

 

경복궁에 뒷간은 어디에 있을까? 강녕전교태전에는 뒷간이 있을 만한 자리가 없다.

실내 뒷간은 없었지만 왕은 일을 보러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

 

옛날 어른들이 둥그런 요강을 사용하듯이 왕은 '매화틀'이라 불린 이동용 변기를 사용하였다.

매화틀에 재를 채운 뒤 일을 보면 튀지도 않고 치우기도 좋았다고 한다.때때로 어의는 왕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똥 색깔과 맛을 보았다고 한다. 일을 본 왕이 무엇으로 뒷 처리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문제는 이 넓은 궁궐에 왕과 왕비만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 고관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무수리까지 갖가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매화틀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복궁에는 무려 23개의 뒷간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았던 만큼 뒷간도 많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지금 경복궁에 뒷간은 전각과 함께 모두 사라지고 하나만 남아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복원된 자선당과 비현각 사이를 가보라. 문과 문 사이에 아담한 건물이 하나 있다. 현판도 없고 설명도 없지만 뒷간임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2)궁과 궐의 의미

 

궁궐이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이다. 외성으로 둘러 쌓인 부분을 궐이라 하고 지금 복원하고 있는 흥례문 안을 궁이라고 한다. 이 두 부분을 합쳐서 궁궐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복궁은 가장 격식을 차린 궁궐이어서 외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 이 외성을 궁성, 궁장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에는 총 1063.5간, 그러니까 1933.4미터 길이로 궁성이 둘러져 있었다. 여기에 후원을 에워싼 698.5간(1270미터)의 담이 덧대어 있었다.

성벽의 높이와 두께는 궁궐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궁궐 동편에 있는 민속 박물관 정문에 가면 단면을 볼 수 있다. 높이 약 5미터 남짓, 두께 약 2미터 남짓 되어 보인다. <여지승람>에는 "궁성은 경성 안에 있는데 둘레가 1813보이고, 높이가 21척 1촌"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 자척으로 계산하면 6미터 40센티미터이지만 당시 자척으로 한다면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궁자이 높지 않은 것은 외성을 외적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이 아닌 궐의 영역은 비교적 개방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고창덕궁 궐내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용무가 있는 사람은 궐에 들어오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세종 때는 천한 신분을 가진 '자재'라는 뉘집 여종이 경복궁 광화문에 올라사 종을 쳐서 민원을 제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때는 영의정 집 종이라고 사칭하고 외성을 통과한 뒤 궁전인 내전 문 앞까지 들어 와서 왕에게 직계하려던 사람가지도 있었다. 낮 동안에는 명분이 있는 출입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3)일제가 명성황후를 죽인 까닭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이긴 일제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요동 반도, 타이완 등을 청에게 빼앗아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러시아프랑스, 독일과 함께 요동을 청에게 되돌려주게 함으로써 일제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삼국 간섭"이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내각을 친러시아파로 개편하고 친일파가 장악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시위대를 중용하려고 하였다. 전쟁 승리에 들떠있던 일제로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일제는 친러시아 정책을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감히 생각하지 못한 비열한 방법으로 말이다.

조선의 정국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속에 빠져있던 1895년 7월 13일 일제는 갑자기 조선 주재 공사를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로 바꾸었다. 책략가라 할 수 있는 이노우에보다는 저돌적인 미우라가 명성황후 제거작전에 적임자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일제는 10월 8일 새벽 어둠을 틈타 일제 경찰과 깡패를 앞세워 궁궐에 난입하였다.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는 광화문으로 난입하던 흉도에 맞서 총격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시위대를 지휘하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은 전사하였다. 흉도들은 왕의 침전인 곤녕합과 왕비 침전인 옥호루를 샅샅이 뒤져 왕비를 찾았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옥호루를 지키다 총을 맞은 뒤 고종이 보는 앞에서 칼로 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고종과 왕태자도 옷이 찢어지는 수모를 당하였고, 칼등으로 목을 맞은 왕태자는 한동안 기절하였다.

일제가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상은 당시 시위대 교관이었던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과 함께 궁궐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이 한 증언에서 잘 드러난다.

"한 무리의 일본 낭인(깡패)들이 건청궁에 들이닥쳤다. 지휘관인 듯한 자가 ['여우는 베어버려라'}고 소리치자 이들은 내전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국왕 침전인 곤녕합 문을 부수고 들어간 그들은 벌벌 떠는 국왕과 왕세자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옹후를 쫓아내라고 명령하는 문서를 고종에게 내밀며 서명하기를 강요했다. 국왕(고종)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다른자들이 공중에 권총을 쏘면 왕후가 숨은 곳을 빨리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당시 왕후는 옥호루에 있었든데 국왕은 반대편 방을 가리켰다. 그 두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왕후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직접 만행에 참여한 일본인들도 생생한(?)증언을 남겼다. 당시 한성신보 편집장으로 이 사건에 참여한 고바야카와는 자신이 한 경험을 <명성황후조락 사건>이라는 수기로 남겼다.

"우리는 왕후의 침실인 옥호루에 뛰어 들어갔다. 겁에 질린 여자 10여 명이 떨고 있었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의 얼굴도 보였다. 도망가려는 이경직을 발 죽였다. 울부짖는 여자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칼날을 가슴에 대고 왕후가 어디 있느냐고 캐물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르는 그들은 그저 벌벌 떨며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복장과 용모가 우아하여 왕후라고 생각되는 여자 3명을 살해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여자를 끌어내 칼을 갖다대고 협박하자 그녀는 옹후릐 볼 위에 한 점 얽은 자국이 있다고 했다. 이데 피살된 여자들의 시체를 다시 점검하니 과연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시체가 발견됐다. 이 시체를 궁녀 몇 명에게 확인시켜 보니 모두 왕후가 틀림없다고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냘픈 몸매에 얼굴은 유순하게 생겼고 살결은 희였다.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실제 나이 44세)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을 눕혀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잠들어 있었다. 이 가냘픈 손으로 조선 팔도를 움직이며 영웅 호걸들을 조정했던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죽은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마 위에 엇갈려 있는 두 줄기 칼 날 자국이 치명상인 듯 했다. 이윽고 우리는 시체를 홑이불에 싸서 녹산(옥호루 옆 나즈막한 동산)수풀 속으로 끌고 가 석유를 끼얹고 장작더미를 싸 얹은 다음 불을 질렸다. 이 때가 오전 8시경이었다."

'명성황후 조난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명성황후가 일본병에게 시해당할 때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어지러운 실내에는 유혈이 낭자하고 겁에 질린 여인네들의 표정과 잔인한 일본 무사의 몸짓이 당시 우리 나라의 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일제는 가증스럽게도 타다남은 뼈마저 향원지에 뿌려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옥호루는 없어졌다. 아마도 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건청궁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도 목적은 다르지만 옥호루를 없애버리고 싶어하였을 것이다. 결국 일제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옥호루를 1915년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할 때 헐어버렸다.

아무리 뻔뻔한 일제라도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게 하는 건물을 그대로 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제는 그 자리에 서양식 건물을 세워 박람회장으로 사용하였다. 옥호루가 없어졌다고 해도 일제가 저지른 죄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건 진상이 알려지자 일제는 국내외로부터 빗발치는 비판과 항의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일제는 국제 여론을 피하고자 미우라 공사 등 50여 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1월 20일 일본 정부는 춘생문 사건을 빌미로'증거 불충문'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이들은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고, 왕비를 내려쳤던 칼은 아지고 후손들이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내용출처 : [기타] 블로그 집필 - 삼계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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