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바이의 사생활(35화) -
"궤변이 고정관념을 이겼군."
리바이가 시크하게 웃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접시들을 플레이팅하기 시작했다.
리바이의 말 뜻을 알아차린 여주가 화끈 달아올랐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자기 입으로
주방에서 어떻게 세수를 하냐고 핀잔을 줘 놓고는
리바이의 손짓에 달아올라 허우적거린 자신을
반쯤 놀리는 것이었다.
여주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얼른 샤워가운을 여몄다.
어휴, 약올라...
리바이는 여주가 끓여 놓은 감자베이컨 스프에
바삭한 크루통을 올렸다.
훈제 돼지고기 뒷다리를 두툼하게 썰어
보라색 양파와 샐러리, 노란색 파프리카를 넣고 함께
구운 요리도 곁들여 내놓았다.
아침점심을 건너뛰고 두 번의 세수마저 한 뒤라
허기가 진 리바이가 여주의 접시를 내려놓고 얼른
한 입 스프부터 떠넣었다.
* * *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거실에서 뒹굴며 느긋하게
홍차를 즐겼다.
쇼파에 앉은 여주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운 리바이가
잠시 눈을 감자 여주가 그의 앞머리를 만졌다.
눈썹, 눈꺼풀, 콧날, 뺨, 입술을 차례로 더듬으며
마음껏 자신의 남자의 얼굴을 탐색했다.
기분이 좋았는지 리바이는 옅은 미소를 띄며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학교는 어때. 다닐 만 한가."
"마레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어서 급여도 괜찮아요.
교장선생님은 좀 까다롭지만 합리적인 편이시고
동료 교사들은... 나쁘지 않아요.
전남편... 이 나가면서 그래도 분탕질 하고 나가진
않아서요."
"......"
"미안, 말 안꺼내기로 해놓고."
"애들은? 저번에 그... 식당에서 봤던 그 녀석 같은
놈들은 많아?"
"아~ 그땐 식사지도가 있어서 ㅎㅎㅎ
다행히도 제가 맡은 반 아이가 아니에요. 휴~
그 아이를 보면 나중에 내 아이가 저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아."
자기가 너무 먼 미래 얘기를 하는 것을 깨닫고 여주가
얼굴을 붉히는데 리바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더 하라고
부추긴다.
"아이가 뭐?"
"아니... 뭐. 상상은 해볼 수 있잖아요?"
"그렇지. 상상해볼 수는 있지."
"그렇다고요. 갑자기 왜 학교 얘긴 꺼낸담."
"그냥. 너에 대해서는 다 알고 싶다.
요 조그만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도.
그래서.
너는 네 직업에 만족하나?"
"보람있어요. 천진한 아이들이랑 함께 하는 시간도
즐겁고요."
"그래서 아이들의 가족과도 함께 어울리고. 그렇지?"
"... 벤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그땐 상황이 그랬잖아요. 이해해주기로 해놓고서."
"사람좋은 여주 선생님이 개인 교습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으니 걱정이 되서 그렇지.
딱 보면 자기한테 마음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녀석을
경계도 안하고 가까이 두려 하다니...
앞으로도 그런 녀석들이 접근하면 어쩌려는지
내가 아주 속이 타서 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다 두들겨 패버리고 싶다만."
"미쳤어. 학생 가족을 때린다고요?"
"내 여자한테 찝적거리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이 참... 포르코는 나 애인 있는 거 몰랐다니까요."
"이제 알았잖냐. 그 녀석, 쉽게 포기할까?
그 후로 별다른 기색 없었어?"
여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고백을 받고, 낮에 식사도 함께 했다고 사실대로
밝히면 아마 지금 당장 리바이가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굳이 말할 필요 없지. 지혜롭게 굴자.
내가 양다리 걸친 것도,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깐 부득이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난 깨끗해.
"불안해 하지 말아요."
여주는 허리를 숙여 리바이의 입술에 키스했다.
리바이의 코가 여주의 턱에 닿았다.
반대로 여주의 턱이 리바이의 코에 닿았다.
거꾸로 하는 키스도 색다르네.
리바이가 여주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나른한 그의 손짓이 좋았다.
...... (중략) ......
"네 향기가 좋다."
"으음... 자기는 민망한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해."
"네 맛도 좋아."
"... 아이 참... 그만..."
"네가 좋아. 어떡하지. 하아..."
"나도. 나도 당신이 좋아."
"널 갖고 싶어."
"이미 가졌답니다."
"다른 놈이 너 쳐다보는 것도 싫고,
마음에 두는 것도 싫어.
나만. 나만 가지고 싶어."
"그러고 있는 걸.
리바이 당신 외에 아무도 나를 가질 수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상해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리바이가 몸만 쇼파 아래로 내려가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여주의 허벅지에 대고 부빈다.
여주는 리바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그런 리바이를
사랑을 담아 내려다본다.
그의 둥근 귓바퀴를 매만지고,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면서 왜 당신은 걱정하나요?
당신에게 나 뿐이듯 나에게도 당신 뿐인데.
* * *
꿈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리바이는 늘 마음 한 켠이 저린다.
더 오래 더 많이 같이 있고 싶으니까.
리바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주는 벌써 코트의
깃을 여미는 중이다.
"갈까요?"
"빨리 가고 싶어하는 것 같네."
"어, 그렇게 보여요?"
여주가 초승달 눈웃음을 치며 리바이의 팔짱을 낀다.
어둑어둑한 일요일 초저녁.
더 컴컴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선 리바이는 왠지 언짢다.
"다음 주에 저 급여 타요.
나 리바이 씨 선물 하나 사고 싶어요.
깜짝선물 하려다가, 그래도 이왕이면 쓸모 있는 거
사고 싶어서요. 필요한 거 말해봐요."
"호오. 비싼 것도 돼?"
"음... ㅋㅋ 눈치껏."
"그럼... 생각해 보고 알려줄게."
"그래요."
"집에 가면 뭐할 거지?"
"내일 작문 시험일이에요. 시험지는 나왔는데 그래도
검토할 게 있어서 그거 조금 들여다보고 자야죠.
리바이 씬?"
"너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잠깐 들렸다 가려고 한다.
네가 없으니 일 속도가 너무 느려."
"사무직원을 보충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비서 한 명 고용할까 고민중이야."
"비서?"
"응. 예쁘고 똑똑한 젊은 아가씨로."
"아하."
"... 큭, 농담이다. 너라면 모를까, 다른 여자는 됐어.
네가 교사 일을 그만두면 당장이라도 채용하겠지만...
계약도 무시할 순 없는 거니까.
그리고 난 네 선택을 존중한다.
그 자리는 비워놓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오늘 밤에 가서 야근을 해야 하겠지..."
"우와... 말 되게 교묘하게 하시네?
지금 나 세뇌하는 거 같아요?"
"뭘 또 그렇게 꼬아듣고 그러냐. 말이 그렇다고."
"딜레마네요. 나도 아르바이트 즐거웠었는데.
교사 일도 나한텐 숙명 같은 일이라...
아무튼 리바이 씨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나 리바이 아커만의 스카웃 제의 받은 사람이라고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녀도 되죠?"
"큭... 그러던가."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리바이가 사라져 간다.
여주는 리바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
아파트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에 올라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여주 집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여 여주는 순간 옆집 아주머니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포르코였다.
포르코는 팔짱을 낀 채 여주가 걸어오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오세요, 선생님."
"... 포르코. 어쩐 일이에요, 저희 집 앞에.
설마 저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제가 언제 올 줄 알고요."
"토요일은 안오셔도 일요일엔 오시겠지 했어요."
포르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아는 여주가 입을 다물었다.
"제 연애사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바로 어제 저한테
부담주지 않을 거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네, 그랬죠. 부담드리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고요."
"그럼 왜 여기 계세요?"
"여기서 얘기할까요,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이웃들이 들어서 별로 좋을 이야기는 아니어서요."
"지금 좀 늦었는데요. 내일..."
"오늘 들으셔야 해요."
"하아... 뭔데요. 저 이러심 곤란해요."
"전남편."
"...네?"
여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는 거야, 갤리어드 씨가.
그러나 포르코의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여주는 망설이다
할 수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오세요."
포르코는 어제 앉았던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주는 간이침대에 앉는 대신 싱크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코트도 벗지 않은 채 포르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전남편 뭐요."
"어제요. 저랑 식당에서 식사 마치고 선생님이 가셨죠.
저는 선생님 뒷모습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옆에 왠 덩치 큰 남자가 있었어요.
저보고... 선생님과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구요."
"그게... 제 전남편이라고요?"
"네."
"그래서요?"
"전남편이 왜 신경쓰냐고 제가 핀잔을 줬습니다.
그랬더니 저보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애인도 아닌데 참견하지 말라고 했어요.
선생님과 교제 중인 남자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그 남자, 선생님 집도 알고 있어요.
금요일 밤에 아파트에서도 한 번 마주쳤습니다.
저기... 혹시... 헤어질 때 안좋게 헤어지셨어요?
폭력적이라거나...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아아...... 뭐, 뭐라고 하셨죠..."
여주의 손이 떨리는 것을 포르코는 보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 네. 그밖에는요?"
"그러고 헤어졌어요.
선생님, 그 남자 위험한 사람이에요?"
"아니요,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마레에 있을 때 그 사람도 교사였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돌봐주는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한 거에요.
다만 오래 떨어져 있으면서 마음이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져서 이혼하기로 합의했고요.
다른 얘기는요?"
"없었어요. 어제도 선생님을 따라가려고 하다가
제가 신경쓰였는지 다른 쪽으로 가는 것까지 봤고요.
혹시 짐작가는 이유 같은 거 없어요?"
"네. 좋은 이별은 없다지만.. 점잖게 헤어졌는데.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지 왜 미행을..."
"애인분한테 말하는게 낫지 않아요?"
그 말을 꺼내기까지 참 망설였었다.
하지만 포르코는 자신의 욕구 보다 여주의 안위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며.
그러나 여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바이는 지금 포르코의 존재만으로도 신경이 예민한데
라이너의 이야기까지 해서 긁어부스럼을 만들기는
싫었다.
비록 라이너와 헤어지기는 했어도 라이너가 그렇게까지
지저분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차라리 대놓고 자길 찾아왔으면 좋았을텐데,
뒷조사 하듯 따라다닌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염려할 만 해요.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포르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혹시 다음에 또 그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그냥 저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 전에 제가 먼저 마주칠 수도 있지만요.
아, 그리고, 이거... 2장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써봤어요.
이번주 금요일까지 풀어 오세요. 알았죠?"
"하...! 선생님은 못당하겠네요 ㅎㅎ... 알겠습니다.
그럼 저, 가볼게요.
선생님 말이 맞으면 좋겠지만 혹시, 혹시라도 당장
도움이 필요할 땐 꼭 저한테 얘기하세요.
남자친구 대신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도와드릴게요.
아셨죠?
괜히 저한테 거리 두느라고 쩔쩔 매시지 마세요.
저 그런 걸로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네?"
"... 네. 그럴게요. 든든한 이웃이 있어서 좋아요. 안녕."
포르코는 자신이 꽤 어른스럽게 대처한 것 같아
뿌듯했다.
불이 켜진 여주의 방 창문을 한동안 바라보며, 그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 하... 오늘도 썰리면 안되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