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바이의 사생활(36화) -
집에 홀로 남은 여주는 포르코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라이너가 갑자기 왜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지?
라이너에 대해 포르코에게 한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라이너와 여주가 함께 근무했던 학교에서
그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 모두에게 인기가 높았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면이 있었고
착하고 성실했다.
그래서 여주와 라이너의 교제와 결혼소식이 알려졌을 때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여주가 조금은 성급하게 결혼을 결심하긴 했어도
두 사람은 나름 좋은 관계였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3개월의 교제 기간 내내 여주의 혼전 순결을 지키려는
의지를 존중해준 데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좋은 사람'.
성적으로 강한 끌림이라거나 불타오르는 애욕 같은
감정은 없었어도 나름 좋은 감정은 분명 있었다.
분명 해꼬지할 목적은 아닐텐데.
이혼한지 석 달 만에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는 거지?
여주 본인도 이유도 모르겠는데
굳이 리바이에게 심란한 이야기거리를
하나 더 던지긴 싫다.
가뜩이나 포르코를 의식하고 참고 있는 사람인데.
딱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여주는 라이너가 직접 접근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급한 사람이 우물 파는 법.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여주는 문단속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간이침대를 확장시켰다.
침대가 넓다고 생각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혼자 누우니 왠지 허전하고 터무니없이 넓어 보였다.
옆의 여백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리바이가 옆에 누웠으면 좋겠어.
단단한 팔로 나를 끌어안고 나를 쓰다듬어줬으면.
한쪽 팔로 자기 머리를 받치고
다른 팔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나를 유혹하듯 지그시
바라봐줬으면.
지금 내 옆에 있어줬으면.
리바이는 여주가 제 집에 돌아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헤어짐을 아쉬워 한 건 비단 그 뿐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그녀 또한 그가 그리웠고 그가 고팠다.
여주는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 * *
토요일.
화창한 날씨였으면 좋았을텐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미카사를 데리러 온 쟝이 비옷을 뒤집어 쓴 채
내려 의상실 2층으로 올라갔다.
"미카사, 비가 꽤 오는데? 오늘 갈 수 있을까?"
"그러게. 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지면 곤란하니...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아니, 마차를 타기도 어려울 것 같아."
"응. 오늘은 못가겠다. 쟝, 일단 들어와, 너 입술이
보라색이야."
"아... 그래."
쟝은 현관 입구에서 비옷을 벗어 물기를 탈탈 털었다.
미카사가 비옷을 받아 주었다.
거실의 작은 난로 앞에 쟝이 몸을 녹이고 있자
미카사가 따뜻한 코코아를 두 잔 들고 나왔다.
아직 비 맞고 다닐 날씨는 아니어서 그런가 으슬으슬
몸이 추웠던 쟝은 두 손으로 잔을 들고 손을 녹였다.
미카사가 담요를 가져와 쟝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이런 날씨면 그냥 집에 있지."
"약속했잖아, 오늘 가기로. 너 기다릴까봐 왔지."
"미련하게. 안오면 그러려니 했겠지.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에이~ 우리가 조사병단 할 때 야외노숙한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비맞고 말탄 거야 뭐 셀 수도 없는데 이 정도... 에에에
엣취이~~~!!!"
쟝의 재채기에 미카사가 눈쌀을 찌푸렸다.
"헤헤헤^^;;"
쟝이 멋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원래대로 다음 주에 애들이랑 가야겠다.
이러다 너 잡겠어."
"그, 그래... 그럼... 저어... 그때... 말했던 거는..."
"아아... 그거."
미카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쟝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코코아를 호르륵 마시던 미카사가 쟝을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쟝, 너도 알지, 내가 에렌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 응. 알지."
"에렌은 내게... 자유로워지라고 말했어.
그 말의 의미를 계속 곱씹으며 살아왔지.
에렌은 내게 친구 이상의 존재였으니까.
가족, 친구, 연인, 살아가는 이유, 지켜야 할 존재,
목숨, 숙명...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어."
"알아."
"쟝, 너 물고기가 물 밖에서도 살 수 있는 거 알아?"
"어? 아니? 그럴리가."
"고래는 물 밖 공기를 마시고 산대.
수면 위로 올라와서 공기를 들이마시고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그 공기로 살다가,
몸 속 공기가 다 떨어지면 다시 수면 밖으로 올라온대."
"진짜? 처음 들었어."
"에렌은 내가...
그냥 미카사 아커만 자신으로 살아가길 바랬던 거겠지?
난... 마치 물 속에서 호흡하는 게 당연한 물고기처럼
물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아니 물 밖 세상은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물 밖에도 물고기가 있더라.
물 밖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물고기가.
그래서,
지난 17년 동안 에렌이라는 물 속에서 살아 봤으니까,
앞으로는 물 밖에서 숨쉬어 보려고 해.
그 얘기를 에렌 앞에서,
그리고 쟝 네 앞에서 직접 하고 싶었어.
쟝, 내가... 수면 위로 나올 수 있게 날 끌어 올려줄래?"
비장한 말투의 미카사가 쟝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카사의 말 뜻을 잠시 생각하던 쟝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옆에 내려놓고는 미카사의 손을 꼬옥 잡았다.
"고마워. 고마워 미카사."
"나도 고마워 쟝. 곁에서 묵묵히 날 기다려줘서."
두 사람이 한동안 손을 맞잡고 애틋하게 바라보는데,
아랫층에서 누가 의상실 문을 쿵쿵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맥이 빠진 둘.
"의상실 휴업한다고 팻말 걸어놨는데 누구야?"
"그냥 무시하면 가지 않을까?"
그때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목소리.
빗소리에도 들린다.
"어이! 미카사 아커만! 문 열어!!"
"뭐야...?"
미카사와 쟝의 눈이 마주친다.
쟝이 들어올 때는 외부로 난 계단을 통해 왔지만,
내부에는 1층 의상실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따로 있어서, 두 사람은 얼른 1층으로 내려갔다.
"그 목소리......"
"응, 병장님 목소리야."
문이 열리자 녹색 우산을 쓴 리바이가 미카사를 째려보고
미카사 뒤에 선 쟝을 흘끔 본다.
"뭐야. 똥이라도 싸나 했더니 둘이 같이 있었냐."
"헉... 병장님이 여긴 어떻게..."
"오늘 휴업이라고 써놨는데 어쩐 일이세요?"
"양산."
"네?"
"양산 사러 왔다."
"네에~~???"
리바이가 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끼고는 의상실로
서슴없이 들어오더니, 걸상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제일 예쁘고 비싼 걸로 갖고 와 봐."
* * *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11시.
지금쯤이면 일어났으려나.
아침은 홍차로 가볍게 때운 리자이가 웃돈을 주고 부른
마차를 타고 향하는 곳은 두말하면 잔소리인 여주의
외국인아파트.
원래 12시에 사무실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서 여주가 출발하기 전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방비 상태일 때 애인의 방문을 받으면 여자는 짜증이
난다는 걸 알 리 없는 연애 어린이 리바이는
서프라이즈로 나타나면 여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제멋대로 상상하며 혼자 음침하게 웃었다.
마부가 도착을 알리는 종을 울리자 약속대로 후한
삯을 지불한 뒤 서둘러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
비가 와서 아파트에 사는 꼬맹이들이 좁은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구슬치기 중이었다.
그때 리바이를 알아본 매튜가 "어어~!" 하고
리바이를 항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이, 애송이, 함부로 손가락질 하다 뼈 부러지고 싶냐"
하고 낮은 목소리로 겁을 주자
매튜가 겁에 질려 울면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바이는 한 번에 세 칸씩 날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문을 두드리자 "네, 나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종달새 같은 맑고 울리는 여주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리바이의 마음이 뛰었다.
현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리바이가 발을 들이밀고
여주를 포옹하려고 하는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간이침대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꼬마녀석과,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애송이 녀석이었다.
"하...... 이게 대체..."
"아... 리바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냐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리바이, 잠시만, 제 말 좀요."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 애인분. 이것 때문이에요."
포르코가 리바이의 눈 앞에 휙 하고 작은 자루를 들어
보였다.
누런 자루 안에 뭐가 들었는지 꿈틀거리다가 이내
찍찍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쥐?
"리바이, 아침에 집에서 쥐가 나왔어요,
제가 포르코 씨한테 좀 잡아달라고 부탁드린 거에요."
"네. 순수하게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
혹시 몰라서 단 둘이 있는 상황 피하려고 동생도 데리고
오길 정말 잘했네요.
안그랬으면 단단히 오해를 하셨을 거 아니에요?"
"하."
그러니까 쥐. 쥐가 나왔단 말이지.
그래. 젊은 아녀자 혼자 사는 집에 쥐가 나왔는데
당장 나를 부를 순 없으니 당연히 애송이를 불렀겠군.
리바이는 매우 짜증이 났다.
이해가는 상황은 맞는데,
어쨌든 저 자식하고는 엮이기가 싫었다.
왜 자꾸 알짱거려, 거슬리게.
"선생님은 저한테 거리를 확실히 두고 계시니
혹시라도 선생님한테 뭐라고 하진 마시죠."
"쥐 잡은 건 고마운데 쓸 데 없는 말이 많네."
"혹시 선생님을 못미더워 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연인간에 신뢰가 생명인데 지금 상황 가지고 언짢아
하면 그거 쪼잔해 보이거든요."
"볼 일 다 봤음 가 봐."
"그럼요. 벤, 가자. 선생님, 다음에도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아, 그리고 (수학책에 적어주신) 편지, 감사합니다.
그럼^^"
포르코가 싱글싱글 웃으며 벤을 데리고 사라졌다.
여주가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하하^^;; 리바이, 타이밍이 참..."
리바이는 팔짱을 낀 채 빤히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의심하는 건가 싶어
표정이 어두워졌다.
"외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침대 밑에서 쥐가 나왔어요.
문 닫고 그냥 나오려다가 쥐가 어디 숨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포르코 씨를 찾아간 거에요."
"그 애송이 이름인가봐?"
"네... 아까 같이 있던 꼬마가 그때 얼음물에 빠졌던
제 학생이에요. 벤 이라고... 벤의 배다른 형이에요."
"그 집안 서사는 알고 싶지 않다.
난 우리 둘의 이야기가 중요해."
"응. 화내지 마요. 응?"
"그리고, '편지' 라니? 편지도 써 주는 사이야?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그런 게 아니라... 수학 책에 화이팅하라고 써준..."
"됐고, 이리 와."
리바이가 인상을 쓴 채로 한 팔을 폈다.
여주가 다가가자 리바이가 뻗은 팔로 여주를 감싸안았다.
다른 한 팔은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근데 우리 12시에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비가 더 많이 내릴 것 같아서 내가 그냥 왔다."
"그치지 않을까요?"
리바이의 부상입은 무릎에 의하면 쉬이 그칠 비는
아닌 듯 했지만, 노인네처럼 "무릎이 아픈 걸 보니
비가 더 올 것 같구나 홀홀홀" 할 순 없으니까
리바이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여주의 이마에 쪽 하고 뽀뽀를 날리곤 들고 있던
꾸러미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뭐에요?"
"다음에 올 땐 빈 손으로 오지 않을 거라고 했잖냐."
안에 든 것은 정교한 수가 수놓아진 고급스러운 양산.
한눈에 봐도 값비싼 고가품이었다.
깜짝 놀란 여주가 양산을 펼쳐 보며 원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우와~!! 설마 내 선물?!"
"마음에 드나?"
"안들리가요!!"
몇 주 전 과학박람회에 갔다가 햇빛에 눈을 찌푸리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가 좀 전에 사온 선물이다.
원래 오늘 나들이 갈 때 쓰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비가 오니까,
다음에 줄 수도 있는 건데 여주의 기뻐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어 무작정 미카사네 의상실을 쳐들어간
보람이 있다.
"근데 비 오는 날에 양산이라니!"
❤ 내일 수능 잘봐! ❤
❤ 내일 수능 수고한 병사들에게 꾸금을 드리겠습니다ㅋㅋ 밤10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