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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의 사생활(38화)>




샤워 한 번에 그대로 지워진 동백나무.
물줄기를 타고 알록달록한 물감이 하수구로 흘러간다.


 "아깝네."

 "아쉬우면 앞에 다시 그려줄까?"

 "헉... 아니요."


온수와 냉수가 번갈아가며 나오는 샤워기 물줄기로
샤워를 하며 중간중간 깜짝 놀라는 두 사람.
얼른 샤워를 마치고 나온 둘은 난로 앞에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몸을 녹였다.


 "이 그림 내가 가져갈까? 너 보고 싶을 때 보게."

 "어, 안돼. 내 꺼에요."


잘 그렸긴 해도 집 어디에 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여주는 리바이의 그림을 벽장 안에 붙여 놓았다.


 "리바이 씨 작품인데 잘 간직할게요.
  당신은 내 그림 가져가면 되잖아요."

 "그건 내 얼굴이잖냐.
  그럼 너 보고 싶을 때 난 어떻게 하지."

 "음... 자주 보면 되죠!^^"


여주가 생긋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리바이가 못당한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타올로 여주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며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서 두 사람은 서둘러 뭔가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마침 토마토와 베이컨이 좀 있어서,
베이컨크럼블을 먼저 만든 뒤 토마토를 으깨어 라구
소스를 끓였다.


 "거기 월계수 잎 넣으면 좋은데."

 "어, 잠시만요."


리바이의 조언대로 월계수잎 말린 것을 추가하고,
면을 삶아 그럴듯한 스파게티를 뚝딱 만들었다.
둘은 이마를 맞대고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주 입가에 묻은 토마토소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엄지로 스윽 닦고는 제 입으로 쪽 빨아 먹는 리바이.


 "아, 아니, 그걸 왜... 먹어요."

 "간접 키스."

 "아 뭐야......."

 "그럼 직접 해주던가."

 "원래 이렇게 능글맞았어요? 너구리 같아. 아님 여우."

 "칭찬으로 들을게."


리바이는 접시를 닦으며 생각한다.
병단 내에서 결벽증으로 악명을 떨치던 자신이
좀 전에는 여주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닦아 빨아먹기까지 했다.
에르빈이나 한지가 봤다면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상대가 여주이기 때문인 걸까?
이제 진지하게 만남을 가지고 깊은 관계가 된 지 고작
한 달 반 정도인데,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주고 
곁을 내준 적이 있었던가.
나도 이제는 외로움을 느끼고 반려자를 필요로 하는
나이가 된 걸까.
그렇다면 그 상대가 그녀가 될 수 있는 걸까.
리바이는 아랫입술을 내밀어 위로 바람을 후 불었다.
그의 앞머리가 공중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왔다.
머리카락... 자를 때가 됐군.

설거지를 마치고 둘은 간이침대를 아예 확장시켰다.
침대에 반쯤 누워 여주는 작문시험지를 채점하고,
리바이는 여주의 다리를 배고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여주 집의 책들은 죄다 수업용이다 보니 딱히 읽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
아이들이 제출한 작문시험지를 구경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 리바이가 홱 하고 종이를 뺐다.
벤 갤리어드.
아까 왔던 그 건방진 놈 이름이 포르코 갤리어드랬지.
그 옆에 있던 꼬맹이의 시험지로군.




제목: 나의 꿈

나는 아빠, 엄마, 형, 나 이렇게 네 가족입니다.
가족은 나를 기여워하고 사랑해줌니다.
내가 자주 아퍼서 가족들이 나때문에 힘들 때가 만아요.
얼마 전에 어름물에 빠져서 죽을뻔 했는데 엄마가 만이
우셨습니다.
나도 죽는줄 알았는데 여주선생님이 도와졌습니다.
선생님은 생명의 운인(이거 맏아요 선생님?) 입니다.
나는 우리 선생님과 결혼하는 것이 나의 꿈이에요.
그런데 형도 나랑 꿈이 같다고 해서 요즘 형이랑 싸움니다.
나는 형도 좋고 선생님도 좋와서 
내가 선생님이랑 결혼하면 형이 슬프지만
형이 선생님이랑 결혼하면 선생님이랑 가족이 되는 것은
같으니까 내 꿈을 양보하기로 하고 사탕 100개 받을 것입니다.





리바이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허어... 이건 또..."

 "아, 하하하^^; 에이... 8살이에요 8살~!
  설마 8살짜리 꼬마한테 질투하는 거 아니죠?"

 "내가 지금 꼬마녀석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해?"

 "아... 형 얘기요? 애 말에 너무 의미부여하지 말아요."

 "애고 형이고 다 마음에 안드는군..."


여주는 포르코의 고백을 받은 사실을 리바이가 알았다간
뭔 일이 나도 단단히 나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커진다.
하아... 뭐가 이렇게 복잡하담.
그냥 리바이랑 알콩달콩 잘 지내고 싶은 게 단데.
포르코를 향해 마음이 두근거린 적도 없고,
정말 새까맣게 어린 동생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웃에 사는 같은 고향 출신일 뿐.
여주는 어떡하면 리바이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나
걱정이 든다.
당분간 아파트에 오지 말라고 할까?
아예 마주칠 일이 없게 내가 주로 가는 거야.
퇴근하고 사무실로 가거나, 그의 집으로 내가 가면
포르코와 리바이가 마주칠 확률이 낮아질테니.
그래야겠다.

여주는 벤의 시험지를 살짝 가져가서는 다른 시험지
밑에 얼른 숨겼다.
일감을 침대 밑에 내려놓고 리바이 앞에 마주하고 누워
리바이의 품에 쏘옥 안겼다.


 "식사하고 났더니 졸립지 않아요? 우리 30분만.
  눈 붙이고 좀 자요. 응?"


여주가 파고들자 리바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여주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후... 이리 와."


여주는 리바이의 팔을 목 뒤에 괴고 리바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씻어서 그런지 상쾌한 향이 그에게서 번져 나왔다.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위지만 함께 누우니
왕실에서 쓰는 호화로운 고급침대가 부럽지 않았다.
여주는 리바이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너 내가 한소리 할까봐 이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치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걸요.
  나한텐 자기밖에 없고, 다른 남자들은 전혀 눈에 차지
  않는단 말이야~ 알면서."

 "요 입."


리바이가 여주의 입술을 톡 하고 살살 때렸다.
알면서도 속아줘야지 별 수 있나.
연애에서의 더 약자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던데...
내가 너에게 이렇게 푹 빠져 버린 이상,
네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난 무조건 믿을 거야.
물론 거짓말이 아니겠지만.
아니어야 할 거고.
젠장...


                                  * * *


아까부터 간다 간다 말만 해놓고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 리바이.
현관에서 포옹하고 입맞추고 다시 포옹하고 입맞추고를
30분째 그러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오늘밤 여주의 집에서 자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이성의 방문까지는 가능하지만
숙박 '발견' 시 바로 퇴거 명령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둘.
게다가 오늘 저녁에는 궁정에서 여왕의 알현이 있다.


 "벌써 5시에요, 리바이. 어서 가요."

 "이따가 밤에 내 집으로 와라. 
  아니면 궁에서 여기로 널 데리러 올까?"

 "아이 참... 어떻게 매주 가요."

 "왜? 내 집인데. 누가 뭐래?"

 "그래두... 모리스 부인이 다 아실 걸요.
  내가 왔다 가면 침대시트며 타월이며 빨랫감이 확
  늘어나는데...
  다음에 갈게요. 오늘은 이만 가세요 리바이."

 "......"

 "5시 넘었어요. 비 또 오기 전에 얼른 가요. 
  어머, 밑에 마차 왔다. 어서!"

 
여주의 채근에 리바이는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는
인상을 잔뜩 쓰며 현관문을 나섰다.
6시에 히스토리아 여왕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여왕에게는 6살된 왕자와 10살, 8살의 공주가 있었는데
왕자가 리바이를 특히 따랐다.
리바이의 영웅담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가
리바이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흥분했다.
히스토리아는 가끔씩 리바이를 식사자리에 초대해서
아이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모임이 있는 날인 셈이다.
히스토리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생존한 상관이 리바이
이다 보니 리바이에 대한 마음은 특히 각별했다.
리바이는 귀찮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여왕의 부탁이기도 했고
또 여왕 직속기관의 책임자로서 여왕과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적이었기에 1년에 3,4번 가지는 이 자리를
마냥 피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회장에 리바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세
꼬마들. 
히퍼넌 왕자가 점프를 하다시피 리바이의 목에 매달리고,
조안나와 루이자 공주가 다리 하나씩을 차지했다.
졸지에 세 명의 아이들의 포로가 된 리바이.
뒤에서 히스토리아 여왕이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리바이, 아이들이 덩치는 작지만 귀찮기로는 
  거인 못지 않죠?"

 "하아... 그렇...군요."


제아무리 리바이지만 
여왕에게만큼은 경어를 쓸 수 밖에 없다. 
한때 104기 중에서도 꼴찌였고 꼬맹이었던
크리스타 렌즈, 아니 히스토리아 레이스 여왕은 
10년 새 성숙하고 우아하고 기품있는 레이디이자 
세 아이의 엄마다운 억척스러움도 지닌 채
리바이를 반겼다.


 "자, 얘들아, 리바이 병사장을 괴롭히면 초콜릿푸딩은
  사라진단다. 우선 자리에 모두 앉으렴."




세 꼬마들이 초콜릿푸딩이라는 마법의 단어를 듣는 순간
후다닥 식탁 앞으로 달려간 덕분에 리바이는 숨통이
트였다.
여왕의 남편인 존 러스킨 경은 3년 전 젊은 나이에
낙마로 세상을 떠서, 지금 히스토리아는 과부의 몸이다.
물론 재혼 계획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래서 오늘의 식사자리는 리바이, 히스토리아,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란한 다섯식구라고 생각할 법한 그림.
식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세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히스토리아 여왕은 빈민구제위원회의 업무
현황에 대한 보고를 듣는다.


 "그럼 예정대로 4월에 폐쇄를 진행하도록 하세요.
  임시 주거 타운의 범죄율은 줄어들었나요?"

 "아무래도 계도가 필요한 주민들이 상당수니 범죄는
  하루아침에 줄지 않겠지만...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건축허가나 서류절차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은 바로
  보고하도록 하세요. 지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오늘 와주셔서 고마워요, 병사장."

 "천만에요."

 "병사장이 아니라 회장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끼리는 괜찮죠?"

 "예... 뭐..."

 "참, 내년 교과서에는 리바이 병사장이 실릴 거에요.
  파라디를 위한 혁혁한 공을 세운 병사장이자
  총사령관으로서의 활약을 역사책에 넣기로 편찬위의
  전원찬성이 있었습니다."

 "하... 다른 조사병단들은..."

 "네, 물론 압니다. 
  리바이 병사장 뿐 아니라 너무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아니까요.
  저는 에르빈 단장의 희생도,
  한지 분대장의 과학에 대한 기여도, 
  그들 모두의 희생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잊지 않을 거에요. 
  차근차근, 하나씩 할 겁니다.
  추모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지을 거에요. 
  우선은... 리바이 병사장부터 시작하죠 ㅎㅎ"


이런 일에는 늘 적응이 안되어서, 
리바이는 멋적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교과서라니 하하... 
에르빈.
우리의 일들이, 내 이름이 교과서에 나온다는군.
우리의 그 시간들이 몇 줄 활자로 축약할 수 있는 걸까?
와인 한 모금을 넘기는데 오늘따라 뒷맛이 씁쓸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책에서,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전해지겠지.
나중에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될 테고.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는, 너희는, 
뜨거운 숨과 붉은 피를 가진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는데.
10여년 세월이 흐르고 벌써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이제는 역사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된
우리들의 이야기.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선 안될 우리들의 이야기.





※ 요새 며칠 아파서 못올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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