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0화를 나눠서 올렸는데 짐거가 썰어서...
두 개를 같이 합쳐 붙였음
❤ 원본은 ㅍㅌ 참조(큰 차이 없음. 요새 검열 꽤 촘촘)
- 리바이의 사생활(39화) -
리바이가 궁으로 향한 후 여주는
혼자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니 식욕이 생기질 않는다.
언제부터 누구랑 같이 먹는 것에 익숙했다고?
주중에는 어차피 혼자 있으니 그러려니 하다가도,
주말이 가까워지면 멀쩡하던 침대가 갑자기 휑하고,
혼자 먹는 식사가 고역이 되는 것이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지 한 달 남짓일 뿐인데.
이게 가능한가.
아닌가?
한참 뜨거울 때니까 이게 정상인 걸까?
작년 12월에 그와 어처구니없는 인연을 맺은 후로
이제 고작 두 달 반이다.
두 달 반만에 원수에서 연인이 되기까지,
정말 드라마틱하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어.
여주는 벽장 문에 붙여 둔 자신의 누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직도 실감이 안나는 이 현실을 곱씹어본다.
그때였다.
잘못 들었나?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시계를 보니 아직 7시.
리바이가 오려면 이른 시간일텐데.
토요일 저녁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거의 없다.
포르코는 내가 아직 리바이랑 같이 있다고 생각할텐데.
벽장 문을 얼른 닫고 현관으로 걸어가는 그녀.
"누구... 세요?"
"... 나야."
여주는 심장이 뛴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포르코가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전남편이라고 말하기도 사실 애매한.
전남친에 가깝지만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남자.
커다란 덩치에 안어울리게 착하고 쑥맥이어서
나랑 걷다가 손이라도 스치면 얼굴을 붉히던 남자.
첫키스를 한 날 고맙다(?)고 펑펑 울던 남자.
다정다감하게 나를 감싸주고 내 편이 되어주던 남자.
멋진 중저음으로 노래를 불러주던 남자.
라이너 브라운이었다.
현관 손잡이를 잡고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여주가
굳은 결심을 한 듯 문을 열었다.
그의 성정을 아는 나다.
나를 해꼬지하러 올 사람은 아니야.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열어줘서 고마워."
"...... 술 마셨어?"
"조금. 정신은 말짱하니까 걱정 안해도 돼.
들어가도 돼?"
"...... 들어와."
"고마워."
라이너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집안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여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를 내주었다.
190cm에 달하는 거구의 라이너가 의자에 앉자
의자가 힘겨운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놀래네."
"놀래키려고 온 거 아니라고 생각할래.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수소문 끝에 여기까지 왔겠지.
... 차라도 줄까?"
"고맙지."
여주가 홍차를 우려내는 동안 집안에 흐르는 침묵.
아까 리바이와 함께 있을 땐
아무 말 없이 그저 뒹굴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했는데,
지금의 침묵은 공기를 탁하게 만든다.
공기의 밀도 자체가 다르다.
머그잔을 받아든 라이너가 향을 음미하듯 코에 가져가
잠시 멈췄다가 호륵 하고 차를 마신다.
"어떻게 지냈어?"
"내 안부가 궁금해서 온 거 아니잖아."
"... 궁금하기도 했어. 물어볼 자격은 없지만..."
"당신은 어떻게 지냈어? 다른 학교 취직한 거야?"
"아니 아직. 한 학기 쉬고 가을 학기에 시작하려고."
"어디?"
"차차 알아봐야지.
스토헤스 구에는 안있을 거니까 걱정 안해도 돼."
"그래. 걱정 안해.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 어쩐 일로 날 찾아 온 거야?"
"외국인 맨션에 산다는 건 알았는데 정확한 호수는
몰랐어. 며칠 지켜보고 알았지.
본의 아니게 미행을 하게 되서 불쾌했다면 미안해."
포르코를 통해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한 여주는 가만히 라이너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었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뭐?"
"그때 너에게 너무 못되게 군 것이 두고두고 걸려서...
너는 그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니야.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잠시만. 그게 지금 날 찾아온 이유라고?"
"응."
"분명히 해두자. 사과야 변명이야?"
"... 둘 다야."
"왜 지금? 왜 이제와서?"
* * *
시간을 거슬러 6년전, 854년 봄.
퇴근을 준비하는데 교무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 어? 여기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젊은 교감이 군인들을 막아서려는 찰나,
앞장선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교감의 어깨를 후려쳤다.
깜짝 놀란 라이너가 달려나가 교감을 부축해서
일으키고는 항의하려고 하자
라이너의 관자놀이에 총구가 겨누어졌다.
라이너가 손을 천천히 들자
군인들은 라이너를 포함한 다른 남자교사들의 머리에
검은 천을 씌우고는 팔을 포박하여
운동장으로 끌고 나갔다.
영문도 모르는 채 두려움에 떨며 끌려나간
여섯 명의 남자교사들.
패닉 직전의 한 선생이 바지에 실례를 했다.
라이너는 외근을 나간 여주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날 저녁 라이너는 젊은 남자들만 모아놓은 수용소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대기조에 편성되었다.
어느 누구도 여기 이들을 끌고 온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용기있는 자들이 질문을 했다가 구타당하는 것을 본
라이너는 일단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틀 뒤, 난생 처음 듣는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에
다들 공황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훈련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이들에게
무작정 뛰쳐나가 누군지도 모를 적을 향해 돌진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외치고 대장 격인 남자가 사라졌다.
라이너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거인들의 진군을
보고 주저앉았다.
이건 꿈이야.
순간 종아리에 불에 데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며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습한
어딘가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라이너는 겁에 질린 동료 교사가 무작정 발포한 총탄에
맞아 기절했었고,
교감이 라이너를 지하 방공호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거인들이 온세상을 짓밟은 지 2주 가까이 지났다고 했다.
밖은 모든 것이 편평한 평지로 변해 있었고
자욱한 흙먼지와 안개와 건물들의 파편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가득한... 암흑 그 자체였다.
부상당한 다리를 질질 끌며 방공호 문을 열고 나간
라이너는 그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렸다.
공황장애와 발작으로 몇 달을 미치광이처럼 살았다.
다행히 총탄은 다리를 관통한 게 아니어서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본디 선하고 조금은 유약했던 라이너의 마음의 병은
쉽게 치유되지 못했다.
한 번 발작이 시작되면 교감과 다른 남자들 서너 명이
들러붙어서 사지를 붙잡고 혀를 깨물지 않도록 입에
재갈을 물렸다.
변변한 약도 없이 그렇게 그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 갔다.
처음에는 여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내를 찾던 그는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다.
자신이 분명 결혼했고 아내가 있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문제는 여주와의 추억이, 그녀의 얼굴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교감은 라이너를 다독이며 말했다.
"어찌보면 다행이네요...
난 매일 밤 가족들 얼굴이 꿈에 나오는데..."
사실 교감은 라이너의 부분기억상실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서 언제 돌발행동을
벌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라이너이니,
아내를 찾으러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객사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차라리 기억이 없다니 최소한
아내를 향한 그리움에 더 미쳐가지는 않을 것 아닌가.
결국 교감은 방공호 안에서 가족을 그리며 제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떠나기 전 진심으로 라이너를 부러워했다.
"차라리 나도 라이너 선생처럼 기억을 못하면 좋겠어요."
방공호에서 삶의 끝 직전까지 버티던 라이너는
어느 날 파라디 구호물자 보급팀의 한 군인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라이너가 먼지더미 속에 앉아 중얼거리는 것을 유심히
듣던 군인이 "혹시 당신, 교사요?" 하고 묻는 것이
발단이었다.
군인은 파라디의 대규모 교육사업으로 교사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상태라는 정보를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동료 교사 두 명이 라이너에게 밀항을
제안했다.
세 명의 남자들은 며칠 뒤 파라디 수송선을 타고 밀항,
항구에서 발각되었으며,
교사 중 한 명은 마레로 되돌려보내졌으나
다른 한 명과 라이너는 운좋게도 임시 주거증을 발급받아
2년 간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두 남자가 입항한 곳이 시간시나 구 근방이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시간시나 구 내 시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역시 자연스럽게 시간시나 구립초교로 발령받게 되었다.
2년 뒤 주거증은 연장되었고,
라이너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함께 했던 선생은 2년 뒤 월 로제의 학교로 발령받아
라이너를 떠나게 되었는데,
소문에 따르면 그는 교사 직을 그만 두고
레스토랑에 취업했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3년 만에 오너쉐프가 되어 해산물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4년 근속 후 파라디에서는 라이너를 임시거주자가 아닌
이민자로 분류, 정식 영주권을 발급해 주었다.
더불어 시간시나 구에서 안쪽으로- 스토헤스 구로
이주를 통보했다.
그리하여 859년 봄부터 그는 스토헤스 구립초교에
새로이 임지를 받고 근무하게 되었다.
스토헤스 구에 이주 후 그는 한 여성을 소개받았는데
자그마한 키에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인상의 착한
여자였다.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뭐랄까,
고향에 있는 것 같은 포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천생연분을 만난 거라며 지금이라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고 그를 격려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좋은 여성이었고, 같이 있으면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했지만,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자는 종종 라이너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라이너 씨, 어딜 보고 계세요?"
분명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데,
그녀는 종종 저런 질문을 던졌다.
라이너의 눈빛이 어딘가 모를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고 서운해하는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난감했다.
어느 날 그녀가 라이너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했을 때
라이너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상처를 받은 그녀는 울며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다.
라이너 본인도 답답했다.
아마 몇 년 전부터 그냥 습관처럼 끼고 있는 반지가
꽉 끼는 게 원인일 것 같았다.
결혼반지인 줄은 알았다.
라이너에게는 얼굴도 잘 기억 안나는,
추억이며 촉감이며 향기며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서류 상의 아내와 맞춘 반지라
딱히 뺄 생각도 못하고 살았는데,
아차 싶어 반지를 빼서 서랍 깊이 쳐박아 두었다.
다음날 먼저 여자에게 찾아간 라이너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몇 달 후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라이너가 30세, 여자가 33세로 연상이어서,
여자 쪽에서 결혼을 서두르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파라디에 무일푼으로 건너와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이
혈혈단신 외로이 지내던 라이너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혼은 내년 봄 쯤 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9월의 어느 날 저녁, 그녀가 라이너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비록 그가 결혼한 몸이기는 하나
마레의 얼굴도 기억 안나는 아내는 5년째 생사를 모르니
사실 문제될 것도 없는데, 그는 그날 밤 여자를 안으며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편은 상, 하로 나뉩니다)
- 리바이의 사생활(40화)-
다음 날 아침 여자가 눈을 떴을 때 라이너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여자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제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마치 안개가 걷히듯
무언가가 점점 선명해짐을 그는 느꼈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라이너는
이 여자가 왜 그렇게 편안하고 친숙했는지 깨달았다.
아내.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온 영혼을 다해 사랑했던 여주.
무려 5년이나 잊고 살았던,
나의 정신적 나약함에 생사조차 찾지 않았던, 외면했던,
나의 아내와 이 여자가,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내를 닮은 이 여자에게 끌렸구나.
내 무의식 속 파편들이 나를 아내에게로 처절하게도
이끌고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알았구나.
밀려오는 죄책감에 그는 눈물을 떨구며
터덜터덜 학교로 향했다.
"오늘부터 함께 하게 될 새 식구를 소개하겠습니다.
마레에서 오신 여주 선생님이에요.
다들 인사 나누시지요."
교장이 데리고 온 여자 교사를 본 순간 라이너는 그대로
도망쳤다.
5년 동안 뿌옇게 보였던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인 느낌.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왜 그녀를 잊었을까.
징집되던 날의 공포와 총에 맞던 순간의 고통,
눈 앞에서 거인들에게 밝혀 죽던 사람들의 절규,
몇 달 동안 두더지처럼 암흑 속에서 살며 맛보아야 했던
절망,
통증,
체념,
먼지,
동료의 자살,
잿빛 하늘......
그런 것들 때문에 나는 스스로 정신을 놓은 것이다.
비겁하고 무책임하게도 나는 스스로를 놓았다.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거짓 해방을 맛보았으니,
응당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하루만 일찍 나타나 주었더라면.
내가 나도 모르게 아내를 그리워하며
대용품처럼 취한 그 여자는 지금 내 침대에 있을 텐데.
라이너가 운동장 구석의 나무에 머리를 짓찧고 있을 때
달려나온 여주가 라이너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라이너 당신 맞죠! 오 세상에..."
라이너는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지금. 하필이면 왜 지금 나타나..."
그의 말에 여주는 얼어붙었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여주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라이너를 보면서,
5년 전의 다정다감했던 라이너는 사라졌다는 걸
여주는 깨달았다.
굳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이 여자는
라이너와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합의이혼에
동의했다. 별 대화도 없었고, 눈물도 없었다.
5년의 공백은, 그랬다. 덤덤했다.
라이너는 모아놓은 돈을 여주에게 위자료로 주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여주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고
지금이라도 다시 파라디에서 새로운 삶을,
새로운 신혼을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이너를 바라보며 핑크빛 미래를 꿈꾸는 그 여자를
배신할 만큼 라이너는 모질지 못했다.
무책임하게 행동한 건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공황장애와 발작도 두려웠다.
물론 여자에게도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긴 했지만 여주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주는- 독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시피- 위자료를
거절했다.
라이너를 찾겠다고 넘어온 파라디에서
너무도 가혹한 운명과 맞닥뜨려야 했던 그녀이지만
그 돈을 받게 되면 마치 자신의 5년의 기다림이 그냥
돈으로 상쇄되어 버리는 것 같이 될까봐 두려웠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알량한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대신 학교를 그만둬 달라고 요구했다.
그녀도 먹고 살아야 하니.
라이너는 순순히 여주의 요청에 응해 주었다.
위자료도 달라도 하면 기꺼이 주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시청에서 이혼을 위한 사진을 찍고 서류를
제출하고 법률적으로 완벽한 남남이 된 후,
라이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주에게 술 한 잔을
사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104기들이 거짓말로 "쟝을 꼬시는 꽃뱀 이야기" 를
늘어놓는 바람에 리바이가 술집을 찾아간 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이별주를 마셨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 고개를 떨군 라이너를
리바이가 쟝으로 착각한 나머지 여주를 쫓아갔다는...
우리들은 다 아는 이야기.
그게 오늘, 라이너 브라운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 * *
이야기를 다 들은 여주는
하하... 하고 기가 찬 웃음을 웃었다.
라이너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제서야 퍼즐이 짜
맞춰진 것 같았다.
서로가 다른 방공호에 피신해 있다가 몇 달 만에
먼지가 가라앉아 지상으로 나왔을 때,
여주는 방공호들을 수소문했지만 라이너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라이너가 정신이 피폐해져 숨어들어 있을 때였으니
적극적으로 여주를 찾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알던 라이너의 순하고 여린 성격이라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정신을 놓아 버릴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 후엔 밀항을 했고,
자연스럽게 백지화 되어가던 아내 대신
새로운 여자를 만나
어렵게 어렵게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에
전처가 나타났으니 혼란스럽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겠지.
"줄리 선생님한테 들었어.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고.
당신은 나 대신 선택한 그 여자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당신이 5년 동안 기억 저편으로 치워 버린
나에게 미안해서, 나랑 헤어지기로 마음을 정했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난 여전히 남편에게 잊혀진 이혼녀일 뿐이고,
당신의 그 여자는 내 대신 선택된 대용품일 뿐이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론은 그거잖아.
다른 여자가 생겨서 나랑 이혼한 것.
나는 그래도 여자 때문은 아닌 줄 알았는데.
여자가 있었네.
나랑 닮은 여자라고?
그렇게 말하면 "아~ 나를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하고 동감이라도 해줘야 하나?
라이너. 바뀌는 건 없어. 아무것도."
"알아, 내가 어리석었고, 비겁한 놈이라는 거.
내가 뒤늦게나마 너를 찾아와서 이런 고백을 하는 건,
'사실 내가 그렇게 나쁜 놈만은 아니야' 하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서가 아니야...
알량한 핑계를 속사정이라고 포장해서 늘어놓고
내 마음 편해지려고 온 것도 아니고...
다만..."
"다만?"
"꼭 말해주고 싶었어.
너를 기억하지 못했던 건
너와의 기억이 보잘 것 없어서가 아니었어.
그건 그냥 내가 비겁한 머저리여서,
내 정신이 그것밖에 감당을 못하는 등신이라서
그랬던 거야.
너를 붙잡을 수 없었던 건
내 사랑이, 마음이 그것밖에 안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담기에 너는 너무 아깝고 과분한 사람이어서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일부러 더 정떨어지게 말하고 상처줘서
날 떠나게 만든 거야,
절대로 네가 하찮은 사람이어서 널 무시하고
그렇게 상처준 게 아니야.
너는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너는... 너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야.
정말 미안해.
상처 줘서 미안해.
나같이 비겁하고 나약한 놈 때문에 너의 아름다운
시절을 낭비하게 해서 미안해.
그 말 꼭 하고 싶었어."
"... 그래. 알았어. 더 할 말 없지?
당신은 날 닮았다는 당신의 그녀에게로 돌아가.
그녀까지 잊으면 안되잖아?
난 당신의 축복대로 반짝반짝 빛나며 내 인생 살게."
"... 그 여자랑 헤어졌어."
"뭐?"
여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쏘아붙였다.
"뭐야. 잠깐동안이나마 그래도 당신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바보같잖아."
"네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는데 어떻게 그녀와 살 수
있겠어. 그녀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어."
"말은 번드르르 하지만 결국은 그 여자도 버린 거잖아."
"맞아, 쓰레기지."
"하아...... 뭐야, 라이너. 왜 그랬어.
그녀는 지켰어야지.
언제까지 스스로를 머저리라고 자책하며 살려고?
그냥 새롭게 살아.
우리에게는 다시 태어난 기회와도 같은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할게.
엎지른 물 주워담으려고 하지 말고 새 물 따라 마셔.
당신 말마따나... 나 당신 사과 받을 테니까.
우리, 새출발하자."
"새출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라이너가 그 단어에 반응했다.
"그래, 새출발."
"여주 넌... 새로운 연인이 생겼지?"
"...... 미행했다더니만.
당신 포르코 씨한테도 함부로 말했다며?
그냥 학생 가족이야. 당신도 아는 2학년 밴 갤리어드."
"내가 그 애송이 말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여주는 가급적 리바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포르코 쪽으로 주제를 돌렸는데,
라이너는 포르코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야.
나는... 가능하다면 그와 새출발하고 싶어.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짝을 찾기 바래."
"혹시 말이야."
"?"
"혹시라도...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는... 없는 거지..."
여주는 기가 막혔다.
설사 라이너에게 그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진심어린 사과를 받았다 해도,
둘은 이미 너무 먼 강을 건너 버린 뒤였다.
이제 와서 어떻게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겠어.
나는 이미......
"지금 이야기는 못들은 걸로 할게.
이제 그만 돌아가줬으면 해.
그리고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오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자.
나 나름 교사인 거 이 동네 사람들 다 아는데...
전남편 들락거린다는 소문 나는 거 원치 않아."
"아... 미안."
"그래도 용기를 내서 찾아와줘서 고마워.
우리의 이별이 작년에 이렇게 끝났더라면 아름다웠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
잘 가 라이너."
여주가 라이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이너는 물끄러미 여주의 손을 내려다 보더니 천천히
악수를 했다.
라이너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현관 앞에 선 라이너가 머뭇거리다가 뒤를 돌아
여주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수작을 더 걸어보려는 밍기적거림이 아니라
후회와 미안함과 슬픔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여주, 내가..."
"그냥 말하지 말고 가..."
여주가 라이너의 팔뚝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돌아왔어.
그 여정이 나는 너무 지쳤고,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어.
여기 와서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려 한
당신의 마음은 받을게.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러 와서 고마워.
하지만 우리는 그냥 여기까지인 거야."
라이너는 여주의 표정에서 절망을 읽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남들 보기엔 험악한 인상에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그였지만 여주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여렸던
그 남자를 여주는 마지막으로 살짝 안아 주었다.
"잘 가, 라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