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졸업하고 한국 들어와서 뭐 하고 있는지 질문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도서관에서 음식과 요리분야 전문 사서로 일하고 있다"고 대답하면 다들 놀라곤 하지요.
귀국하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제대로 터지는 바람에 '영어요리교실'이나 '음식분야 정보봉사'같은 건 못했지만
그래도 국내에 출판된 음식 관련 서적을 엄청나게 읽으면서 관련분야 선정도서 목록을 작성하고 주제별로 칼럼을 쓰는 건 재밌었네요.
요리책에 나와있는 요리를 따라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많고, 책에 대한 서평이나 요리 칼럼을 쓸 수 있는 사람도 많을테지만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해치우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시작은 일단 소소하게 팬케이크.
선정도서는 와카야마 요코의 "저울이 필요 없는 폭신폭신 팬케이크"입니다.
팬케이크라는 게 만들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약간만 추가적인 노력을 들이면 왠지 근사하게 보이는 메뉴지요.
다만 책에 엄청난 오탈자 - 베이킹파우더의 단위를 테이블스푼이 아니라 컵으로 표시한 것은 주의해야 하지만요.
마지 지음 "퇴근 후 한잔", 지콜론북 (2019)
추운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간단히 술안주 만들어서 한 잔 했다'는 표현은 왠지 멋있어 보입니다.
지친 몸이라도 편의점 술안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미학.
그리고 요리를 간단히 만들어 해치울 수 있는 능력.
맨날 골뱅이 소면만 해먹다가 골뱅이 볶음이라는 메뉴가 눈에 띄인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지요.
일운 지음 "마음 밥상", 모과나무 (2017)
사찰음식과 집밥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걸쳐있는 듯한 요리 에세이.
집에 남아있던 곱창김도 써먹을 겸 만든 김국은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계절에는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디톡스니 힐링이니 다 이거 한 그릇으로 해결되는듯한 기분.
박막례, 김유라 지음 "박막례시피"
성공한 할머니 유튜버의 비밀 레시피. 여러가지 요리가 실려있지만 1~2월달 주제가 집밥 만들기였던지라 그 중 간단하고 금방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간장국수를 만들었습니다.
애들도 먹을 수 있게 매운 양념은 빼고 만들었는데 인기 대폭발.
하긴, 달달하고 짭짤해서 단짠을 살린데다가 애들 좋아하는 '국수'다보니 분식집 메뉴마냥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이 있습니다.
최고의 집밥 레시피 201. 조미진 지음.
집에서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반찬 레시피북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집집마다 이런 책이 두세권씩 있었지요.
그중에서도 채소와 과일이 들어간 '사라다(샐러드 아님!)'를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이제니 지음, "고백을 하고 만다린주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중에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시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도서관 칼럼을 쓰면서 '아, 세상에는 배고픈 소설가 만큼이나 배고픈 시인들도 많았구나'라고 알게 됐지요.
뭐, 이제니 시인은 '배고픈 시인'이라기보다는 '사차원 소녀'가 더 적당한 표현 아닐까 싶지만요.
달콤울적한 만다린 주스를 읽고 나니 삘이 꽂혀서 만든 100% 신선한 오렌지 주스.
하지만 지갑은 협조를 하지 않네요.
채만식 지음 "산적". 이상의 "100년전 우리가 먹은 음식, 식탁 위의 문학기행" 중에서
올해의 칼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 산적 에피소드 아닐까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면서 잃어버린 것과 새롭게 얻은 것을 비교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례상에 올리고 남은 퍽퍽한 산적과는 달리, 제대로 만든 산적은 맛있다는 걸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입니다.
헤밍웨이 지음 "심장이 두 개인 큰 강".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헤밍웨이 단편선2" 중에서
통조림 깡통 두개를 섞어서 끓인 후 토마토 케첩만 뿌린 것을 요리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캠핑 가서 무쇠팬에 끓여먹으면 왠지 엄청나게 맛있게 느껴질 것 같기는 합니다.
이번에는 좋은 시골 풍경 대신 헤밍웨이의 소설을 앞에 두고 먹었지만요.
안도현 지음 "스며드는 것",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중에서
인터넷에서 유명한 간장게장시를 읽고 나서 '언젠가 한 번은 간장게장을 만들어 봐야겠다'라고 다짐했는데
칼럼 쓰는 것을 핑계삼아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뭐, 유명한 간장게장집의 맛을 따라가기엔 멀었지만 가격만큼은 훨씬 저렴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조원진 지음, "실용 커피 서적". 따비 (2019)
어떤 계기로 요리를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사실 그 시작은 요리가 아니라 커피와 허브티가 먼저였습니다.
분류로 따지면 음식이 아니라 차,음료 카테고리였지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오래간만에 불붙어서 에스메랄다 게이샤를 생두로 사서, 핸드 로스팅 해서, 핸드 그라인딩 해서, 핸드 드립으로 뽑아마셨습니다.
음... 개인적으로는 블루마운틴이 더 입맛에 맞아요. 일본애들이 거품을 부풀려놔서 자주 못먹는게 한이지만요.
류지수 지음, "오늘은 홈술".
홈텐딩 (홈+바텐더) 하려면 번쩍번쩍 빛나는 홈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런 으리으리한(?) 홈바를 가져봤던 입장에서 말하자면 다 부질없습니당.
이 책에서처럼 말리부에 쌕쌕 주스 깡통 하나 따고 쌕쌕 아이스바 하나 꽂아서 휘휘 저어주면 칵테일 만들어 먹는 게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시작해서 욕심나는 술 하나 둘씩 사놓다 보면 어느 새 으리으리한 홈바를 갖게 되지만요. 그리고 텅텅 빈 지갑도.
황헌 지음 "와인잔에 담긴 인문학"
와인과 관련된 책을 다루는데, 그렇다고 제가 직접 와인을 만들어 마실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와인 수업 들으며 찍었던 사진을 써먹었습니다.
확실히 와인을 마시기 전과 마셔본 후에 보는 와인 서적은 완전히 다르게 보이네요.
나가타 유이 지음 "달걀과 빵은 맛있어"
만화책에서 "그 카페의 달걀 샌드위치 맛의 비결은 수제 마요네즈였다"라는 구절을 읽은 후 처음으로 마요네즈를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한 술 더 떠서 달걀과 빵이라는 주제로 책 한권을 썼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고수나 괴수들은 많달까요.
린 히로코, "병 샐러드 레시피".
뉴욕 스타일 병 샐러드라고 커다랗게 써놨는데, 정확히 말하면 "돈없는 뉴욕 대학생 스타일"입니다 ㅎㅎ
미국에서 대학 다니면서 유리병에 파스타 채워넣고 다닌 경험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본식으로 한 번 어레인지 되니까 무슨 센트럴 파크 뉴요커 스타일로 화려하게 바뀌네요.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 센트럴 파크 잔디밭 위에서 스타벅스 커피 곁들여 먹을법한 느낌입니다.
뭐, 실제로는 가판대에서 핫도그나 기로스 사먹는 게 대부분입니다만.
에밀리에 페렝 지음, "냄비 파스타"
원 팬 파스타, 원 팟 파스타가 유행이라서인지 이런 책도 읽게 됩니다.
냄비 하나로 모조리 끝내버리는 파스타 요리법.
큰 틀만 놓고 보면 오뚜기 스파게티 삶아서 유리병에 든 소스 부어 볶아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생크림 약간, 바질 페스토 한 숟갈이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거 한 번 만들어 준 뒤로 입맛이 고오급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툭하면 "그냥 스파게티 말구요, 맛있는 스파게티 있잖아요. 그거 만들어 주세요"하는 바람에 좀 귀찮게 됐지만요.
이지연 지음 "로푸드 스무디"
ABC 주스를 맨날 사서 먹다가 이 책 읽고 나서 직접 만들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까이꺼 그냥 재료 다 블랜더에 넣고 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껍질 까서 잘게 자르고 비율 맞춰서 갈고 일회용 파우치에 옮겨 넣는 과정을 몇 번씩 반복하는게 꽤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도 사먹는 것보다는 훨씬 걸쭉한 느낌 때문에, 그리고 냉동실 꽉 채운 ABC주스의 뿌듯함 때문에 종종 귀찮음을 무릅쓰고 작업을 하게 됩니다.
미야시타 나츠 지음, "바다거북 수프를 끓이자"
작가들 중에는 글 잘쓰는 사람도 참 많고, 음식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사람도 엄청 많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마침 후리카케(밥가루) 이야기가 나오길래 하루에 한봉지씩 꼬박꼬박 쓰는 밥가루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좀 오래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다 먹어버린 건 예상 밖이었네요.
역시 직접 만든 음식을 먹어치우는 속도는 훨씬 더 빠릅니다.
김광연 지음 "밥 먹는 술집을 차렸습니다"
제주도에서 탄생한 일본식 꽁치 통조림 파스타.
이름만 들어도 왠지 비린내가 물씬 풍길 듯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참치 통조림 파스타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통조림 깡통에서 꺼낸 꽁치 조각을 또 굳이 모양 살려가며 조심조심 구워서 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또 그만한 값어치는 하는 맛입니다.
분위기 좋은 '밥 먹는 술집'에서 술 한잔 옆에 두고 먹으면 더 맛있겠지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토끼정".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중에서
음식 이야기 맛깔나게 하는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무라카미 하루키.
개인적으로는 그중에서도 토끼정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야말로 누구나 한번쯤 꿈꿔볼만한 환상의 음식점이죠.
그래서인지 같은 이름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곳곳에 들어서는 걸 보면 뭐랄까, "내 추억과 환상을 깨트리지 마!"라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직접 만든 크로켓이 어마무시하게 맛있냐 하면 꼭 그런것도 아니지만요.
김훈 지음, "연필로 쓰기"
오래간만에 만들어 본 궁중떡볶이.
아주 오래 전, 부모님께 만들어 드린 궁중떡볶이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입니다.
작가의 추억, 내가 가진 추억, 음식 자체의 역사가 뒤섞이면 같은 요리라도 훨씬 더 맛있어지지요.
제니 린포트, "호모 코쿠엔스의 음식 이야기"
벌꿀 과자를 만들 때 들어가는 꿀의 양은 총 중량의 25%.
한 달에 주말이 8일이니 이 또한 대략 따져보면 25%.
즉,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과 꿀 빠는 날의 비율은 25%가 적당하다는 하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 우주의 신비가!
윤덕노 지음,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전직 미국 대통령도 먹었던 스팸 무수비.
먹을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잘 구운 스팸과 흰 쌀밥의 조합은 치트키입니다.
주먹밥류는 꾹꾹 눌러서 만들다보니 밥이 한도끝도없이 들어갑니다. 만들때마다 놀라게 되지요.
스팸 한 캔이면 밥 한 솥을 다 털어서 무수비를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김정호 지음, "조선의 탐식가들".
요리 관련 도서를 많이 읽다보면 예전에는 몰랐던 지식을 접하게 됩니다.
순채라니, 연못에 둥둥 뜬 개구리밥이나 연잎 사촌쯤 되어보이는 풀떼기가 이렇게 취향 저격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죠.
임금님도 자주 먹던 음식인데 환경 오염으로 인해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남원상 지음, "지배자의 입맛을 정복하다"
마지막 메뉴는 조금 독특한 "차나 마살라".
번역하자면 인도식 병아리콩 커리인데, 칼럼 하나를 통틀어 '커리가 왜 인도 음식이 아니라 영국 음식인지'를 써놓은지라 인도 커리라는 말을 쓰면서 약간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음식을 둘러싼 국적이나 이해관계는 둘째치고, 일단 재료가 구하기 쉬운데다가 여기저기 써먹기가 좋아서 자주 해먹을만한 메뉴입니다.
"밥이 맛있기만 하면 되지 굳이 역사까지 알아야 하나"라는 사람도 있지만, 똑같은 밥이라도 역사와 배경을 알면 더 맛있어집니다.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는 아무리 맛있게 요리해도 혐오스럽고, 퍽퍽한 옥수수빵은 한국전쟁 이후의 원조 식량으로 만들어 먹은 역사를 섞어 먹어야 맛있듯이 말이죠.
그리고 제 칼럼 역시 음식을 먹으며 그런 '공짜 향신료'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지금까진 반응이 꽤 좋아서 다행입니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맛있는 음식들이 위안을 주었듯
내년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축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ps. 크리스마스 쿠키 영상 챌린지도 진행중입니다. 한 번 보시고 마음에 들면 좋아요도 한번 눌러주시면 감사~ https://youtu.be/_0uEVzNw2v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