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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걸리신 할머니와 저의 27살 평생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후회 |2022.03.12 07:27
조회 987 |추천 4
아주 긴 글이 되겠지만 본인 기록용으로 작성해보겠습니다. 참고로 현재 제 나이는 27살이며 대학생입니다. 요점부터 보려면 '이제 본론이다.' 부분 부터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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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아주 오래된 기억은 부산 사하구 학장동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형과 넷이서 아파트에서 지냈다.
유복하진 않지만 화목한 가정이었고 오순도순 잘 지냈다. 하루는 엄마가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 갈때 이불 밑에 숨어서 '나 어딨게' 하니 발로 살짝 밟으며 'ㅇㅇ이 어딨지~' 하면서 장난친적도 있다. 
그리고 어릴적 유독 짱구를 좋아했는데 DVD방에서 짱구 비디오를 빌려 자주 보았다. 그러다가 액션가면의 가면을 받은적이 있는데 그 가면을 쓰고 엄마 아빠에게 가서 '와하하하하' 하며 액션가면을 따라하니 아빠가 바지를 내리며 '액션가면은 팬티만 입고 있다' 하며 놀려서 창피해서 도망친것도 생각이 난다.
또 아빠가 유난히 게임을 좋아해서 엄마 아빠와 함께 당시 닌텐도64로 슈퍼마리오64를 했던 기억도 난다. (이 후 중학교 1학년 무렵 닌텐도DS로 슈퍼마리오64가 리메이크 되었는데 엄마 아빠와의 추억이 생각나서 서럽게 운 적이 있다)
그러던 중 5살이 되었을때 엄마와 아빠가 크게 다투었는지 큰방에서 문을 잠그고 우는 엄마에게 아빠는 방문을 발로차 문이 부셔질정도로 다툼이 있었던게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엄마는 집을 나갔고 가끔 매주 토요일정도에 가끔 얼굴을 보러 오다가 이후로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와 형과 셋이 지낼때도 괴롭진 않았다. 아빠가 가끔 용돈을 주시며 형과 함께 오락실에서 놀거나 놀이터에서 놀았고 집에 컴퓨터도 있어서 심심하진 않았다.
그러던 중 내 기억상 형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학교에 들어간것으로 기억하고 나는 삼X웅변미술학원 이라는 곳에서 유아반으로 수업을 받은것으로 기억이 난다.
시설 특성상 집엔 내가 먼저 들어왔고 텅 빈 집에서 모두를 기다리며 혼잣말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머릿속 나 자신과 마음속으로 혼자 대화하고 세상은 나의 중심이고 주변사람들은 NPC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빠가 힘들어했을거라 생각했던 사건이 터진다.
평소처럼 나는 집에 있었고 형은 학교에 다녀 왔을때다. 그날따라 아빠는 집에 있었고 방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혼자서 매우 심심해서 형과 오락실에 가고싶어서 아빠의 지갑을 열어 대충 종이로 된 돈을 꺼내서 형이 오자마자 오락실에 갔고 집에 들어와서 아빠에게 들켜서 크게 혼난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지않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고 나의 다사다난한 인생이 시작된다.
할아버지는 2000년도 정년퇴임한 교장이었고 집에 오자마자 7살짜리인 나에게 엄격하게 가르치 교육하였다. 
7살짜리에게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 나눗셈까지 시키며 공부시켰다. 나눗셈은 어려워서 몰래 전자계산기를 사용하여 푼게 생각난다.
아빠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오징어 간식으로 유명한 한X식품에서 근무하였다.
유년기는 대충 이렇게 마무리 된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할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져갔다.
매일 5장 (20x5 대략 100문제) 가까이 되는 분량의 총정리집을 풀이 시켰다.
물론 예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배우지 않은 내용인데 총정리집의 요약본을 보고 스스로 익혀서 문제풀이를 시켰다. 물론 해답지는 할아버지가 보관하여 채점하였다.
당연히 크게 요약된 부분이 많아서 오답이 많았고 어느정도 틀린 문제가 많으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요약집을 중심으로 설명 - 문제풀이 가 아니라
요약집을 보고 문제풀이 - 오답에 대한 설명 . 이런 학습이 되었다.
하지만 난 조부모님에게 맡겨진 초등학생이었고 이러한 교육을 중학교 2학년때까지 계속 받았다.
한가지 크게 도움이 되었던건 9살때부터 한자교육을 시켜줘서 9살때 한자능력검정시험 5급을 취득하였는데
이는 두고두고 크게 도움이 되었다.
교육방법이 지금 되뇌여서야 마음에 안든다고 투정하지만 확실한건 당시 성적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하지만 취미생활은 있을수가 없었다. 어릴때 매일 반복되는 100문제 풀이가 끝나면 TV를 보거나 놀수있게 해줬는데 난 A4용지를 반으로 접어 만화를 자주 그렸다.
무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화를 보는것이 아닌 창작하는 것은 행복함 그 자체였고 9살 10살짜리 꼬맹이 그림이 다 그렇듯이 잘 그리진 못했지만 선생님들은 내 만화를 보고 아이디어가 매우 창의적이라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하지만 집에선 달랐다. 만화 그릴시간있으면 공부나 해라, 이런건 어른이 되고 나서 해라며 내가 그려왔던 만화들을 모두 찢어 버렸고
혹여나 만화를 그리다 걸리면 종이가 아깝다며 만화를 그리다 걸리면 크게 혼을 냈다.
당시 내가 혼이 날때는 말로 타일러지거나 작은 회초리로 맞는것이 끝이 아니라
매우 크게 혼이날땐 뺨따귀를 맞고나 발로 차이고 500원짜리 동전 굵기만한 곤봉으로 후려 맞기도 했다.
그때 나이가 9살이었다. 체벌 이유는 '문제를 많이 틀려서' '만화를 그려서' '학교마치고 집에 바로 오지 않아서'
나는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때 운동장에서 뛰어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면 유난히 심각하게 혼이 났고 학교, 집, 학교, 집 만 반복하게 되어 몸도 왜소해졌고 운동은 물론 누구와도 축구를 한 적이 없어서 성격도 소심해지고 내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할머니께서는 자주 화를 내시진 않았지만 내가 잘못을 하거나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니 애미한테 가라, 니 애미 찾아가라, 니 애미도 니 버렸다.' 이런 말들을 하셨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초등학교 6학년때는 은사님을 만나 공부에도 흥미가 생기고 일기를 쓰면서 나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들을 적고 선생님의 생각을 나눠 들으며 정서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때부터 있던 습관인 나 자신과의 대화는 그 무렵 잦아들었고 세상은 나 중심이다 라는 그릇된 사고도 없어지게 되었다. 아마 사춘기가 와서 그랬을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지옥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뺑뺑이로 배정받은 학교에선 친한 친구가 한명도 없었고, 같은 반에는 불량 학생들이 많아서 매일 매일 학교폭력을 당했다.
지금 TV나 영상컨텐츠에서 나오는 사소한 폭력이 아니라 웹툰에서 나오는 폭력들이다. 수업을 받고 있으면 뒷지리에서 주먹을 세워 등을 피멍이 날 정도로 가격하였고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로 차이고 교과서들을 찢었고 말투가 맘에 안든다며 내 수행평가 과제들을 모두 찢어버려서 성적도 나락으로 기고 선생님들에게도 혼이 났다. 선생도 내가 폭력에 당해서 제출 못한거 알면서 신발새끼들 ㅋㅋ
해당 폭력은 2학년엔 더 심해졌다. 하루는 복도를 지나가다가 일진들이 공을 차고 놀고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미들킥을 날려서 갈비뼈에 금이 갈 정도였다. 당시에 해당 폭행을 당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보건실에 가니 엑스레이를 찍어보라고 권유하였고 그렇게 엑스레이를 찍어서 금이 간걸 알게되었다.
보건선생님은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었고 해당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담임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가해자에게 왜 때렸냐고 물어보니 'ㅇㅇ(본인)이가 우리가 공차고 놀고있는데 갑자기 우리 공을 걷어차서 그랬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일진들 공을 발로 걷어 찰수가 있지? 웃긴건 담임은 30대 남자 체육교사였는데 가해자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나의 병원치료비도 받아 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은 동급생의 폭력이 광범위하게 지속되어서 해당 학생에게 폭력을 당한 같은반 피해학생 (대략 6명)의 서명을 받아 '본인들은 이 학생에게 폭력을 당했습니다. 조취를 취해주세요'라고 탄원서를 담임에게 드리니 한다는 짓이 반 학생들 모두가 보는 종례시간에서 서명을 한 피해학생들은 교탁으로 모두 불러세워서 가해자에게
담임 "야 니 얘네 때렸나."
가해자 " 아니요"
담임 "장난친거제"
가해자 "네"
담임 "사과해라"
가해자 "미안"
이러고 끝이었다. 온가족이 끔찍한 사고를 당해서 사지가 찢겨서 죽었으면 좋겠다 그 담임 신발새끼는
이 일 이후로 어른들을 믿지 못하여서 당시 학교에서 나를 포함해 약한 학생들을 패고 다니는 일진이 있었는데 내가 총대메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당시 아빠가 보호자로 동행해서 아빠도 기억할것이다. (부모님한텐 알리지 않는다고 경찰이 약속해서 신고한건데 ㅋㅋ)
해당 학생과 학생의 보호자를 경찰서로 불러서 주의조치를 취했고 이후 학교전체엔 경찰의 주최로 학교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설문지를 돌린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고내용은 익명처리가 되지 않았고 교무실로 불려가서 가해자의 담임과 우리의 강아지 담임에게 왜 선생님들한테 말하지 경찰에 바로 신고를 했냐고 질책을 당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바르게 살아가면 내가 내 손으로 죽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에
일진들에게 기생을 하기 위해 담배를 배우게 됐다. 
그러던 무렵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다.
생략이 됐지만 나는 학교에선 위와 같은 생활을 하고 집에서는 요약본을 보고 스스로 공부하는 일상을 반복해왔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오게 됐고 '할아버지'라는 억제기가 사라지고 나서는 말그대로 고삐가 풀리게 된다.
물론 돌아가시고 매우 슬펐다. 충격도 컸고 다시는 평생 볼수 없다는 암흑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꿈을 꾸면 괴로움에 설치다가 잠에서 깼다. 나의 학창시절 일상이 그만큼 악몽같았다는 뜻이다.
고삐가 풀리게 됐지만 큰 일탈행위는 없었다. 일진들에게 기생하고자 배운 담배는 물론 가장 큰 비행 행위였다.
하지만 담배를 나눠피며 그들과 친해진 이후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병신같은 중학교 시절이 마무리된다.
여담으로 다들 알겠지만 학교엔 유난히 컴퓨터를 잘 다루는 학생들이 있었을것이다. 당시 우리학교에선
'포맷셔틀'이라고 불렸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의 컴퓨터를 고쳐주거나 휴대폰에 노래를 넣어주는 사적인 일도 도와주며 싸바싸바를 했던 포지션이 있었다. 그것이 나였다.
포맷셔틀의 특혜는 매우 컸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당시 우리학교 교무실엔 나이가 많은 교사들이 많았다.
특히나 학년부장 선생님이 나를 자주 불렀는데 수업시간에도 나를 불러서 한글 문서에서 규격오류가 난다며 도와달라고 하며 호감을 얻게 되었다.
첫번째 특혜는 위에 말한 흡연 문제이다. 학교에서 일진들에게 기생하기 위해 담배를 나눠주었는데 나눠받은 강아지가 꾀병으로 조퇴를 하고 뒷문에서 담배를 피다가 걸린것이다. 근데 내가 준것이라고 불어 버려서 선도위원회가 열릴 뻔했는데 해당 선생님이 묻어 주셔서 마무리 되었다.
두번째 특혜는 내가 컴퓨터를 잘 다루는것을 좋게 본 여러명의 선생님들이 나를 '게임과학고'에 입학할수있는 학교장추천서를 써주셨다.
이것은 내 인생이 바뀔수있는 계기였을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에서는 맨날 '돈 없다 돈 없다 돈 없다 돈 없다' 할머니께서 돈 없다는 말만 되뇌이셔서 우리집은 정말 돈이 없는 가난한 집인줄 알았다.
게임과학고는 학기당 학비가 30~50만원 정도 드는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우리집에 돈이 100만원도 없을것이라 생각을 하여 비싼 학비를 부담하게 하고싶지 않아서 해당 추천서를 포기하고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부산의 명물 똥통 학교인 컴퓨터과학고에 입학하게 된다.
중3과 고1사이. 정확히 고1 3월즈음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낸 뒤에 내 인생 두번째 불행이 찾아온다.
아버지께서 당시 한X식품을 그만두시고 삼X수 생수 배달하는 일을 하셨는데 전에 뇌출혈로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무거운것을 드는 일을 하시다가 몸에 무리가 컸는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게 된다.
뇌경색엔 골든타임이 있다. 그런데 아빠는 병원가기를 싫어했던것같다. 몸에 그정도의 무리가 오면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당시 아빠가 술을 먹고 집에 왔을때 거울이 깨지고 화장실 수건걸이가 휘어진 적이 있었다. 아빠는 당시 부정했지만 아마 몸에서 신호를 보낸게 맞을것이다.
결국 그것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골든타임을 놓쳐서 반신마비의 장애를 가지게 된다.
수술 후 아빠는 약 반년정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할머니는 병원에 상주하며 아버지를 간병하셨다.
형은 나만 있는 집에 여자친구를 데려오더니 어느 순간 집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33평의 큰 집엔 나 혼자 지내게 되었고 할머니는 주말쯤에 한번 오셔서 청소를 해주고 밥을 해주시곤 하였다.
당시 나의 패턴은 아침 6시반에 기상 - 씻고 7시 2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등교 - 오후 5시 하교.
텅 빈 집에서 알람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하교 후 캄캄하고 차가운 집에 홀로 불을 켜고 혼자 밥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잠에 들곤 하였다.
물론 할머니도 아빠도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것이다. 할머니는 아침에 잘 일어났는지 전화를 해주셨다.
그렇지만 혼자 그런 일상을 반복하니 학교가는것이 즐겁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똥통 학교라서 제대로 된 수업을 듣는 학생은 극소수였고 복도에서 담배를 피는 학생들도 많았으며 교사들 상태도 살짝씩 맛이 가있었다.
그래서 1학기를 다니고 할머니와 상의하여 자퇴를 하게 된다.
자퇴후에 멘탈이 나가서 심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더 심각해졌고 혼자 고민 끝에 엄마를 찾아가기로 한다.
자녀는 이혼여부에 상관없이 초본을 뗄수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동사무소에서 엄마의 이름으로 초본을 떼니 별다른 서류 없이 엄마의 주소를 얻게 되었다.
엄마는 우리집에서 대략 2시간정도의 거리인 다대포에 살고있었고 번호도 없이 주소 하나만 가지고 무작정 찾아갔다.
막상 주소지에 도착하고나서는 딱히 할수있는것이 없었다.
해당 주소의 호수의 초인종을 누를 용기도 없었고해서 무작정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두시간정도 지났을 무렵 뭔가 내 어렸을때 모습을 쏙 빼닮은 5살~7살정도 돼보이는 여자아이가엄마가 사는 동으로 들어가길래 나도 뭔가에 홀린듯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털르 내리길래 따라 내려서 복도에서 지켜보니 엄마가 사는 호수의 초인종을 눌렀고 나와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서 무슨 상황인지 생각을 할 무렵 내 또래의 남자와 나를 닮은 여자아이가 같이 건물 밖으로 나왔고 멀리서 트럭을 운전하던 남자와 여자가 여자아이를 반겼다. 멀리서 봐도 알수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여자는 내 마지막 기억보다 부쩍 살이 찐 엄마의 모습이었다.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엄마는 재혼을 하였고 시기상으로 엄마는 별거만 하다가 서류상 내가 9살때 합의이혼을 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낳은 아이가 그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나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고 그래도 용기를 내서 편지지를 사서 나는 잘 살고있다 이혼한거같은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지만 괜찮다면 연락을 달라며 번호를 남겨 우편함에 넣어놓았다.
며칠이 지나고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아닌 큰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들어보니 엄마가 우편함에 편지를 발견했는데 내가 편지봉투에 아무것도 적지 않아서 남편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편지 내용을 본것이다.
남편은 엄마에게 아직 옛 자식이랑 연락을 하냐며 의심을 하였고 나와 연락을 할수없게 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모가 대신 연락을 하였고 인천에 사는데 한번 오지않겠냐하여 가게 되었다.
가서 나는 아빠와 엄마가 왜 이혼을 했는지 듣게 되었다. 아빠는 당시 일을 한다며 나가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월급이라 속이다가 걸렸다고 한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경제적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무렵이 부부싸움을 하며 방 문을 부셨을때인거같고 엄마는 집을 나와서 큰이모가 마련해준 집에서 거주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 죽으려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생각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연히 이런 얘기를 해주지않았고 아빠는 아빠가 잘못을 해서 이혼을 한것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마를 미친년, 자식을 버린년이라며 나쁜 사람으로 세뇌시켰고 욕을 할때마다 니 애미 찾아가라며 욕한것이었다.
솔직히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빠도 원망하진 않는다. 나쁜사람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으면 어린 우리가 그리워 할것이였고 아빠의 경제적인 부족함도 당시에 IMF가 지나간 힘든 시기였으며 엄마가 떠나간 후에도 일을 하여 우리를 키웠기때문에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모가 그 후로 하는 얘기는. 내가 실업계 학교를 다닌다고 말하니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서 인문계에 갈줄알았는데 실망스럽다는 말들이었다.
그럴만도한게 이모부는 대형항공사 기장이였고 집도 엄청 컸으며 사촌형은 SKY급의 명문대를 다니고 사촌누나도 이화여대에 합격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재수하고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집에 돈이 없는줄알고 전문계학교 진행을 포기했는데 비참함에 차마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그러곤 연락하지 않았다.
동일한 나이인 17살 명절이었다. 고모와 고모부, 고종사촌들이 큰집인 우리집에 찾아왔다.
사춘기가 되고 딱히 교류할일도 없고 친하지않아서 나는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밖에서 치킨을 사와서 다같이 먹는 소리가 들렸다.아무도 나에게 권유하지않아서 서운해서 친구를 불러 근처 공원 정자에서 담배를 피고 맥주를 한캔 마시켜 얘기를 하다가 집에 왔다. 집에 오니 고모부가
"니 술마셨나?"
'아니요'
"담배폈나?"
'아니오'
추긍을하자 본능적으로 나는 거짓말을 하였고 술에 취한듯 보인 고모부가 날 제대로 잡았다면서
맞짱 뜨자 (실제로 한 말)며 나를 주차장으로 끌고갔다.
집에서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참고로 고모부는 직업군인 (중령) 이었고 주차장에 가자마자 머리끄댕이를 잡고 바닥에 수차례 내려꽂으며
"야이 신발새끼야 니같은 개 양아치새끼는 걍 집 나가서 니 좋아하는 친구 따라서 영영 꺼지던가 아예 나가서 뒤져버리던가 해라. 니같은 새끼는 아무도 가족이라 생각안한다 이 양아치새끼야. 니 맨날 학교에서 친구 때렸을거 아니냐, 니도 쳐맞아봐라 나는 니를 조카라 생각안한다 신발새끼야"
라며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그리고 꺼져라 신발새끼야 니 지갑으랑 휴대폰 들고올테니깐 기다려라. 라고 하며 집에 들어가자
이미 휴대폰을 들고 있던 나는 무작정 그 자리를 도망쳐갔다.
그 후로 여자친구와 동거하던 형네 집으로 찾아가 돈을 빌려서 혼자 모텔에서 지냈는데 하루뒤에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와서 고모부 돌아갔으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셔서 집에 들어갔다.
물론 지금까지도 고모부는 그 일을 모른척하며 사과 한마디 없다. 국방부에 민간인폭행으로 신고를하고 상처 그대로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하려고 했지만 나와의 사이뿐만 아니라 아빠랑 할머니도 원망을 살까봐 그냥 참았다.
그렇게 자퇴후 몇개월정도 집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다가 할머니의 동생이신 이모할머니께서 한 학교를 추천해주신다.
그 학교에서 컴퓨터를 배우면 좋을거같다며 추천해주셔서 나도 피폐한 일상을 바로잡고자 입학을 결심하게 되고 들어간곳이
논산의 자랑 어메이징 똥통학교 인터넷고등학교다.
나는 똥통학교 자석이 몸에 장착되잇었나보다.
그래도 이왕 다시 입학하게 된거 무를수도 없고 KTX를 타고 1시간 50분, 대전역에 내려서 시외버스로 한시간, 시내버스로 갈아타서 30분거리로 등교를 하여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다.
솔직히 할머니 입장에선 내가 기숙사에 있는데 신경도 덜 쓰이고 마음도 편했을것이다. 그런데 어메이징 학교 클라스답게 격주로 주말에 기숙사를 닫는댄다.
아마 당시 사감이 기숙사 당직근무를 하기 싫어서 닫은걸로 추정된다.
그래서 별수없이 주말엔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일주일에 교통비로 7만원을 주었는데 KTX 33000원, 시외버스 1200원, 시내버스 1200원이면 왕복 교통비엔 택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며 교통비를 충당하곤 했는데 한번은 돈을 하도 빌려서 친구들이 돈을 빌려주지않자 집에 전화해서 교통비가 부족해서 돈좀 달라고 말하니 돈이 어딨냐, 내가 돈을 어떻게 보내냐(모바일뱅킹 모르심)하며 빌려서 오라고 하셨다. 결국 그때 담임선생님께 돈을 빌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지 않냐 생각할수도있는데 중3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할머니에게 걸렸는데 당장 그만두라면서 공부나 하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냐고 극대노하셨고 나는 평생 주기적인 용돈을 한번도 받은적이 없어서 당시 최저시급이 4320원이었는데 2500원을 주는 악덕업주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몰래몰래 알바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건 부산에서의 얘기였고 기숙사는 오후9시까지 의무적으로 자습을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몰래 나가서 알바를 한다더라도 오후5시부터 오후9시까지 4시간만 할수있는 알바는 없었다.
그냥 그런대로 지내다가 돈이 없으면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곤 했다.
공부는 그럭저럭 열심히 했다. 글을 잘 써서 상장도 받고 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랑할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에게 상장을 받았다, 시험 100점 받았다고 자랑해도
그래 잘했네. 한마디로 넘어갔고. 칭찬과 애정에 목이 마른 시기였지만 보람도 없고 학업에 대한 열정도 식어서 방황을 다시 하게 된다.
흡연을 하다가 불시에 검사한 일산화탄소 측정으로 기숙사에서 잘려서 할머니의 도움으로 30만원짜리 가스도 침대도없는 달방에서 지낸적도 있고 기숙사의 어이없는 규정에 반발하여 자취하는 친구집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고 학교에서도 교우관계는 좋았으나 이대로는 더이상 시간이 아까워서 2학년 2학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자퇴를 하게 된다.
자퇴후 2주만에 무작정 일을 하기 위해서 구직공고들을 보다가 '사무직, 기본급 200만원'이라는 공골르 보고 무작정 지원을 하게 된다.
면접을 보러가니 내 나이를 보고 고민을 하다가 상의를 하고 연락준다고 하였다.
며칠뒤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듣고 출근을 하였는데 내가 근무하였던곳은 내가 면접때 얘기한 사무직이 아니라
휴대폰 대리점이었다. 해당 구직공고는 폰팔이를 구하던 공고였고 사무직은 개통전산직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나이가 어린것을 악용하여 대리점으로 배치하여 호객을 시켰던 것이다.
나는 폰팔이를 극도로 혐오하여 호객행위를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생때부터 컴퓨터를 수월하게 만지고 휴대폰에 관심도 많아서 필름 붙이거나 휴대폰 내용물을 옮겨주는 업무와 전단지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나는 몇달동안 하루 12시간 월4회휴무로 풀 근무를 하면서 월급 80~90만원씩만 받고 일을 하였다.
그 후로 판매를 배운 뒤에 고객을 등쳐먹는 방법, 중고폰 날먹, 요금제 유치 등을 배웠으나 고객에게 내 마진을 다 오픈하며 서로 배분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며 일을 하였다.
21살까지 그렇게 일을 하다가 친구가 본인(21살) 남자친구(32살)이 사장인데 같이 와서 일을 하자 하길래 알겠다 하여 들어갔다.
면접에서 기본급 150만원+@(인센티브)라 하여 당장 근무하였다. 당시 부산대 광장에서 매장앞에 도베르만을 기르던 그 매장이다.
늘 하던대로 일을 하였고 요금수납이나 액정필름을 붙이러 온 손님에게도 휴대폰을 팔면서 실적을 냈다.
두달 정도 일을 했는데 알고보니 그 사장은 사장이 아니라 매장을 2달동안 임대반은 소사장이었고 실적이 나지 않아 매장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판매건수와 기본급이 있어서 월급은 조금 되겠다 생각했는데 사장은 한달 두달 월급을 미루다가 실적이 나오지 않은 사유를 나의 업무태도때문이라며 탓을 돌렸고 결국 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동청에 신고를하여 이행권고가 나왔으나 이행하지않아 소송으로 넘어갔는데 노동청에 인적사항 기재부분에 주민번호를 허위기재하고 주소도 다른 주소로 적는 등 소송에 시간을 끌다가 4달이 지난후 여자친구(제 친구)가 바람을 피워 그 사장은 자살을 하게 되었다.
그 사장이 죽고 알게 된 점은 사장이 내 면접때 제출한 신분증 사본을 도용하여 인터넷과 TV를 개설하여 인센티브를 먹었고 그 돈은 전액 미납이 돼서 직권해지가 되어 위약금, 월 요금 전액이 나에게 청구가 되었다.
당시 월급을 못받아 카드값도 연체가 될 만큼 힘들었었고 그것으로 생긴 빚이 300만원 가량이 되었다.
결국 어쩔수없이 다시 12시간 근무하던 회사로 돌아가 판매가 아닌 전산직으로 일을 했고
사대보험없이 10시출근, 8시 30분 퇴근 주6일 근무에 월급 세전 130을 받으며 일을 했다.
꾸역꾸역 돈을 갚으면서 일을 했고 교통비, 식비, 생활비까지 빼면 남는돈이 하나도 없었다. 고작 300만원의 돈을 갚는것에도 1년이 넘게 걸렸다.
돈을 갚고나서 월급협상을 하는데 5만원 올려준다는 말을 듣고 퇴사를 하게 됐다.
근 몇년간 하루 12시간 넘게 몇년동안이나 일을 했음에도 남는게 하나도 없었다.
내게 남은것은 신용카드 연체로 인한 신용점수 하락 그리고 늘어난 나이 뿐이었다. 내 나이 23살이었다.
멘탈이 완전 나갔다. 그래서 집에 얹혀 살며 대충 살았다. 휴대폰비를 낼 돈이 없어서 6개월넘게 정지된 상태의 휴대폰을 사용하였고, 일을 하려면 휴대폰을 사용하여야했기에 어쩔수없이 할머니의 통장으로 자동이체를 연결하여 휴대폰비를 내었다. 이것으로 할머니가 빠져나간 돈을 확인하고(약 5~60만원) 크게 화를 내고 내 잘못이지만 언쟁이 있었던적도 있다. 여차저차 폰을 복구시키고 구직공고를 올리면 내 경력을 보고 연락오는 곳은 전부 폰팔이였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24살쯤 우연찮게 고액 삼X디지털프라자 아웃소싱 자리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경기도로 교육을 받으러 가게 된다.
경기도에서 교육을 받다가 우연히 알게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엔 재수가 없었지만 연락을 점점 하면서 서로 호감을 갖게되어 사귀게 되고
부산 - 경기도 장거리 커플이 되었다. 
위 아웃소싱은 1년에 두번 14일 정도 근무하고 200~250만원 정도를 주었는데
이 돈을 모아 서로 경기도, 부산을 왔다 갔다하며 연애를 하게 되었다.
비흡연자인 여자친구를 위해 15살때부터 피운 담배도 끊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다가 나는 중졸에 능력이 없는데 여자친구는 졸업을 앞 둔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여자친구에게 술을 먹고 나는 가진것도 없고 집이 유복하지도 않고 중졸에 마땅한 직업도 없다. 니가 나를 오래 만날수록 실망할것이다. 라는 말을 털어놓자 여자친구는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라며
사이버대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통학할 일도 없고 온라인 수업이라 도전할만하다는 말에 나는 바로 검정고시를 준비하였거, 위에 얘기했듯이 나는 학업에 열정이 없었을뿐 수업은 들었기에 2달만에 검정고시를 합격하여 고졸 자격이 되었다.
그러고 21학년도에 사이버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생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서론이다. 물론 내가 초등학생때 도벽이 있어서 친구 MP3를 훔치다가 걸려서 할머니가 학교에 두차례 불려갔고 그 밖에 잘못을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나의 잘못이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가 유년기와 학창시절 얘기로 말하고자 한것은 나도 바른 아이가 아니었고 가정 환경도 행복한 가정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 본론이다.
대학생활을 하기 전후 여자친구와 만나고 아웃소싱으로 일한 돈, 그리고 강의를 들으며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돈을 조금씩 모으게 되었다.
장거리 연애의 특성상 교통비와 숙박비가 크게 들어 많은 돈이 모이진 않았지만 독립을 목표로 보증금을 조금씩 모으고 있었다. 자취할 금액이 생겨갈 무렵. 정확히 2년전부터 형은 돌연 조카를 할머니에게 맡기게 된다. 처음엔 철원에서 여자와 여자네 아이와 조카와 함께 지낸듯 보인다. 하지만 그 여자와 헤어지고 부산에 내려오며 조카를 맡긴듯 하다. 일을 핑계로 조카를 맡겼지만 조카의 생활비. 정확히 양육비는 한푼도 할머니께 드리지 않았다. 본인의 딸만 맡기고 따로 사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우리. 그리고 손자의 딸 까지 3대를 키우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셨을것이다. 
할머니의 연세는 80세가 넘으셨다. 자취할 돈이 모였지만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장애가 있는 아빠 그리고 10살짜리 조카만 두고 독립을 하기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당분간 집에서 조금씩 일을 도우며 지내기로 했다.
할머니는 집안일과 아버지의 뒷처리 (소변통 비우기, 식사 챙기기)에 제 방 청소도 도맡아 하셔서 할머니도 행복한 여생은 아닐것이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조카의 담임에게 연락하여 보호자 연락이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하라 말씀 드렸고 알림장, 준비물 등을 내가 챙기었고 3학년 담임 교사도 조카의 담임이 되자마자 할머니가 아닌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하셨다.
명절때 할머니께서 부엌에서 혼자 음식을 만들고 계시길래 잠깐이나마 도와드렸고 가끔 잡일을 부탁하면 도와드리곤 했다.
조카와 아빠는 아침식사로 항상 계란을 먹는데 계란과 밥솥에 밥이 없어서 새벽 5시에 슈퍼에 가서 계란 두판을 사오고 밥을 하기도했다.
갈등이 쌓이는 계기는 여기서 부터다
내가 주말에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면 조카와 할머니가 내 방을 청소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여자친구에게 선물받은 발렌타인 초콜렛, 과자, 빼빼로데이 과자들이 사라졌다.
선물받은 것이지 손대지 말라고 수차례 말하였으나 늘 내 방에서 나의 물건은 사라졌고 크게 화를 내니 되려 더러운 새끼라고 욕을 한다.
여자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내 이름이 각인 된 아끼는 술잔도 식기건조대에 넣어뒀는데 사라졌는데 참았고 몇 년전 한창 일을 하다 모은 돈으로 일본여행가서 사온 내 이름이 새겨진 젓가락도 사라졌다. 항상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최근 설날때 다녀가신 작은엄마가 어디다가 치운거라 남탓을 하지만 명절 이후에도 사용하였던것이 갑자기 사라진것이었다.
그런 일이 수없이 일어났고 할머니는 항상 손도 대지 않았다, 모른다는 말만 하고 나에게 정신나간새끼가 아니냐고 욕을 하였지만 내가 화를 내봤자 내가 하는 행동은 폐륜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하여 항상 참아갔다.
최근에는 조카네 학급에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였는데 결국 2주뒤 조카도 확진 판정을 받게 된다.
조카가 열이나고 몸이 안좋은데 할머니는 학원을 보내려고 하셨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밥을 먹으려던 와중 조카의 상태가 의심스러워 나가서 자가진단키트를 사왔는데 결국 두줄이 뜨게 된 것이다.
바로 보건소에 데리고 가서 조카의 pcr검사를 받아왔고 다음날 확진 판정이 떠서 자가격리에 관한 지침을 할머니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할머니는 위생관념이 철저하지 못한 편이다.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도 겁이 나는 와중에 확진된 조카와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하고 같이 잠을 잤다.
나는 검체 체취일로부터 7일이 지나야 조카가 밖에 나갈수있다고 수십번 설명을 했는데도 개학을 했고  할머니는 조카는 이제 열도 안나는데 학교를 보내려고 했다.
증상이 없더라도 자가격리를 해야하고 나가면 방역수칙위반으로 처벌을 받을수있다고 물어볼때마다 수십번 설명을 했는데 되려 화를 내며 나에게 정신나간새끼 아니냐고 욕을 하였다.
그때도 참았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하게 된건 이번의 일이다.
지난주 토요일 해외직구사이트에서 나의 물건들 (라면, 과자 등)을 사면서 지인들의 작은 부탁들로 물건을 주문한것이 2주만에 택배가 도착했다.
나는 토요일에 여자친구를 만나러 나가서 월요일에 집에 돌아오는 편이다.
할머니의 몫인 부드러운 빵 과자를 드리며 저 박스는 주인이 있는 것이라 손대면 안된다고 말씀드렸고할머니가 니 방 청소 필요하나? 하시길래 안해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월요일에 돌아왔을때 내 방 택배박스는 보이지 않았다.
내 과자와 라면, 지인이 부탁한 라면들은 베란다에 가족들이 먹는 라면을 두는곳에 들어가 있었고 쓰레기통엔 먹고난 빈 컵라면 컵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처음엔 나도 "이거 주인있는거라고 말했는데 또 먹었네"라고 불평을 하였다.그러니 할머니는 당일 모임을 다녀왔다고 손도 댄적 없다, 니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말을 하였다.
분명 내 방에 있던 택배박스 물건들 전부 베란다에 있고 주인 있는거라 말했는데 왜 또 건드리냐고 말을하니 모임갔다와서 손도 안댔는데 왜 지랄이냐고 되려 화를 낸다.
또 화를 내봤자 싸움만 날 뿐이니 그냥 한숨 쉬면서 방에 들어가니 "에이 썅 더러운 새끼" 라며 읊조리들 욕을하여서 지금껏 쌓인 모든것이 폭발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본적없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모두 터져나왔고 내 방에 들어온적이 없다던 할머니에게 방 청소가 돼있는데 뭐가 들어온적이 없냐고 화를 내니 기억안난다, 모른다. 무조건 모른다 만진적없다 손도안댔다며 대화가 통하지 않으며 고함만 지르셨다. 
나 역시 눈이 뒤집혀서 소리를 지르고 문을 주먹으로 치고 반쯤 욕도 하며 10분 넘게 울분을 토하며 싸운 결과로 할머니는 지금까지 먹여주고 키워줬는데 어딜 감히 소리를 지르냐, 그냥 집에서 꺼져라 강아지야, 어딜 감히 니가 나한테 지랄이냐 여긴 내집이다 나가라, 이제 니는 필요없다, 가족으로 보지 않는다 신발롬아, 해준거 하나도 없으면서 지랄을 하냐, 얻어먹은것도 없다 이새끼야 죄송하단말 하기만 해봐라 아가리를 찢어버릴거다, 당장 나가라 등등의 반복되는 내용의 욕을 월요일부터 지금 글을 작성하는 금요일까지 내가 방 안에 있는데 거실에서 욕을 한다.
나는 내가 뒤에서 거들어왔던 일들과 도움을 주었던 나의 모든 배려와 행동들은 할머니의 기억속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가 더이상 도움을 주어도 할머니는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하다가도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장애가 있으신 아빠가 너무 걱정스러워 망설였다.
그래서 평소 가족들이 피자를 좋아해서 냉동피자 두판을 사와 부엌에 올려놓으며 화해의 의미를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걸 왜 여기다 올려두냐 확 그냥 던져버릴까 하며 아직도 화를 낸다.
이것으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집에서 나가기로 이제 독립을 하기로.
분명 나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것이다. 혹시나 집에서 할머니가 갑자기 몸이 안좋아질때를 대비하여 119안심콜 시스템에 할머니의 인적사항도 등록해놓았다.
딸을 맡기고 생활비 한푼 주지않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형보다, 옆에서 몇년 간 지켜봐오며 도왔지만 소리를 치며 화를 내는 내가 더 밉나 보다.
일주일동안 할머니의 반응을 살피며 눈치를 보며 잠을 자는데 머리와 옷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이 흘러 잠에서 깨고있다.
나를 정신건강을 위해서 빨리 집에서 나가야할거같다.
여자친구가 있는 경기도로 짐을 싸고 방을 잡아서, 지금의 편한 생활은 기대도 못할 정도로 불편하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집에서 떠나는게 맞는거같다.
몇주 뒤 할아버지의 제사이지만 집에 돌아오지 않을것이다. 나는 마음이 상했고 할머니도 마음이 상했고 서로의 상처가 깊고 크게 틀어진 만큼 나도 이제는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알기에, 또 다시 이런일이 있을것도 알고 그때도 이런 싸움이 발생할것을 알기에 집에서 나를 찾는다해도 당장은 돌아오지 않을것이다.
나를 길러준건 맞지만 17살때부턴 반쯤 방치가 되었다. 유년기에도 학창시절에도 난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은 퇴근해서 집이지만 편의점 근무 도중부터 지금까지 글을 써서 흐름이 맞지 않고 글 솜씨가 좋지 않고 가독성이 좋지 않지만 사실에 근거하여 글을 적었습니다. 잡소리가 많지만 최대한 저의 경험을 담고싶어서 글이 길게 길어졌습니다.
지금 집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고 스트레스에 잘때마다 식은땀에 젖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지금도 부엌에선 나를 원망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날의 다툼 이후부터 이 다툼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인 모든 한이 한번에 올라와 숨도 편히 쉴수없고 먹을것들이 소화도 되지 않고 속이 쓰리고 피도 잘 통하지 않습니다.
내 행동이 옳은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정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저와의 대화를 거부한 상태이며 저도 이젠 사과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독립을 하여 제 인생만 살아도 되나 싶습니다.
추천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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