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화
-아름다운 방문객
내 나이 올해 스물아홉...준하와 결혼한지 꼬박 6년째.
안타깝게도 아직은 아이가 없지만 아무탈 없이, 그 흔한 부부싸움 한 번 없이
정말 여느 부부보다도 사랑하면서 살아왔다.(물론 의견차 때문에 약간의 말다툼 정도는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준하는 나에게 있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그 역시 나와 같은 경우라면
좋겠지만 신혼여행때 거의 협박 수준에 못이겨 실토한 준하의 말에 빌리자면
고등학교 1학년때 이미 첫사랑에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단다.
어쨌든 준하는 내 남자가 되었으니 과거야 말 그대로 과거일뿐.
일년전에 여기, 그러니까 도심을 벗어나 외곽지역으로 이사왔다.
여긴 걸어서 이십분이면 들꽃 천지의 산과 들이 나온다.
전원주택이라고는 고작 대여섯채들이 듬성듬성 마을을 이루고 ...사실 마을은
여기서 이십분쯤 걸어 내려가면 나온다.
어쨌든 여긴 나와 준하만의 공간이다.
나는 아직도 준하를 보면 가슴이 뛴다. 유치하겠지만 우린 잠을 잘 때도 손을 꼬옥
잡고 잔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상처가 되었던 것은
아직 소식 없는 2세 문제와 시댁어른들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고 결혼한지 6년이 흘렀건만
며느리 대접 제대로 받지 못한다. 더군다나 손자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내가 눈에 가시일 것이다. 자식이 사랑한다는데 어쩌겠느냐 라는 말로
이혼을 강요하진 않지만 그들의 침묵과 무관심은 정말 공포스럽다.
하지만 준하 때문에 나는 굳건히 버틴다. 내 욕심만 부리자면 평생을 이렇게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요즘 나는 점점 버텨내기가 힘들어진다.
준하에게도 미안하고 시댁어른들께도 죄송한 마음에 차마 내 욕심만 자꾸
부릴 수 없을 것 같다.
......
전화벨이 울린다. 일기를 쓰다 말고 달려가서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아직 살아 있구나 너.
상대방은 다짜고짜 반말부터다. 그런데 왠지 낯익은 목소리다.
-누구....신지.
-어쭈, 서운한대. 나 같은 멋진 여자를 잊어 버리다니....확 다시 돌아갈까보다.
-지니선배?
그녀는 대학선배이자 젊은 시절 나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3년전
가족들이 이민가서 살고 있는 이태리로 유학 갔었다.
대학시절의 그녀가 떠오른다. 항상 보이쉬한 스타일로 뭇 남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며 졸업을 했지만 정작 그녀가 인정했던 남자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자유 연애주의자였다.
-이제서야 나를 기억한단 말이지?
-미안해요, 언제 왔어?
-지금 막, 니가 나의 첫 전화를 받은 셈이지. 어때? 감격 먹었지?...여기 공항인데
니네집 가려면 어디루 가자구 해야 되는 거니?
역시 그녀답다. 그녀는 항상 그런식이었다.' 절실하면 뻔뻔하게 대처해, 당당하게
뻔뻔해지는 게 나아. 굽실굽실하면서 손 내미는 것보단 그게 보기두 그렇고,
상대방도 덜 껄끄러운거야. 알어?...' 대학시절 그녀가 내게 항상 하던 말이다.
하지만 매번 신세 진 일은 고스란히 갚아 주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랬으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요즘 흔히 말하는
인간성 짱, 얼짱, 몸짱이다. 정말 부럽다.
그녀가 오기 전에 장을 봐야 할 것 같아서 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온다구?
-나의 영원한 우상이 온대니까. 자기도 보면 아마 너무 반가워서
거품 물거야.
-나 거품 물정도로 반가운 사람이 있었나...
-있지, 당연히 있지. 정말 누군지 감이 당췌 안오는 거야?
-글쎄...설마 지니선배는 아닐테구.
-딩동댕....올인.
-지니선배?
-엉, 무지무지 반갑지?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구, 팍팍 써서 좋은 걸루, 맛있는 걸루
마니 사와. 지니 선배..소주도 참 좋아했었지 아마.
-너는 나보다 지니선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삐질려 그러네.
-자기도 좋으면서 괜히...좋아해두 돼. 맘 놓고 좋아해. 내가 삐질까봐 먼저
선수치는 거 모를까. 이준하 잔머리 굴리는 소리 들린다 여기까지.
-눈치 챘냐?...끝나는대로 곧장 달려 가겠습니다 마님. 나중에 보자.
준하는 항상 이런식이다. 내 기분, 내 감정을 먼저 생각해서 행동에 옮긴다.
그래서 준하가 좋다. 게으름만 피우며 며칠동안 밀려 둔 청소를 시작했다.
구석구석 먼지들이 제 집을 만난양 잠을 자고 있다. 청소기 소음은 그것들을
제압하기 위한 공포였다. 윤이 나진 않지만 그럭저럭 말끔해진 집안을
훑어 보면 괜히 뿌듯해진다.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 둔 채 손도 대지 않아
말라 비틀어진 파렛트며, 붓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완성되지 않은 채 몇달을 견디었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슴 안에서 뭔가 꿈틀 거리는 것을 느끼지만 잠시 잠깐의 혼란으로 가볍게
받아 넘긴다.
-주인장, 계슈?
지니선배의 목소리다. 현관문을 열고 마치 이도령 기다리다 지친 춘향처럼 맨발로
뛰어나간다.
-선배.
반가움에 울컥한다. 선배가 두 팔을 벌리고 자상하게 미소 짓는다.
달려가 선배 품에 안기자 선배에게서 기분 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
-왜 이제 왔어?
-몇 배 더 반갑게 맞아주길 바라는 맘에서 늦었지. 여전하구나 너.
-늙었지, 벌써 낼이면 서른인데.
-하, 난 백발이냐 그럼?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 하자구.
집안으로 들어온 선배는 둘러 보느라 정신 없다. 여기저기 문 달린 곳은 다 열어 보고 입을 댄다.
오우, 와우, 좋은데..그러면서 말이다. 주방에서 과일을 깍아 내오는 동안 선배는 이층 작업실을
둘러 보고 내려온다.
-너, 불성실하다 요즘.
-과일 먹어요, 근데 뭐가?
-작업실 들어간지가 언제냐?
-조금 전...히힛
-머리두 안쓰면 고장 난다. 삐걱삐걱, 니 손에서, 가슴에서 고장나구 있어 지금.
-게을러서 큰일이에요, 안 그래두 준하가 맨날 구박줘.
-시원한 맥주는 없냐?
-당연히 있지.
캔맥주를 두 개 들고 나오자 단숨에 따서 마신다. 긴 웨이브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
항상 짧은 컷트 머리만 보다 긴 머리를 보니까 낯설긴 하지만 예전의 그녀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렇게 이뻤었나...
-머리...어색하지?
-아니, 이뻐요. 여자 같네 정말.
-그럼 내가 전엔 남자였냐?
-뭐하구 지냈어요 정말...궁금해. 준하가 이태리에서 혹시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지 않을까
궁금해했거든, 왜 , 선배 대학때 많이 몰고 다녔잖아요.
-그러긴 해 그치?...것두 괜찮네. 그림 때려치우고 그거나 할까 정말?
-난 아주 눌러 앉는 줄 알았는데, 아주 돌아온 건 아니죠?
-아주 돌아왔어. 내 집이 여긴데 남의 집에 평생 있을 순 없잖어. 나 여기 있어두 되니?
-나야, 뭐 좋지. 평생 있는 거 말구..히힛
-준하 꼬셔서 너 빼구 둘만 살아버릴까부다 콱.
-자신 있음 해봐요 어디.
-이뿌다 너. 예전에도 이뻤지만 여전하네 그 미모는.
-그 말에 히죽댈 나이 지났네요, 접대용 멘트라는 거 모를까.
-들켰네. 이쁜 건 내가 월등하지.
-잘난척 하는 것두?....
그녀와 마주보며 웃는 것이 얼마만일까. 10년은 흘러 버린 것처럼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된 것 같다.
그녀의 짐은 아주 작았다. 옷가지 몇 벌과 필기도구, 화장품 따위들이다.
놀고 있는 이층 방 하나를 내어 주어도 고맙단 말은 안한다. 그녀는 원래 그런다.
속으론 아주아주 고마워 하면서도 말이다. 그녀의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주방에서 밥을
한다. 땅거미가 서서히 가라 앉고 금새 컴컴해지면 멀찌기서 어느 집 강아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온다. 정말 고요한 저녁이 시작되는 것이다.
집 앞에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준하가 현관에 나타난다.
양 손엔 뭘 샀는지 뚱뚱해진 시장 가방이 들려 있다. 그녀와 준하는 남자식의 인사를 한다.
주먹을 서로 부딪히며 가벼운 포옹을 한다. 대학시절 그런식의 인사를 자주 했었다.
저녁 상이 차려지고 준하는 샤워를 하고 나온다. 저녁상은 거의 술상에 가깝다.
소주 한 잔을 가볍게 비우고 그녀는 기분이 매우 들떠 있다.
-공짜 술은 이래서 맛있어, 특히 준하가 사주는 술은 더 맛있구.
-근데, 삼년 동안 뭐했어요? 연락도 한 번 안하고.
-뭐하긴 그림쟁이가 그림 그리지 뭘하겠냐? 손은 그림을 그리느라 전화기 붙잡을 새가 없었단다.
준하 넌..더 남자다워진 것 같다. 대학 때 얜, 기집애처럼 얼굴 허얘가지구 보는 사람 헷갈리게
했었잖어.
-선배두 만만치 않았어요, 여잔지 남잔지...
-아유, 둘 다 똑같애. 준하 얘, 그래두 알통 있어 선배. 남자니까 내가 데리고 살지.
-니네 둘 보니까 소꿉 장난하는 것 같다 야. 슬슬 결혼하고 싶어지네.
-정말, 선배는 왜 결혼 안해요?
준하의 일격이 시작된다.
-멀쩡하게 생겨 가지구선 지금까지 혼자인 걸루 봐서 어디 고장난 거 아냐.
-이 자식이, 오늘 함 보여줘 내가?
-정말 남자 아냐 선배?...수상하네. 혹시 이태리에 애 둘 낳고 도망 왔죠?
-애 둘 여기에 낳고 도망 갔었어 임마, 내 앞에 앉아서 지금 재롱 부리고 있잖어.
-연애...한 번도 안했어요 정말?
-준하 너 만한 남자 못만났어, 니가 지금이라도 내게 온다면 생각해볼께.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두 하은이만 사랑하기루 약속했어요, 어쩌죠? 평생 혼자
살어야겠네. 나 같은 남자 만나려면 좀 힘들텐데..히히
-어쭈, 말두 잘하네 이제. 좀 늘었다 말발이.
-하은이한테서 배운 거에요.
둘의 대화는 끊어질 줄 몰랐다. 지니선배를 알게 된 것은 준하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준하는 지니선배를 무척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동창생들이 나와 결혼하는 걸
지니선배로 착각했을까. 둘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누이와 동생 같았다.
그녀가 오늘처럼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새삼 그녀가 여자였단 사실과, 정말 아름다워 혼자 보기엔 아깝단 생각이 든다.
그녀는 이제 우리와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나야 뭐 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졸작이지만 마니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