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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당 토니벤 좌파의 선배 베반주의자들

당헌4조와 공공소유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베반주의자’(Bevanites)들

1950년 겨울, 토니 벤(Tony benn)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크립스(Stafford Cripps)의 브리스톨 선거구를 물려받아 보궐선거를 통해 25살의 나이로 당선됐다. 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하원의원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흔히 말하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한때는 좌파의 맹장이었지만 이때는 굳건한 현실주의자로 변신한 크립스의 선거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벤에게서 아직은 좌파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의 첫발은 순조로웠지만 당은 총선 결과를 놓고 격렬한 내홍이 시작되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 전 총선에서 과반에서 80석 가까이 상회하던 의석수는 과반을 불과 5석을 넘기는 불안한 승리에 그치자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총리는 갑작스런 우회전을 결행했다. 재무장관에 휴 게이츠켈 (Hugh Gaitskell)과 외무장관에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을 임명한 것이 우회전의 신호탄이었다. 2년 전, 보건장관을 맡아 마침내 국민건강서비스(NHS)를 탄생시킨 좌파의 상징 니어 베반(Nye Bevan)을 노동장관으로 이동시킨 것은 좌파들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이듬해 예산 편성을 하면서 우회전의 실체가 드러났다. 애틀리 총리과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국방예산을 대폭 늘리고 NHS의 예산은 줄이는 안을 들고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예산의 증액 이유로는 한국전쟁이 알리바이로 등장했다. NHS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베반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베반은 즉각 장관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맞섰으며, 두 명의 좌파장관들도 뒤따라 사임했다. 베반이 사임하자 당내에서는 그들 중심으로 한 ‘좌익 고수’(Keep Left)그룹이 지구당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다가오는 당 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현직 총리를 상대로 당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들의 회합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베반주의자’(Bevanites)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카드를 애틀리 총리가 꺼내들었다.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1951년 조기총선은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했다. 악화된 국제수지와 물가상승을 놓고 보수당은 ‘노동자와 서민의 위기’를 강조한 반면, 노동당은 냉전의 도래와 국방예산 증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캠페인에 주력했다. 마치 양당이 뒤바뀐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선거전이었다. 데일리 미러조차 노동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애틀리 총리는 무엇에 취한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선거과정을 돌이켜볼 때, 노동자와 서민의 노동당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식지 않았다. 노동당이 스스로 자멸했을 뿐이었다.
선거는 보수당의 승리로 끝났고 노동당은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이 처칠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기초한 국가 개조와 광범위한 복지국가라는 기획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기간 동안 당의 우파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기획을 실행하지 않기 위해 갖가지 이유를 대는데 여념이 없었다. 복지국가 기획을 사보타주 한 것은 보수당이 아니라 노동당의 우파들이었다. 조기총선에서 빨간색을 지우는데 급급한 캠페인을 주도했던 모리슨과 달톤(Hugh Dalton)은 여전히 건재하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느슨한 회의체 성격이 짙었던 좌파들은 ‘좌익 고수’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베반좌파에 합류한 의원들은 50여명에 달했으며, 해롤드 윌슨 같은 거물급들이 참여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좌파들이 선택한 것은 거리정치였다. 윌슨과 리차드 크로스만을 앞세운 전국 순회강연의 단골메뉴는 ‘공공소유’에 대한 것이었다. 공공소유야말로 베반좌파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냉전정치의 청산과 친미(영국 노동당)·친소(영국 공산당)을 벗어나 새로운 외교노선을 주창하는 것은 베반의 몫이었다. 전국 순회강연에 당원과 국민들은 환호를 보냈다.
베반좌파들이 겨냥한 것은 당 대회였다. 1952년 모아캄 당 대회에서 좌파들이 노린 것은 전국집행위원회(NEC)의 선거였다. NEC는 여당일 경우는 식물기구에 불과하지만 야당일 경우는 당에 개입할 권한이 강력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당 대회 마지막 날 실시된 선거에서 윌슨과 크로스만이 위원으로 선출되고, 애틀리에 이어 차기 지도자로 지목되던 모리슨과 달톤이 낙선함으로서 좌파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3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위원직을 유지해왔던 모리슨으로써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베반은 부대표 선거에 도전했다. 하지만 의회노동당이 선출하는 부대표 선거에서 베반은 모리슨에게 완패했다. 후퇴를 모르는 이 도도한 좌파, 베반은 변하지 않는 의회노동당에게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4년 베반은 당의 외교노선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독단적으로 예비내각을 사임했다. 사임한 예비내각의 자리를 윌슨이 차지하며 전열을 이탈해버렸다. 두 번의 사임도 문제였지만 좌파들과 상의조차 없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베반은 정치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베반좌파는 고립되어갔다. 1955년 총선에서도 패배하자 애틀리는 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의회노동당이 선택한 인물은 베반은 물론 모리슨도 아닌 게이츠켈이었다.
당권을 장악한 게이츠켈은 뿌리째 당의 우회전을 주도했다.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의 1950년대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안소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의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가 대표적이었다. 요컨대 국유화와 공공소유는 더 이상 노동당의 것이 아니며 총수요로 대표되는 케인즈주의가 새로운 희망이라는 선언이었다. 재집권만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당의 분위기에 좌파들은 무기력했다.
1959년 선거에 또다시 패배했을 때, 게이츠켈은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당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잔재’들을 색출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 희생양으로 지목된 것은 국유화와 공공소유를 명시하고 있는 였다. 하지만 를 삭제하기 위한 블랙풀 당 대회는 게이츠컬의 패배로 끝났다. 여전히 당을 지탱하는 근간인 노동조합들은 누구보다 민영화의 폐해를 몸으로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반은 “국유화가 틀린 것인가, 선거패배가 두려운 것인가”라고 마지막 사자후를 토하며 야말로 노동당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했다. 그해 겨울, 13살부터 탄광에서 일하는 법을 배워야했던 불굴의 좌파, 니어 베반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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