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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최악의 사건.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살인

ㅇㅇ |2022.11.23 02:51
조회 339 |추천 0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021년 11월 25일 방송
꼬꼬무 출연진들 및 시청자들 눈물샘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대량 학살 비극적인 살인 사건
밤부터 새벽사이 6시간에 걸친 총기 난사극으로 무려 4개 마을 국민 62명 사망 33명 부상을 입힌 세계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는 사건
1세 아기부터 노인들까지 무차별 살해
10대도 16명 희생
전례없는 우리나라 역대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
범인 우범곤은 청와대 경호처에서 근무하다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사건 장소인 경남 의령의 지역 파출소로 전출
이후 여자친구 부모의 반대에도 여자친구와 동거 했으나
술만 먹으면 보이는 폭력성에 여자친구를 심하게 구타
이에 마을 사람들이 우범곤을 꾸짖었고 여자친구의 남동생이 파출소에 찾와와 경찰이면 다냐고 꾸짖자 격분해 칼빈 총을 장전 만류하는 방위병들에게 총을 쏴 살해후 무기고에 보관 되어 있던 M2 칼빈 소총 2자루와 실탄 144발 수류탄 8개를 탈취후 마을의 통신을 차단 하기 위해 우체국으로가 교환원을 총기 살해후 마을을 돌아 다니며 무차별 총기 난사 살인
이후 한 마을 한 집 방안에 마을 사람들 수명을 몰아 넣고 수류탄으로 자폭
신고를 받은 파출소 상위 관서 경찰서 기동타격대가 출동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경찰이기에 누구보다 믿었던 마을 사람들
날이 밝은 아침 온마을은 참혹한 피바다 현장으로 변해 있어
사흘동안 이어진 장례식에 온마을 눈물바다
일가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당시 마을 우체국에서 마을 통신 연결 업무를 담당 했던 20대 여성은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통신선을 연결 경찰서에 신고가 가능하게 함
또한 택시 운전사였던 한 남성은 다급하게 마을을 돌아 다니며 집안의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척 하라고 외쳐 수명의 목숨을 살리고 우범곤의 총에 맞고 희생
희생된 여성 교환원과 희생된 청년 유족들 합의 영혼결혼식 올려
사건 이후 전국민들이 큰충격에 빠져 여론이 들끓고 당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이례적 선 조취
책임을 물어 의령경찰서 서장을 파면 구속 기소 수명 직위 해제 내무부 장관 문책성 사임. 내각의 총사퇴 여론까지
유족들 지원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공간을 마련 하고 추모비를 세울 예정
무엇이 그토록 우순경을 분노하게 만들었나..
우범곤은 싸이코 였나..


1982년 4월 26~27일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일대에서 우범곤 순경에 의해 발생한 총기난사 및 연속살인 사건. 당시 경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경찰로 채용했다.[1]
9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국민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중상으로 앓을 때 경찰들은 온천에서 접대를 받고 있었다.
경찰의 근무 기강 해이가 만연하여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또한 해당 경찰서장도 접대로 이탈했다.
무기고 열쇠를 분실하는 등 관리가 허술해 사망자 수를 늘렸다.
경찰들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사건 현장에서 오히려 멀리 도망가 숨어 있었으며 사건 후 뒷수습까지 엉망진창이었다.
한때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임에도 백서 하나 편찬하지 않았다.
사망자 수도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1981년 12월 30일 오후 5시,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田)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9일에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런데 사실 전양의 가족들은 동거 전부터 두 사람의 교제를 극력 반대했는데, 이유는 바로 우범곤의 술버릇이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욕설은 기본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등 심하게 행패를 부려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2] 가족들이 반대를 안 할 수가 없었던 것. 애초에 우범곤이 궁류지서로 전근 온 것도 말이 전근이지 실제로는 사고를 쳐서 좌천당한 것인데, 원래 101경비단 소속으로 청와대 경호로 근무했다가 거친 성격으로 인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아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 전출 처리되었을 정도였다.[3]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감에 젖어 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 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4]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해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8개 등을 탈취했다. 그 이후 우범곤의 범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범곤의 범행 중 가장 악질적인 점은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무차별로 살해했다는 것으로, 민가에 침입해서 아이들을 사살하는가 하면[15] 평촌리 상갓집에서[16] 20여명을 사살하고 난 뒤 피바다가 된 현장을 떠나려다 뒤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안 죽은 게 있어?"라면서 되돌아가서는 그대로 아기를 사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17]고 한다.

또한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하고 다니는 동안 한 택시 기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빨리 불 꺼요, 지금 불 안 끄면 다 죽어요"라며 위험을 알렸고, 택시 기사의 말대로 불을 끈 집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택시 기사는 안타깝게도 결국 우범곤에게 사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간발의 차로 미처 불을 끄지 못한 집들도 변을 당하고 말았다.

1시간 동안 화기를 사용해 마을 4개를 오가면서 수 십 명을 살상한 전대미문의 살상 사건에도 당시 대한민국 경찰은 대응은 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마을 유력자로부터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밤 22시 50분경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자초지종이 담긴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지서장 일행은 무기고로 향해 각자 무기를 챙기고 출동은 했으나 우범곤 순경이 이동한 반대 방향으로 출동하는 추태를 부렸으며 당시 궁류지서 맞은편에 면사무소가 있었기에 여기에 방송을 했다면 우범곤 순경의 희생자를 줄일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궁류지서 경찰들이 도주로 화룡점정을 찍었고 이후 이들은 경찰 직무포기로 인정되어 처벌을 받았다.

한편 마을에 살던 의령군 민방위과 공무원의 사건 전파를 받고 의령경찰서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휘하 전투경찰순경 30명이 자정 무렵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어두컴컴한 시골길에서 갑자기 피격 당할것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19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 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기는 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해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도[18]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 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밤 22시 24분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적어도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큰일이 났다며 마을에 있던 의령 경찰들에게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두워 시야가 확보가 안 된다는 이유로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가 없었으며 오죽하면 이 사건당시 경찰은 단 1발도 못 쐈다. 그렇게 주민 살상이 진행되었고 속수무책으로 종료됐다.

게다가 위 타임라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범곤이 26일 23시경부터 다음날 자폭하는 새벽 5시경 사이에 무려 6시간 가량 딱히 범행을 실행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있었는데, 만약 그가 쉬지 않고 계속 날뛰었다면 이 때 경찰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피해가 몇 배로 훨씬 커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19]

우범곤이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하여 살인을 저질렀으니 시골 사회의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다. 조상 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 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가족들을 모두 잃고 일가 중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위에도 언급되었듯 나이 어린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는데, 20세 이하의 희생자가 무려 16명에 달했으며 그 중 생후 1개월 된 갓난아기[20]를 포함한 10세 이하의 희생자는 6명이었다.

물론 우범곤도 수류탄으로 자폭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첫번째 희생자인 청년과 우체국에서 피살된 교환원은 미혼으로 사망한 것이 비통하게 여겨져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4월 26~27일 즈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경에 의령경찰서에서 전투경찰로 복무했다는 한 네티즌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주민 하나가 술만 마시면 경찰서를 찾아와 한풀이를 하다 가곤 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우범곤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 해이로 인해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총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21]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경찰인 우범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어도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 중인 것으로 인식했다. 또한 우범곤이 해병대에서 특등사수로 뽑힐정도로 사격 솜씨가 좋았다는 것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가뜩이나 1982년 당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막 정권을 차지한 상태에 1월 두발자유화와 2월 야간통행금지 폐지, 3월 KBO 리그 개막으로 지지율을 얻기 위해 빗장을 풀고 있었는데 이런 사태가 터졌으니 발등에 불 떨어진 전두환 정권의 후속조치는 이례적으로 빨랐고 당시 경찰 관계자들에 대한 조치도 선처벌 후조사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궁류지서장 허창순, 의령서장 최재윤을 파면·구속 기소하고 관계자 수 명을 직위해제시켰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24]는 책임을 지고 문책성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체육부 장관이었던 노태우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 사퇴까지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의령군을 찾아 주민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는 한편, 국가 차원의 대책위원회를 열어 대대적인 보상을 실시했다. 사건이 일어난 의령군 등 서부 경상남도 지역은 TK와 함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으므로[25], 전두환이 아무리 간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이지만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유족들에게는 대학등록금 및 의료비 지원 방안이 이루어졌고 궁류면에 대한 인프라 구축 사업 역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먼저 의령읍~정곡면 간 11km 국도를 새로 포장한 뒤 군도였던 의령~궁류 간 12km 도로를 지방도로로 승격해 경상남도 예산으로 새로 포장했다. 또한 마을 안길 포장, 교량 가설, 주택 개량, 농로 개선 등 총 12개 부문 환경개선 및 생산기반 시설 사업이 진행되었고, 평촌마을 윗쪽에 벽계저수지 및 보가 설치돼 궁류면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주민들의 절반 이상이 궁류면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 사건으로 경찰공무원 임용규정이 개정되어 경찰공무원 응시자에 대해 고졸 이상부터라는 학력 제한 규정이 제정되었으며, 인적성 검사와 전과 등 과사실 유무에 대한 조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우범곤은 전문대 중퇴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학력 제한이 예전부터 있었다 해도 충분히 응시할 자격이 되었다.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26]에서는 형법 직무유기 관련 중요 판례로 "...직무유기죄가 성립하려면 주관적으로는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과 객관적으로는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다만 직무집행에 관하여 태만, 분망, 착각 등 일신상 또는 객관적 사정으로 어떤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에는 형법상의 직무유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조치가 다만 적절하지 못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형법상 직무유기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직무유기죄는 불성립되었다. 그리고 파면처리되었던 것도 징계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무효가 됐다.#

의령군은 2022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위령비를 건립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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