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화
수업이 끝나고도 한동안 강의실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강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을 하던 참이다. 지금부터 작업에 매달리자...아무래도
작업실을 새로 얻어야 할 것 같다.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본다. 박교수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을 느낀다.
-잠깐...시간 좀 내줄수 있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한다. 지나치려는데 팔을 잡는다.
-잠깐이면 돼.
-미안하지만...할 말도, 들을 말도 없어요.
그가 팔을 잡던 손을 놓치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면...당신한테 용서를 받겠어?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내 방법이 틀렸어, 인정할게....당신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런 건 아니었어...내가 서툴렀어..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마음이...그렇게라도 전해질 줄 알았어.
그의 시선이 흔들린다.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나는 지금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미안해요..
그의 팔을 뿌리치고 나간다. 그가 두렵다기 보다 그와의 일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다.
강의실을 나오는데 정교수와 마주쳤다.
-자기, 괜찮은 작업실 하나 나왔는데 한 번 볼래?
-그래요?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오늘은 안되고, 내일쯤에 한 번 가보죠.
-난, 내일 오후에 수업 없는데 자긴 어때?
-전 내일 수업 없어요. 정교수님 편한 시간에 연락 주세요.
-그래, 그럼.
***
오피스텔에 있는 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댈까. 오피스텔은 부동산에 내놓고
박스를 나눠서 짐을 챙기고 있는데 준하가 들어온다.
-점심...했어요?
-응, 했어. 어쩐 일이니?
-집으로 가져갈 짐은 제 차에 실으려구요.
-짐이란 건 별로 없는데...거의 작업실로 다 옮기면 되는 것들이야.
-작업실은 구했어요?
준하가 테이프를 찾아 박스에 포장하며 묻는다.
-엉, 내일 가보려구해.
-생각보다 빨리 구해서 다행이네요.
왠지 어색하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준하도 나도 예전처럼 서로에게 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둘이 있는 것이 정말 많이 불편해진 것 같다.
-일은...계속할 거에요?
-아무래도...그만둬야 할 것 같애. 작업에만 매달릴 생각이야.
-네에...
한동안 그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인가..해야 할 것 같은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저기...선배.
준하가 나를 본다. 그러다 어색한지 시선을 돌린다.
-차에 실을 건...이게 다 죠?
-어?...그..그래.
준하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 역시 애써 모른척 한다.
준하가 박스를 들고 나간다. 그제서야 나는 떨리던 두 다리가 느슨하게 풀리고 만다.
***
저녁을 먹는 동안에 하은이 신나는 듯 학원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학생들을 얘기하며
때론 지니선배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다. 지니선배가 불편해진 것은 아니다.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처럼
지니선배를 대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나를 관찰 중이다.
-준하야...
-어?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하은이 부른다.
-뭘 그렇게 생각해?
-어...아니. 아무 생각도 안했는데.
-밥 먹을 땐, 밥만 생각해. 귀는 열어 두고...
-그래...
-우리, 내일이 결혼 기념일이에요 선배. 준하 너 안 잊구 있었지?
-어...안 잊었지.
사실 잊고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새 깜박한 모양이다.
-내일은 선배랑 같이 저녁 못할 것 같은데...
-난 괜찮아...좋은 시간 보내고 와. 아주, 아주 늦게 들어와도 돼.
지니선배를 본다. 마음이 걸린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화가 난다.
-먼저 들어갈게.
-그래, 양치하구.
-엉.
욕실로 들어와 양치를 하는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낯설게 느껴진다.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 얽히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분명 일어나고 있다.
***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잠은 쉽게 오지 않는다. 하은이 들어온다. 화장대 앞에
앉아 로션을 바르는 하은의 뒷모습을 본다.
-지니선배, 작업실 구하면 본격적으로 시작할 모양이야. 당분간 많이 늦을 거래는데.
하은이 침대위로 올라온다.
-준하야, 지니선배 요즘...좀 이상하지 않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잘 웃지를 않아. 예전엔 웃음이 참 많았는데...좀 낯설다. 너두 그러니?
-잘...모르겠는데.
-참, 이번주에 청담동 제사 있는 거 알지?
-응.
-아휴...무섭다. 이번엔 어떻게 모면하나.
하은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준하야...
-응?
-너 요즘...왜, 내 손 안잡니?
-그랬어?
-엉, 그랬어. 항상 손 잡구 그렇게 잤는데 너, 며칠 전부터 그거 자꾸 빼먹구 그랬어.
-미안해...생각이 좀 많아서...내가 깜박했다.
-무슨 생각?
-그냥...이것 저것.
-힘드니 요즘? 회사에서 너 막 부려 먹어? 응?
-아니...그만 자자.
하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녀를 안고, 손을 꼬옥 잡고 잠을 청한다. 하은에게서 아기분 같은 향이 난다.
***
-선생님,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요?
재경이 빼꼼히 사무실 문을 열고 쳐다보며 묻는다.
-왜, 그렇게 보이니?
-네, 화장도 좀 짙구, 의상도 좀 그렇고...아침부터 뭐 본 사람처럼 실실대서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해서요.
-너, 그게 선생님한테 할 소리니? 얘가 조금 있음 친구 먹자 그러겠네.
재경이 혀를 쏙 내밀며 웃는다.
-복권 당첨 되는 거 보다 더, 좋은 일 있어. 뭐냐구 묻지마, 안 가르쳐 줄거야.
-피이...저두 안궁금해요 뭐.
재경이 문을 닫고 사라진다. 피식 웃는다. 잠시후 전화벨이 울린다. 준하다.
내 기분을 묻는다.
-엉, 기분 만땅이야 오늘. 몇 시에 올거야?...난, 오늘 일찍 끝낼 준비 돼 있는데..
어, 많이 늦지 말기...참, 준하야 우리 오늘 그냥...밖에서 잘래?....뭐가 창피하니?
불륜도 아닌데...불륜이라구 욕하면 또 어때...우리만 아님 되는 거지....알았어.
나중에 봐. 응...
수화기를 내려 놓고 거울을 본다. 늙긴 좀 늙었다. 그래도 기분은 참 좋다.
***
작업실은 마음에 들었다. 아담한 것이 햇볕도 적당히 들어오고 그닥 시끄럽지 않은
위치에 있어서 방해를 많이 받지 않을 것 같아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정교수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서서 창밖을 서성인다.
-딱 좋네. 조용하고...나두 작업실 하나 있었음 좋겠다. 그림쟁이들만 작업실 가지란
법 있어? 나두 나만의 공간이 하나쯤은 있었음 참 좋겠어...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유교수 보면 참 부러워.
-뭐가요?
-자기 같이 혼자인 사람한테 결혼이 얼마나 좋은 건지 매일 연설을 늘어 놓지만..실상 그거
자기 환상이거든. 결혼한 순간 그 환상 무지막지하게 깨진다. 누가 그러대...사랑의 유효기간은
3개월이라구. 뭐 제품에 따라 조금씩 유효기간이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일 년안엔
모든 게 상하고 말지. 그래두 인스턴트 식품은 변질되서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사람은 그게 안되잖아. 버리고 싶어도, 너무 걸리는 게 많아서 쉽게 버릴 수 없는 게 사람이야.
그 놈의 정이란 것도 한 몫을 하지만.
-재밌네요 표현이.
-우리 엄마가 나 결혼한다구 할때, 무척 반대하셨거든. 그때 우리 엄마가 그러대. 사랑이 밥
먹여주냐구. 그땐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멋진 대사로 한 방 날렸지. 밥은 순간적인
배고픔을 채워주지만 사랑은 평생의 배고픔을 채워준다...뭐 말도 안되는 그런 말.
그녀의 말에 웃는다.
-살아보니까...우리 엄마 말이 딱 맞았어. 사람들은 제 사랑이 제일인 줄 알어. 자기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믿거든. 남자들이 흔히 잘 하는 거짓말에 속아서 행복해 하는 게
여자야. 그때 조금만 우리 엄마가 나를 뜯어 말려줬다면...그런 생각도 든다 요즘. 뭐,
그렇다고 내가 불행하다는 건 아닌데....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거든.
그녀의 말에 준하와 하은을 떠올린다.
-내가 아는 후배가 있는데....그 애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정말 맑게 느껴져요.
옆에 있으 면 나까지도 맑아지는 느낌요...아, 나두 저런 사랑 한 번 해보고 싶다..그런
생각하게 만들어요.
-사랑은 보여지는 것과 달리 다른 것이 있어. 그 다른 무엇..그 하나를 제대로 보면 다 똑같아.
보여지는 것에 비해 너무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게 있거든. 그래서 사랑은...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거야. 너무 보여지는 것에만 집착하지 마라. 내 꼴 난다.
그래도...그래도 난, 그 사랑을 받고 싶은데. 사랑이란 위험한 칼날에 손을 대어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설사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나도 사랑,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