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애의 끝, 파혼 심정
지나가던사람
|2023.12.22 10:53
조회 2,800 |추천 6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부러 어질러놓고도
내가 어질러둔 방이 야속할 때가 있다
아마 평생 조금씩조금씩 그렇게 미웠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어지럽히고서도.
지금, 마음이 어지러울때
다시 생각해보니 형체가 있는
방을 치우는건 제법 쉬운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원할 때 시간 한구석 비워내면
아마 언젠가는 재미를 느꼈었던 것도 같다.
어지러운 마음을 치우는 건
마치 바닷가 앞 모래사장을 치우는 기분이다
새벽같이 바지런히 일어나
모래를 쓸어내고
내 땀도 닦아내고
이 일 저 일하고 잠깐 허리를 펴노라면
언제 치웠냐는듯 다시 모래가 사방팔방이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모래를 치운
내 손바닥부터 발, 엉덩이 머리까지
어느 곳은 하얗게
어느 곳은 뭉텅이로
조금씩 모래가 묻어있다
처음에 그 흔적을 발견할 때
나는 도무지 아침일찍 일어나
청소한 보람을 찾을 수 없어
그게 너무나도 억울한 나머지
꺽꺽 거리며 울었더란다
밥도 안넘어가고
잠도 안자고
심지어는 숨도 잘 안쉬어졌다
그나마 내가 함박 웃을 수 있었던 때는
체중계 위에 올라가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확인했을 때였다
엄마는 이제 웨딩드레스도 안입는데
그때나 빼지 왜 이제와서야 빼냐고
이제 잘 유지하자고 더는 빼지 말잔다
아직 5kg는 더 빼고싶은데 무슨 소리람
역시 다이어트는
비싼 다이어트가 효과가 최고다
여기저기에서 환불받은 목돈도 들어온다
몇만원의 위약금이 빠지긴 했지만
나갈 때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돈이라,
받으니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다이어트도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목돈이 생긴 기념으로
옷도 속옷도 신나게 샀다
내가 봐도 너무 라인이 이뻐서 신이 절로 났다
기분도 좋은데 영화나 볼까
당장 당일 영화를 보려니
내가 평소 좋아하던 공포 영화를 같이 볼 친구가 없다.
조금 울적해졌지만,
동네에서 영화 모임을 검색해서
영화를 보여드릴테니 같이 봐줄 사람을 찾아봤다.
시간을 내준 것에 감사했지만,
영화 관람 중 은근 슬쩍 스킨십을 하려는 것 같아 거슬렸다.
평소 하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들을 작성해보았다.
시아버님 칠순으로 현수막 달고 내려오겠다고 했던 폴댄스,
취미로 같이 하자고 했던 가죽공예,
언젠가 같이 보러가자고 했던 오로라 등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하루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니
눈물진 달력들을 넘길새도 없이
활기가 도는 걸로도 모자라,
집에 오자마자 기절하는 날도 생겼다
몸은 죽겠는데
내가 살겠다
이제 다시 숨이 쉬어진다
이제 다시 살아지는 것 같다
조금씩 내가 괜찮아지는 것 같으니까,
너무 보고싶었는데
그간 눈물이 날까봐 미뤄둔 영화도 봤다
영화 안본다고 안울것도 아니면서.
그간 나는 마치 도깨비의 공유가 된 것만 같았다
매일 나는 울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요 몇달 간은 눈물이 주룩주룩났다
심지어 나는 어느새부턴가
이제는 더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역시 꽤 되었고
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이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만큼
견고한 확신이 세워졌다.
머리로는 그 사람을 보내준지 이미 석달이 넘었다
마음으로도 보내준지가 두달은 된듯하다
그런데 눈물은 아직도 가끔씩 나니까
이유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럼 이제 사랑때문이 아닌, 상실감이라고 할까
그리고 상실감은 이제 잘 채워지고 있으니
더이상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이 밉지 않다
그냥 그 사람 역시 모든것이 더 잘 됐으면 좋겠다.
다만 어느 작은 실마리가 되는 소문도 듣고싶지 않고,
그저 마음으로 기도해줄 뿐이다.
그리고
만약 나에게 다음이 있다면
다음엔 나보다 더 교양이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이번 여행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인데,
세계관이 넓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색달랐다.
대학 졸업 후 제대로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거나
영화감상을 써본 적 없는 것같다.
나와 다른 감상을 다채롭게 논의하면서
서로 세계관을 넓혀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 사람의 흔적이
새로운 나로 덮히는 것이 느껴진다
안녕, 잘가요, 그동안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