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왜 노코멘트라고 했을까......
어이없군.....참나....'
별것도 아닌 대답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본인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땡...12층입니다.
이곳부터는 허가되신 분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수완은 자신 앞에 가로막고 서는 사람의 신발을 빤히 쳐다보다
얼굴을 들고 누구인지 확인한다.
강동식이다.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자주보네요."
"지금 회장실에 올라가나보군."
"그쪽두요?"
"이봐요. 마수완씨.
우리 호칭을 정확히 합시다.
내가 언제까지 댁이나 그쪽이라는 말로 불려야 하는거요?
나도 하나의 개체라고. 강동식이라는 개체."
"하......나도 알아요.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임시 약혼자? 아니면 동식씨?
미안하지만, 난 누구를 '씨'자 붙여서 부르는 거 잘못해요.
어쩔 수 없죠. 뭐."
어느새 15층에 도착해 있다.
수완은 잠시 화장실에 들려 옷 매무새를 고친다.
회장실에 들어가는 순간.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핸드폰 벨소리.
순간 모든 것들이 정지해버린 기분이다.
소리는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면바지와 니트를 입고 가방을 맨
그녀의 벨소리이다. 미션 임파서블의 타이틀곡.
회장님과 동식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힌다.
수완은 누가 걸었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아예 전원도 꺼 버린다.
동식의 얼굴에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 역력하다.
"마수완씨 벨소리 참 좋군.
나도 탐 크루즈처럼 풀지 못할 임무를 처리해야 할 것만 같아.
허허허허......
자, 여기 어제 우리 변호인단이 힘써 만든 서류네.
천천히 읽고 필요한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세.
동식이 너도 읽어보고 이야기 해라."
동식과 수완이 마주보고 앉아서 조용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계약서는 대체로 무리가 없다.
수완 자신이 사용하는 모든 비용이 회장님의 통장으로 결재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은 카드 하나만 들고 다니면 된다는 이야기다.
손해 볼 일이 없다. 전혀, 수완은 동식을 쳐다본다.
어제 그의 말이 괜히 귀에 거슬린다.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다.
저 정도면 그냥 준수한 외모이다.
영화배우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부티가 난다.
오블리제 스타일이다. 여유로움이 보이는 사람이다.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린다.
'어차피 이건 일이니까.'
동식은 자신을 쳐다보는 수완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끔씩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와 어제 바에서 본 그녀는
협상을 성사시키거나, 지금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는 그녀와는 달랐다.
마치 한 몸 안에 두 사람이 공존해 있는 것 같다.
동식은 자신이 평소에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인지 몰랐다.
적어도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은 적당히 분위기도 띄워줄 주 아는
때로는 물 같고 때로는 불 같은, 카멜레온이었다.
그러나 수완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놀려주고, 골려주고 싶어진다.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벗고,
프로가 아닌 평범한 여자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런 여자랑 약혼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동식이 과감히 싸인을 한다.
서류를 살펴본 수완도 펜을 꺼내 싸인을 한다.
둘의 모습을 본 삼촌이 말을 꺼냈다.
"좋아. 그럼, 성사된거군.
지금 이 순간부터 누가 물어도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가 되는거야.
알겠나? 이제부터는 두 사람의 일이네."
회장은 만족하는 듯 지긋이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아직도 수완은 기분이 뒤숭숭하다.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삼촌,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회장님."
"아, 그래요."
수완과 동식이 문까지 거의 걸어 나왔을 때였다.
"참, 동식아 성지 그룹의 호성이 녀석 알지?
그 녀석 집에서 모임이 있다더구나.
네가 다녀와라. 수완씨와 같이......"
수완과 동식 둘다 얼어붙어 버린 듯 미동도 없다.
거기에 한 술 더뜨는 삼촌
"이제 손자의 약혼녀이니까. 수완씨도 편하게
수완이라고 부르겠소. 수완씨도 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삼촌이라고 부르시오. 흠......"
수완이 고개를 들고 동식을 쳐다본다.
동식 역시 삼촌을 쳐다본 후 수완을 바라본다.
먼저 고개를 돌린 수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