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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22-

까미유 |2004.03.18 16:01
조회 873 |추천 0

 

제 22 화


***

청담동으로 가는 동안 준하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서로에게 흉기가 될 뿐이었으니까.

여전히 무뚝뚝한 준하의 아버지, 항상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머니..

그래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사람은 아주버님과 형님뿐이다.

식탁앞에 앉아 다들 아침을 먹는다. 오늘은 준하의 엄마 생신이다.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그들과 아침을 먹으며 평소와 다를바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준하는 여전히 말없이 밥만 먹는다.


-학원은 어때?


형님이 친근하게 묻는다.


-덕분에 잘 되요...학생 수도 좀 늘었구요. 저번에 형님 다리 다치셨던 건 어때요?

-이제 걸을 만해. 근데 동서...얼굴이 많이 상했다.


힐끔 준하 엄마가 나를 본다.


-요즘 늦게까지 학원 일 하느라 그런가봐요...많이 흉해요?

-그래서 언제 자식을 보누...


준하 엄마가 툭 내뱉는다.


-그래두, 노력하고 있어요. 어머님...올 겨울 지나면 준하가...아니, 준하씨가 인공수정도

  하자구 그러네요.

-병원은 빼먹지 않구 다니니?

-이제부터 안 빼먹으려구요...죄송해요.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 조금만 신경 쓰면 될걸...그게 귀찮아서..

-그만 하세요..


준하가 불쑥 언잖은 듯 내뱉는다. 준하 아버진 아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은이두 사람이에요...밥 먹을 땐 제발...먹게 좀 해주세요. 여기만 왔다 가면...

  매일 체해서 손 따는 거 모르죠?

-왜 그래...준하씨.


준하 허벅지를 찌른다.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그랬니, 난 몰랐지. 워낙 비위가 좋은 애라서...

-어머니...


아주버님이 그만하라는 눈치를 준다. 기분이 상해지고 만다...준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내 팔을 잡고 일으킨다.


-가자, 그만 먹구 가.


오늘따라 준하가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난, 참아 보려고 그랬는데...


-뭐하는 짓이야 지금?


준하의 엄만 이제 표정이 굳어진다.


-도련님...식사 하구 가요.

-죄송합니다 형수님...형, 미안해요.


준하가 나가버리자 다들 표정이 침울해진다. 어쩔 줄 몰라 형님이 나를 보고 눈치를 준다.

나가보라고...


-죄송합니다...


차 안에서 준하는 화가 많이 난 듯 아무 말이 없다. 준하를 바라본다. 그래두...너 나 아직

사랑하지?....묻고 싶어지는 걸 참는다.



***

작업실 청소를 끝내고 잠시 앉아 창 밖을 보며 차를 마신다. 이제 작업실 안은 따뜻하다.

고장난 히터는 제대로 작동을 하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준하다...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에게서 걸려온 것처럼 심장이 뛴다.


-어디에요?

-작업실...넌?

-사무실요...나중에 나가봐야 되요. 오늘 저녁에 뭐해요?


하은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오후엔 잠깐 나갔다 올거야...그 후엔 약속 없어.

-그럼...저녁에 만날래요?

-그래...전화해.

-나중에 봐요 그럼....나갈 때 옷 두껍게 입고 나가요.

-그럴게.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행복하다는 걸 느낀다. 그러다 다시 우울해진다...하은일

어떻게 볼까....시간이 더디게 흘렀으면 좋겠다.



***

며칠 동안 물을 주지 못했던 화분에 물을 준다. 금새 시들했던 나무는 다시 활기를

찾는 것 같다. 니들두...사람하고 똑같구나...미안해, 무관심해서...미안해.

시계를 본다. 이제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해야 할 것 같다.


***

작업실을 나와 하은이와 약속한 곳으로 향한다. 차안에서도 나는 계속 불안하다.

한적한 커피숍앞에 도착하고나서 심호흡을 크게 한다. 긴장이 되서인지 손바닥에

땀이 난다. 커피숍에 들어가서 하은일 찾는다. 하은이 나를 먼저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얀색 원피스 탓인지 하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느껴진다.

떨리는 손을 움켜 쥐고 자리에 앉는다. 그 아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커피 괜찮죠?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은이 커피를 주문하고 커피가 나오는 동안에도

우린 아무런 말을 주고 받지 않는다. 뜨거운 커피잔을 하은이 움켜 쥔다.

그러다 나를 본다.


-내가 왜...선밸 보자구 한지 알죠?


나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린다. 그 앨 볼수가 없다. 고개만 숙인다..나는 죄인이다...

너에게 죄인이다 그러면서...


하은이 커피를 마신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이편으로 건너 온다.


-준하한테....언제부터 그런 감정 가지고...있었어요?


가슴이 내려 앉고 쉴새없이 손은 떨린다. 눈 앞이 붉어진다...미안해서가 아니라

너무 부끄러워서....


-최근이 아니었죠?.....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진작

  말해줬더라면...오늘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잖아요...선배와 내가 이런 일로

  이렇게 마주하게 될진 꿈에도 몰랐어요...


내가 이 아이한테 결국 상처를 주는 구나.....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이런 게

아니었는데...손 등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어떻게든 이 자리가 빨리 끝났음 좋겠단

생각을 한다.


-준하는...선배를 떠나지 못해요. 나를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 많이...힘들었을

  거에요. 내가 받을 상처, 내가 겪을 고통까지도 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거에요.

  내가 선배보단 준하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준하가...선배한테 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요...그래도 기다릴 거에요?


손으로 입을 막는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이 아이앞에서 보이는

이 눈물까지도 부끄럽다. 그래도 난....준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난 욕심을 부리고 싶다.


-선배가...준하를 받아주지 않으면 되요. 난...준하 없으면 안돼요.

  그 앨...,보내면 난...죽어요. 선밴...죽을만큼은 아니죠? 죽을 것 같진 않죠?


나도 죽을 것 같애...나두 죽겠다구...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너였다면....차라리 내가 너였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쏟아내는

것 뿐이다.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미안하다고...용서하라는 말 뿐이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흐른다. 나는 차마 그 앨 보지 못한채 잠깐이면 된다고

말하고는 화장실로 달려간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얼굴을 씻는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너두 이만큼이나 늙어서 사랑이 하고 싶니....남의 것까지 탐을 내면서

꼭 이래야 하는 거니...내게 묻는다.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진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소리를 내며 운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니...준하야...내가 잘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줘....



***

준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컴컴한 거실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위에 그대로

쓰러진다. 나는 지금 너무 지쳤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서인지 현기증이 일어난다.

이대로 자고 나면...준하는 어제처럼 내게 아무 일 없듯이 돌아와 있을까...자고 나면

이건 모두 꿈이었어...그러면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지니선배를 만난 것이

후회가 된다. 그녀를 보고는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잠이 쏟아진다. 준하야...빨리 와.



***

작업실앞에 준하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준하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

부은 내 얼굴을 차마 보이지 못한다.


-오래 기다렸니?

-아뇨, 조금 전에 왔어요.

-춥다 들어가자.


히터를 켜고 커피포트에 물을 데운다.


-금방 따뜻해질거야. 뭐, 마실래?

-아뇨.


준하가 쇼파에 앉는 동안 나는 유자차를 준비한다.


-아직두 여기서 자요?

-아니...근처에 구했어.

-선배...

-응.


물이 데워질 때까지 탁자 앞에 서 있다. 준하에게 등을 보이고서....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나, 좀 볼래요? 왜 얼굴도 안보구 얘기해요...여기 앉아 봐요.


준하 옆에 가서 앉는다. 하은일 만난 걸 얘기해야 하는 걸까....잠깐 망설인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준하와 반대편을 응시한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안 볼거에요? 보기 싫어요?

-아니...못 보겠어.


준하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눈을 마주친다. 눈물이 차오른다. 준하의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다. 미안하다...내가 널 이렇게 만든 것 같아서....


-얼굴이 왜 그래요?....울었어요?

-넌, 얼굴이 왜 그래?....많이 힘드니?

-난, 견딜 수 있어요. 선배하고...하은이보단....그래도 견딜만해요.

-미안해...여기서 그만두자고 하지 못해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지금보다는 나아질 거에요.

-준하야...

-네.

-사랑해.....널, 정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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