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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믿음(Faith in the Future)

phantom |2026.01.07 06:03
조회 26 |추천 0

 

미래에 대한 믿음(Faith in the Future)

출애굽 이야기가 세상에 가져온 급진주의의 일부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쉐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세 가지 핵심 단어에 대한 지속적인 오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쯔학의 하나님, 야아콥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쉐는 자신이 보내질 사명을 듣고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하면, 그들이 ‘그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수수께끼처럼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4 )

이 구절은 그리스어로 ego eimi ho on, 라틴어로 ego sum qui sum 으로 번역되었으며, '나는 나다' 또는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뜻입니다. 초기 및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두 이 구절이 존재론, 즉 모든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존재 그 자체, 시간을 초월하고 불변하며 비물질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행위로 이해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하나님을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같은 전통을 이어받은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는 출애굽기의 공식을 하나님이 '참된 존재, 즉 영원하고 불변하며 단순하고 자족적이며 모든 피조물의 원인이자 원리인 존재(eternal, immutable, simple, self-sufficient, and the cause and principal of every creature)'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철학자들(philosophers)의 하나님이지, 아브라함(Abraham)과 예언자들(Prophets)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는 이러한 것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이 될지,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될지(I will be what, where, or how I will be)'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의 핵심 요소는 초기 기독교 번역본들이 모두 생략한 차원, 즉 미래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역사의 주인으로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개입하여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부터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인도할 분으로 정의하고 계십니다.

이미 11세기에 유다 할레비(Judah Halevi)는 유대교에 스며드는 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neo-Aristotelianism)에 반발하여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시작 부분에서 "나는 하늘과 땅을 창조한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이집트, 곧 노예의 땅에서 인도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며, 백성과 끊임없이 소통하시고, 부르시고, 촉구하시고, 경고하시고, 도전하시고, 용서하십니다. 말라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리라"(말라기 3:6 )라고 말할 때, 이는 순수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본질, 즉 변함없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적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약속을 어길 때에도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들입니다.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유산인 순수 존재의 신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에는 상응할 만한 인물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 즉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인 인물을 통해 그 간극을 메웁니다. 유대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며, 흙으로 빚어졌지만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두 신학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는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라는 말은 내가 역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쉐에게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쉐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손에서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대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모쉐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그분의 행적을 통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미래 시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그분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놀라움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들을 행하시고, 수천 년 동안 회자될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파급 효과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노예 생활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 힘이 곧 정의가 아니라는 것, 제국이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작은 민족도 하늘에 운명을 맡긴다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미리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쉐와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어야 한다. 내가 너희를 부르는 목적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지평선 너머에 있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이었는지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고대 종교들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기존 사회 계층 구조가 불가피하고 현실의 심층 구조의 일부이며, 시대를 초월하고 불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천상계에 계층 구조가 있고 동물계에 또 다른 계층 구조가 있듯이, 인간 사회에도 계층 구조가 존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질서였습니다. 그것에 도전하는 것은 무엇이든 혼돈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하기 전까지 종교는 현상 유지를 신성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통념을 뒤집을 것이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고, 가장 힘없는 사람들, 즉 외국인과 노예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집트에 대한 타격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수천 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는 계층 사회라는 개념, 또는 플라톤이 말했듯이 "영원의 움직이는 이미지", 즉 결코 변하지 않는 현실의 벽에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의 연속인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역사는 변화의 장이 되었다. 시간은 하나의 서사, 여정, 혹은 탐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는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라는 세 마디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은 미래 시제의 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메시아 시대라는 개념 속에서 미래에 황금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문명이 되었습니다. 토라 전체에 걸쳐 약속의 땅은 미래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쯔학도, 야아콥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40년 동안 백성을 이끌고 그곳으로 간 모쉐조차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약속의 땅은 항상 바로 그 너머에 있습니다. 곧 다가올 것이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날 저녁, 엘레인(Elaine)과 제가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의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그와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년간 심리학의 실무를 경험한 끝에 그는 긍정 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미래 지향적인 경향이 있는 반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즉 그가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몇 년 후, 그와 다른 세 명의 학자는 이 주제에 관한 책인 <호모 프로스텍투스(Homo Prospectus)>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종과 다르게 만드는지 물었습니다. 답은, 우리는 "미래로 뻗어 나가는 대안을 상상함으로써 안내받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동물입니다.

이것이 더 깊이 이해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인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지배하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과학은 원인을 찾습니다. 원인은 항상 결과에 앞서기 때문에 과학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 즉 유전자에서부터 유년기 경험, 뇌 화학 작용, 최근의 자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해 현재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과학은 인간의 자유의지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부정은 온화할 수도 있고 강경할 수도 있으며, 부드러울 수도 있고 잔인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환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정의한 "필연에 대한 의식(consciousness of necessity)"과 같은 자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미래를 지향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서 주전자에 물을 끓입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저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행동합니다. 과학은 미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도적인 행동에는 과학이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I will be what I will be)"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우리에 대한 믿음을 믿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선한 것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원하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힘을 주시기에 우리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함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악과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불의를 없앨 수는 없지만, 맞서 싸울 수는 있습니다. 질병을 없앨 수는 없지만, 치료하고 치료법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고대 민족이 어떻게 끊임없이 의학, 정보 기술, 나노 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국가 중 하나인지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를 써내려갑니다.

미래는 인간 자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제를 바꿀 수는 없지만 오늘 제가 하는 행동으로 내일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미래의 종교이므로 인간 자유의 종교이며, 이스라엘은 미래지향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중동의 억압적인 사막 속에서 자유의 오아시스로 남아 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스라엘의 적들은 대부분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남아 있는 한 그들의 백성은 결코 자유를 찾지 못할 것이고 이스라엘도 결코 평화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존중해야 하지만 과거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혁명적인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쉐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그리고 그분의 도움으로 그 미래를 건설하라고 부르십니다.

※ 필연에 대한 의식(consciousness of necessity): 칼 마르크스가 표현한 유명한 개념으로.자유란 필연성에 대한 의식이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란 단순히 변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자연적 힘(필연성)을 이해하고, 그것들에 맹목적으로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관여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임. 이는 자신의 "속박"(사회적 조건, 법률, 제약)을 인식하여 그것을 깨뜨리고, 강박적인 행동을 의식적인 자기 결정으로 바꾸는 것에 관한 것이란 개념.

참고:

The insightful study by Richard Kearney, The God Who May Be: A Hermeneutics of Religion,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1, pp. 20-38, from which these references are drawn.

Judah Halevi, The Kuzari = Kitab Al Khazari: An Argument for the Faith of Israel, New York, Schocken, 1964, Book I, p. 25.

Jonathan Sacks, Future Tense, Hodder and Stoughton, 2009, especially the last chapter, 231-52.

Martin Seligman, et al., Homo Prospectus.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글 전체 목차는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jewishlearning/22386597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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