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초의 기억은 할머니에게 밥그릇으로 머리를 맞은 엄마, 그런 엄마의 손을 끌고 보건소로 향하던 언니, 그언니를 울면서 그 뒤를 따르던 나이다.
정신지체 2급의 엄마는 읍내에서 가장 큰 약방의 뒷방에서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어느날 남동생이 실종(인지 도망인지 아직도 모른다.)되자 주인부부의 중매로 뇌병변과 정신지체 3급의 아빠를 만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죽은뒤 아들의 밥을 차려주고 빨래를 해주고 손주들을 낳아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장애가 없는 여자가 아빠랑 결혼해줄리가 없었다.
지능이 7세정도인 엄마를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고 못알아들으면 때리고 또 가르치고 다시 욕하고 때리는 일을 반복했다.
딸만 둘을 낳았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엄마를 "잡년"이라고 칭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엄마는 셋째를 임신하였고 셋째는 사산 되었다고 한다.
사산된 아이가 아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할머니는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주방에서 아빠의 밥상을 차리던 엄마에게 밥그릇을 던졌다.
보건소로 향하던 기억이 최초라고 했지만 언니가 수십번은 얘기해준거라 내 기억인지 언니의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덜덜덜 떨면서 치료를 받던 엄마와 눈치없이 엉엉 울던 나를 보면서 언니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어릴적 나의 기억은 손에 꼽을정도로 적지만
그 시절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숨이막힌다.
할머니는 늘 5시에 일어나서 자고있는 엄마의 머리를 발로 치면서 깨웠다. 같이 아침밥을 차리고 집안일 지시를 해놓고 6시 정도에 시장으로 일을하러 나가셨다.
아빠에겐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집 근처의 500평 남짓한 밭이 있는데 그게 아빠의 유일한 돈벌이였다.
하지만 사실상 돈이 되지는 않았다.
그 돈도 안되는 땅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복지도 혜택도 없었고 일하다 다치는 병원비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거동도 불편한 아빠가 농사지은 작물을 할머니는 시장에 내다 팔곤 했다.
아빠의 유일한 장점은 술, 담배를 안한다는 것.
단점은 폭력적인 것, 분노조절이 안된다는 것.
엄마는 으레 7살짜리 꼬마들이 그렇듯 통제가 어렵고 욕구가 강하다.
엄마는 아직도 할줄 아는 요리가 10개도 안된다.
부모님 모두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기때문에 우리집은 할머니가 집안의 기둥이였다.
내가 중3이 되던 해, 아직 그늘진곳은 눈이 녹지 않은 2월의 일이다.
시장에서 낙상을 당한 할머니가 응급실에서 깨어나셨다.
추가 검사를 해야한다는 의사선생님에게 욕을하며 언니와 내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밤새 앓는소리를 내시다가 잠에 드셨다.
다음날 할머니는 6시가 넘어서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우리집안의 기둥이, 생리대 살돈이 없는 자매가 몇장없는 수건을 잘랐다고 머리카락을 잡아뜯은 악마가, 밑창이 해진 신발에 고무판을 붙여 신고다니던 스크루지가,
그렇게 가버렸다.
그 후, 은행원을 목표로 상고를 다니던 언니는 책가방이 아닌 작업복을 선택했다.
우리집의 사정을 잘 모르던 담임선생님은 언니를 몇번이나 설득하였지만 자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빠와의 전화통화 한번으로 꿈많던 언니를 놓아주었다.
그런 언니의 희생으로 나는 서울소재의 대학에 합격했지만 한 학기만에 휴학을 하였다.
그리고 전직원이 30명도 되지 않았던 작은 회사에 취업하였다.
언니의 어깨에 놓인 짐을 덜어주고픈, 사실은 내맘이 편하고자 한 선택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장학금을 받을 수 없는 성적의 내가 대학교를 다니는건 사치였으니까.
아빠와 엄마는 우리 자매의 생일은 모르지만 본인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몇주전부터 먹고싶은것과 갖고싶은것을 요구한다.
언니랑 나는 어릴적부터 생일을 챙겨본적이 없기때문에 지금도 집에서는 챙기지 않는다.
몇년 전, 언니에게는 6-7년 만나던 남자가 있었는데 남자쪽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다.
어차피 결혼생각이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부모님 보살피다가 시들어가는걸 보고싶지 않다고 덤덤히 말했지만
언니방에는 아직도 전남자친구가 언니 생일에 사준 선물들이 그대로 있다.
언니는 표현도 적고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아서 내가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한다.
그런 언니가 얼마전에 휴직을 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나아지지 않는 형편때문에 고작 6개월밖에 못해주었지만
언니에게 이런 자유는 40년 넘는 세월동안 처음이다.
그곳에서 봄을 맘껏 느끼고 오라고했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싫다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언니에게는 18살부터 다녔던 공장에서 친해진 언니가 있었는데 그언니가 한달전쯤 세상을 떠났다.
그언니와 우리자매는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보다는 맏이인 우리언니와 꼭 닮은 사람이였다.
우리언니처럼 위태롭게 버티던 그언니가 무너진건 어머니의 치매였다.
이미 지옥인데 더 밑바닥이 있을줄 누가 알았을까
그 절망감을 누가 알아줄까
가난한 집에서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두 남녀가 결혼을 하는건 재앙이다.
그리고 그 부부가 애까지 낳는건 죄다.
그 삶을 오롯이 지켜본, 지나온 나의 생각은 그렇다.
장애인부모 수발을 위해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우리 셋뿐만은 아닐것이다.
우리같은 사람이 더는 생기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