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제사에 대한 예언적 관점
이번 주 파라샤의 주제인 제사(Sacrifices)는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토라에서 제사에 할애된 방대한 분량뿐만 아니라, 제사가 토라의 중심서인 ‘바이크라(וַיִּקְרָא, 레위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2000년 전 제 2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제사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것은 제 1성전 시대의 선지자들이 제시한 제사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 비판은 날카롭고 심오했으며, 선지자들의 가장 강력한 설교 중 다수를 이루었습니다. 가장 초기의 비판 중 하나는 선지자 사무엘(Samuel)이 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기뻐하시겠느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큼이나 기뻐하시겠느냐? 참으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순종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사무엘상 15:22).
아모스(Amos)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물이나 소제물을 드린다 해도 내가 받지 아니하겠고, 너희가 살진 짐승을 바친다 해도 내가 돌보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가 물처럼 솟아나고, 의가 끊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아모스 5:21-24).
호세아도 마찬가지로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선함이며, 번제물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호세아 6:6).
여러 시편에서도 비슷한 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배고프면 너희에게 말하지 않으리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황소의 고기를 먹겠느냐,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시 50:8-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시고, 내 입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주께서는 내가 제물을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번제물을 원치 않으시나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제물은 상한 마음이니, 하나님, 주께서는 상하고 으스러진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리라” (시 51:17-19).
예레미야는 제사 제도가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건져 낼 때, 그들에게 번제나 희생 제물에 관해 말하거나 명령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이것이다. ‘내 말을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길만 걷되, 그리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 7:22-23).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티샤 베아브(Tisha b’Av) 전 샤밧 하존(Shabbat Chazon)에 읽는 이사야서 서두의 구절입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제물을 무엇하리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번제물과 숫양과 살진 짐승의 기름진 고기를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 수소와 어린 양과 염소의 피를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나아올 때, 누가 너희에게 이같이 내 뜰을 짓밟으라고 요구하였느냐?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의 향은 내게 가증하니라’” (사 1:11-13).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진 이 일련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습니다. 제사는 명령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제물은 거룩한 장소에서 행해지는 신성한 행위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지자들의 분노와 질책을 불러일으킨 것일까요?
그들이 제사 그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근교에서 사람들이 … 번제와 희생 제물, 소제물과 유향을 가져오고, 주님의 성전에 감사 제물을 바치러 올” 날을 예견했습니다(예레미야 17:26).
마찬가지로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서 나의 기도하는 집에서 기뻐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와 희생 제물은 나의 제단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리니, 이는 나의 집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라” (사 56:7).
그들은 제사 제도를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들을 뼈저리게 괴롭힌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잔인하게 대하며, 불공정하게 대하고, 무감각하거나 냉담하게 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한, 그게 전부다.” 바로 그 생각이 선지자들을 분노로 불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하나님도, 율법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토라가 인류에 대해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닮게 하신 우주 유일의 피조물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저지르는 죄는 곧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입니다.
유대 민족의 첫 사명 선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택한 것은 그가 자녀와 후손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려 함이라” (창 18:19).
여호와의 길이란 동료 인간들에게 공정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문맥상 이는 하나님께서 소돔 사람들이 악하고 죄인임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제사에 관한 책인 레위기에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계명(레 19:18, 33-34)을 함께 발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제사는 이웃과 이방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계명에서 우리와 동료 인간 사이의 계명으로의 전환은 이음새 없이 매끄러워야 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는 모두 사람들이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에는 꼼꼼했지만, 그 이면에는 뇌물 수수, 부패, 정의의 왜곡, 권력 남용, 그리고 강자들이 약자들을 착취하는 사회를 목격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속에서 심오하고도 위험한 모순을 보았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 그 자체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대 시대에 성전과 제사장, 제사를 가진 민족은 유대인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든 민족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겉으로 보기에 이교도 이웃들의 관습과 많이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의 제사 제도는 완전히 다른 신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종교에서 제사는 신들을 달래거나 화해시키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제물이 우주를 지탱하는 신들에게 영양을 공급한다고 믿었습니다. 월터 버크하트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식용으로 동물을 죽일 때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양심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추측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유대교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는 뇌물을 받거나 달래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께 그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바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탱하시는 것이지, 우주가 하나님을 지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를 통해 바로잡힌 잘못이 다른 잘못들을 용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사 제도에서 의도와 마음가짐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 그분은 나의 다른 잘못들을 눈감아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즉, 온 땅의 재판관을 뇌물로 매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신성한 행위를 이교적인 행위로 전락시키고, 토라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이는 종교적 예배를 올바르고 선한 길로 가는 수단에서, 잘못과 악을 행하는 자들의 양심을 달래는 수단으로 바꿔버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류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가가 기억에 남게 강조한 요점입니다. “사람아, 주님께서 네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무엇이 선한지 네게 알려 주셨다. 곧 공의를 행하고, 선을 사랑하며, 네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다.”(미가 6:6-8).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소송을 변호하였으므로 복을 얻었도다.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22:16).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안내서』(III, 54)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이것으로만 자랑할 것이니, 곧 나를 아는 지혜가 있어, 내가 땅에서 자비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주님임을 아는 것이다. 이는 내가 이 일들을 기뻐하기 때문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예레미야 9:2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비와 정의, 그리고 공의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제사 제도의 위험성이 사람들을 두 개의 영역, 즉 성전과 세상,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돌보는 일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대교는 서로 분리된 두 영역이라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율법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심리적, 윤리적, 영적으로 이들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체계의 일부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웃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를 꺼린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말을 들어달라고 청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꺼린다면,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이며, 예레미야와 마이모니데스가 말했듯이, 이는 이 땅에서 자비와 정의, 그리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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