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느리고 느린 가게" 리광푸 지음, 신순항 옮김. (2022). 시공주니어
나무늘보 아가씨는 바나나를 천천히 내려놓고,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그리고 다시 느릿느릿 칼을 들어 그라탕용 감자의 껍질을 깎기 시작했어요. 나무늘보 아가씨는 시작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감자 하나를 다 깎지 못했어요. 시계를 본 멧돼지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느리게 깎고 있을 거예요? 다 깎을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우리 애들 굶어 죽겠어요! 감자 그라탕 필요 없어요. 다른 가게 가서 사겠어요."
- "느리고 느린 가게" 중에서
음식 책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인데 어린이도서관에서 일하다보니 각종 음식이 등장하는 그림책과 동화책을 쌓아두고 읽는 중입니다.
이번에 읽은 "느리고 느린 가게" 역시 그런 식으로 접하게 된 책.
행동이 느린 나무늘보 아가씨가 신선한 음식 구하기 힘든 음식사막 지역에 식당을 차리고 장사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직원이 그랬듯, 너무나 느린 그 속도에 손님들은 다들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심정은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라 "갑갑해서 내가 그냥 만들고 말겠네"를 외치며 감자 그라탕을 만들어 봅니다.
그것도 손이 훨씬 많이 가는 도피네식 그라탕으로 말이죠.
우선 감자 껍질을 깎고, 만돌린을 이용해서 2mm 정도 두께로 잘라줍니다.
다음 날 아침, 나무늘보 아가씨는 미리 식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먼저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삶았어요. 그 다음 삶은 감자를 으깨고 간을 했어요. 그리고 그릇에 담아 치즈를 뿌리고 오븐에 넣었어요. 조금 있으니 따끈따끈한 감자 그라탕이 만들어졌어요.
- "느리고 느린 가게" 중에서
책에서는 그냥 감자를 삶아서 으깬 다음 치즈를 얹어 구웠지만, 실제로는 이래서야 치즈를 얹어 구운 매시드 포테이토가 될 뿐입니다.
원칙적으로는 베샤멜 소스(버터와 밀가루를 볶은 다음 우유를 붓고 졸여서 만드는 소스)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고, 여의치 않다면 하다못해 크림 소스라도 넣어 줘야 그라탱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거든요.
다진 마늘과 생크림, 허브, 소금, 넛멕(육두구)을 끓여 크림 소스를 만듭니다. 그리고 얇게 저민 감자를 넣어 삶아줍니다.
생크림이라고 하면 설탕 넣어 거품낸 크림을 바른 디저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짭짤한 소스로 만들었을 때의 파괴력이아먈로 크림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무늘보 아가씨의 요리 속도를 감안하면 크림 없이 그냥 으깬 감자로 그라탕을 만드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자칫 실수하면 크림이 끓어 넘치거나, 절반 정도만 삶아야 하는 감자가 푹 익는 바람에 오븐에 다시 한 번 구웠을 때 오버쿡 되기 십상이거든요.
감자를 워낙 얇게 저민데다가 나중에 오븐에 다시 한 번 요리할 것을 감안해서 짧은 시간 동안만 삶아야 합니다.
그래도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 감자가 익기 전에 치즈를 강판에 갈아낼 시간 정도는 나옵니다.
원래대로라면 파르마지아노 외에도 그뤼에르를 함께 갈아서 섞곤 하는데 파스타에 주구장창 갈아 올리는 파르마지아노에 비하면 그뤼에르는 활용도가 좀 떨어지는지라 냉장고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냉동실에 있던 피자 치즈도 함께 얹어서 오븐에 굽습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감자 그라탕. 한 스쿱 떠내면 치즈가 길게 늘어지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먹음직스럽습니다.
다만 책을 읽으며 약간 의아했던 점은, 손이 느린 나무늘보 아가씨가 감자 그라탕을 미리 만들어 놓은 대목.
원래 감자 그라탕은 크림과 치즈를 구워 만드는 요리인지라 식으면 끔찍하게 느끼해지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의 불만은 여전히 폭주합니다.
멧돼지 엄마가 감자 그라탕을 한 숟가락 먹어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어요.
"사장님. 감자 그라탕이 어째서 이렇게 차가운 거예요? 위에 치즈가 전부 굳었잖아요. 치즈가 길게 늘어나지 않아요. 정말 맛없어!"
- "느리고 느린 가게" 중에서
사실 이 동화책에서 나무늘보 아가씨가 겪는 모든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요리 잘한다고 했어!"라는 믿음만 갖고 식당을 차리는 자영업자들 대다수가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아봤자 손님 치르며 5~6인분 정도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몰려드는 수십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대응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무늘보 아가씨 역시 레스토랑 컨설턴트가 제시할만한 해법을 찾아냅니다. 음식을 중간 단계까지만 요리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마지막 조리 과정을 거쳐서 내거나, 메뉴의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다양한 음식을 한정된 수량만 판매하는 전략이지요.
멧돼지 엄마가 세 아이들을 재촉했어요.
"좀 빨리 걸으면 안 되겠니? 늦게 가면 먹지도 못해! 감자 그라탕을 5인분밖에 안 만드는데 우리는 벌써 4인분이잖아!"
멧돼지 엄마가 계속해서 아이들을 재촉하자, 원숭이 선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어요. 그러고는 나무늘보 아가씨네 느리고 느린 가게로 갔어요. 원숭이 선생도 감자 그라탕이 먹고 싶어졌거든요.
- "느리고 느린 가게" 중에서
물론 이런 전략에는 큰 단점도 있긴 합니다. 일단 요리가 너무나 맛있어서 사람들이 한정판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설 정도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테이블 회전이 느려서 소량만 판매해도 이익이 남을 정도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냉정한 사회의 시선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이고, 동화에서 말하는 "느리고 느린 가게"는 태생적으로 단점이 있는 사람도 스스로 변화하고 고쳐나가면 주변 사람들 역시 이를 포용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따뜻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빌려온 듯한 세 돼지를 끌고 가며 재촉하는 엄마 멧돼지에게 많이 공감했네요.
꼼꼼하게 감자 그라탕의 맛을 따지는 것도 그렇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성장기의 두 아이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말이죠.
이틀은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넉넉하게 만든 감자 그라탕인데 다음 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쪽이 더 하드코어한 요리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