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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다른 일면

완소혜교 |2006.11.16 17:47
조회 96 |추천 0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세종 세종대의 유명한 정승인 황희는 청백리로 유명하지만 후세의 그런 인식과는 다르게, 사간원으로부터 불법적 치부에 대하여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 우의정이었던 황희가 사위의 뒤를 봐주어 불법적으로 전결을 차지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위의 청탁을 받은 셈인데, 조선에서는 고위관리에게 청탁을 하는 것이든 스스로 청탁을 받는 것이든 모두 중죄로 치죄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간원에서 탄핵하였으므로 조선 조정의 관례상 탄핵사유가 사실이든 아니든 사임하는 것이 도리였는데, 황희가 스스로 사임하지 않았다. 세종도 황희를 아꼈으므로 벌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간원의 성토가 심해지므로 세종은 어쩔 수 없이 황희를 유배 보냈다.



그러나 유배 교지의 먹이 채 마르기도 전인 8개월 뒤, 세종은 오히려 황희를 영의정으로 승차시켜 조정에 복귀시켰다. 염치를 소중히 여기는 조선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벌을 받으면 정계에서 영구히 축출되거나 한동안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세종이 부정축재 혐의가 있는 신하를 신임한다는 이유 하나로 관례를 어기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직위를 승급시켜 다시 부른 것이다.




강직한 사간원과 사헌부가 이를 그대로 보고 넘길리 없었다. 국왕의 처신이 잘못되었으므로 양사가 함께 황희의 복직이 잘못되었음을 간쟁하였다. 그러나 세종의 답은 황희를 다시 파직하는 것이 아니라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을 모두 하옥하는 것이었다. 언론기관의 관원들을 바른 말을 한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가두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신하의 과오에는 관대하면서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소임인 사간원과 사헌부에게는 이유 없이 매서웠던 세종의 일면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태종 시절 태종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으킨 옥사에서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에 옥사를 주도했던 자가 유정현으로, 세종대에는 영상을 지냈다. 세종이 자신의 장인을 죽이는 데에 일조했던 유정현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즉위후에도 유정현을 여전히 재상으로 기용했다. 그에 감복하여 유정현이 소헌왕후의 생신 연회에서 그냥 하례만 올리면 되는것을 스스로 심온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려 세종과 왕후에게 크게 부복하였다.논어에서 과한 예는 옳지 않다 하므로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에서 유정현의 그릇됨을 간쟁하였다.




그렇다면 국왕은 양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영상 유정현의 체면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적당히 유정현에게 훈계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 때에도 양사의 관원들을 삭탈관직 시켰다. 대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공박한다는 죄목이였다.세종의 논리가 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다. 양사의 간쟁이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교의 나라의 수장으로서 유교적 원리를 지키면서도 신하들 모두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국왕이 할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대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바른 말을 하는 양사의 관원들에게는 편파적인 처분을 내렸다.이러한 몇 번의 세종의 편파적 처분에 의해 세종대에서는 관리 감찰과 간쟁이 주 임무인 사간원과 사헌부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대신들의 부정이 자행된 것이 사실이다.



세종은 또 금부민고법(禁府民告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들어 시행한 왕이다. 금부민고법이란, 지방의 수령이 살인이나 반역의 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면책특권을 가진다는 법이다. 조선의 행정구조상 지방의 수령은 임명직이기는 하지만 행정과 군사, 사법 등 막강한 권력을 갖는데 이런 초법적인 면책특권이 주어졌으니 부정부패가 엄청나게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소를 금지함에도 어느 백성이 학정을 견디지 못하여 수령을 고소하자, 세종은 부정을 저지른 그 수령을 치죄하지는 않고 고소한 백성을 장 100대를 치고 3천리 유배를 보냈으며, 금부민고법을 강화하여 반역의 죄가 아닌데도 고소를 한 경우 고소자에게 엄한 벌을 내린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러니 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대에도 대규모는 아니지만 이 법에 의하여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민란이 수차례 있었다. 원래부터 말도 안 되는 법이었으므로 나중에 폐지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에 의해 백성이 겪은 고초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출처 : 네이버 오픈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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