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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착하게 살아보아요.

발에채이는애 |2009.02.13 23:34
조회 119 |추천 1

방금 시청에 있는 노래방에 갔다왔어요.

끝나고 나니까 밤 10시 정도 되었었는데,

비가오는 거에요. 뭐 그렇게 심한 비는 아니고 그냥

맞다보면 다 젖어서 막 신경질나고 축축해서 죽고싶고 그런 정도의 비?

 

 

근데 노래방 들어가기 전에 친구 하나랑 저랑

 

가위바위보해서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 집까지 바래다주기 내기를 했었거든요.

네. 둘 다 남자입니다. 그런데 이러고 노네요.

요즘 유행하는 게이라든가 내가 고자라니 라든가 뭐 그런 거 아니구요.

그냥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보다 더 좋아하는 평범한 이 시대의 청년들이에요.

 

 

비가 와서 할까말까 막 고민하다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제가 그냥 계획대로 하자고 제안했지요.

 

물론 따듯한 마음씨의 소유자인 저로써는, 이겨도 굳이 저희 집까지 걔를 끌고 갈 생각은

정말 김제동씨의 눈만큼도 없었답니다.

그냥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런 반전 드라마 있잖아요.

그런 걸 찍고 싶었어요. 이길 자신은 있었거든.

이 친구는 조금 멍청한 지능의 소유자여서요.

 

친구야. 물론 내가 이겼지만. 어떻게 친한 친구인 너를, 나의 자랑인 너를

이 비가 쏟아지는 날, 너의 집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우리집까지 데리고 갈 수 있겠니.

우리, 훗날 한 쪽이 지금처럼 우위에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지금 같은 마음 변치 말자. 사랑해♡

 

라고 말해 줄 생각이었어요 저는.

 

 

근데 졌어. 남자는 주먹 아닌가요? 그걸 까먹었어. 나도 모르게 가위를 낸거야.

내는 순간 느꼈어요. 졌구나.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표정이 썩어갔지요.

하지만 한 번 낸 손은 되물릴 수 없기에..

 

..그리고 내심 걱정은 안 하고 있었죠. 친한 친구니까.

당연히 제가 할 예정이었던 말을 제게 해주지 않을까.

그럼 난 감동하면서 그래 친구야 너 밖에 없다.

라며 뜨거운 우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거죠.

 

 

 

 

 

 

...뭐해? 가자.

 

 

 

 

 

아아..저는 제가 소유한 귀를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건 아닌데. 아닌건데.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지고

납치와 살인과 감금이 유행하는 시대가 왔다 해도 우리 사이마저 이러면 안되는건데.

그래, 농담이겠지. 얘가 반전을 좀 아네. 이래야 묘미지.

그럼 난 적당히 속아주는 척 하면 되겠다.

 

 

..뭐,,,뭐? 정..정말 가려고? 너네집까지? 날 데려가려고? 이 비가 오는데? 설마? 진심으로?

 

 

응. 가자.

 

 

이야. 배우야 배우. 안성기가 울고 가겠네. 저 단호한 표정 하며. 흔들림 없는 말투.

솔직히 전 감동했어요. 이렇게 재능이 있는 애가 내 친구였다니.

그래서 전 호기롭게, 남자답게, 평소처럼 강인하게 대답했죠.

 

 

 

 

그래. 가자! 약속은 약속인거니까!

 

 

 

 

 

 

 

 

 

 

 

 

그렇게 친구집까지 비맞으면서 갔어요.

억장이 무너졌어요. 억울했어요. 이게 아닌데.

난 감동 드라마를 원한건데. 이딴 싸이코패스 저질 삼류 저예산 영화처럼

속이 훤히 보이고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런 시나리오를 원한 게 아니었는데.

 

 

와...세상엔 나처럼, 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이렇게도 잔인하다니..

우리집까지 이제 걸어서 한시간인데..언제 가요...비 쫄딱 맞으면서..

나 귀찮다고 지갑도 안 들고 나와서 땡전도 한 푼 없었거든.

지붕 달린 것도 못 타고 그냥 쌩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친구 집에 오니까 비가 그쳤어요.

참 내가 바보같게 느껴졌어요.

세상은 그렇게 따듯한 곳이 아니었어요.

가진 자에겐 관대하고 없는 자에겐 모질기만 한 그런

지옥같은 곳이었어요. 지랄같았어요. 쉐떠뻑이었어요.

이제 더는 세상을 믿지 않으리. 난 오늘 철이 들었어요.

앞으로는 나도 모질게 살리라 다짐했지요.

 

 

 

그때였어요.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지요.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몸을 더듬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생각했지요. 요즘 산성비는 무섭구나. 애가 그냥 맛이 갔네.

 

 

근데 아니었어요. 친구는 그만 핸드폰을 노래방에 두고 와버린 것이었어요.

평소에 꼼꼼하기로 소문난 아이였는데.

그만 이런 바보말미잘같은 짓을 하고야 만 것이었어요.

 

 

 

 

 

 

어쩌겠어요. 다시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그래도 아직 세상은 조금 살만한가? 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저 역시 많은 길을 걸었고, 지쳐있는 상태여서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던 와중 피곤한 눈에 포착된 작고, 길쭉하고, 네모난 파란색의

축복받은 초상화 한 장이 땅바닥에 곱게 접힌 채 떨어져 있는 게 목격됐어요.

저도 모르게 자석에 이끌리듯 서둘러 허리를 굽혀,

차가운 바닥에서 비를 맞고 계시던 퇴계 이황 선생을 품에 안았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때마침 온 버스에 몸을 싣고,

창 밖으로,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친구를 보며 씨익 웃어줬지요.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몬순과도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세상은 따듯한 곳이었어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못되게 살면 벌을 받는, 공정하고 밝은 곳이었어요.

흥부는 보물을 얻고, 놀부는 도깨비한테 죽도록 뚜드려맞는 곳이었어요.

 

 

 

 

 

우리 모두 착하게 살아보아요. 착한 사람에겐 이처럼 복이 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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