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마치 첫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죽음이라는 이 미지의 영역에 대한 각별한 호기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옹호했다는 기록은 없다. 플라톤은 `운명의 판결'에 순종해야 한다면서 자살에 반대했다. 우리는 신의 소유물로서 신이 우리를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는 자살이 삶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후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은 고통을 끝내는 방법으로서 자살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노쇠함이 찾아와서 정신이 그 기능을 하나씩 잃어갈 때, 그래서 “삶은 빼앗기고 오직 호흡만이 남겨질 때에 나는 썩어서 흔들리는 이 건물을 떠날 것”이라면서 자살을 옹호하였다. 노예 철학자로 알려진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 역시 “문이 열려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로 자살을 옹호하였다. “어린 아이보다 더 두려워하지 말라. 아이들이 놀이가 싫증나면 `난 그만 할래'라면서 울듯이, 그대도 비슷한 처지에 놓이거든 `난 그만 할래'라고 말하고 떠나라. 그러나 떠나지 않겠다면 울지 말라…. 방안에 연기가 가득한가? 아직 견딜 만하다면 나는 남을 것이고, 연기가 지독하다면 나는 떠나리라. 그대는 잊지 말라. 문이 열려 있음을.” 기독교 철학자들에게서는 자살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어거스틴은 자살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살인은 전쟁이나 형의 집행 같은 경우에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자살은 이런 식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없다. 육신의 고통도, 처벌에 대한 공포도 자살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심지어 순결이나 고결함을 지키려는 고상한 명분도 자살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고결한 사람은 삶의 질곡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에 맞서는 사람이다. 토머스 아퀴나스는 자살에 반대하는 몇 가지 논증을 펴는데, 그중에 “자살이란 도둑질과 같은 것”이라는 대목이 있어서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은 신의 소유이며 인간은 그저 그것을 빌리고 있을 뿐인데, 자살한다는 것은 신의 소유를 훔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만찬홍 한남대 교수 개인적으로 나는 흄의 명료함보다는 칸트의 심오함을 더 경모한다. 하지만 자살에 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던 칸트보다 담대하고 솔직하게 견해를 피력하였던 흄이 더 시원하다. 자살에 관한 그의 짧은 에세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출판을 미루다가 그가 죽은 후에야 발표되었다는데, 여기서 그는 자살이 신이나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로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세세하게 비판하면서 물리친다. 그에 따르면, 신이 자연의 법칙을 세웠으되 인간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연의 과정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였는 바, 자살은 행복을 위하여 자연의 과정을 변경시키려는 시도로서 신의 계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삶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라면 선하신 신은 자살을 통하여 불행을 종료시키는 것을 막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워 이런 견해에 반대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 흄은 우주에 있어서 한 인간의 생명이 가재 한 마리의 생명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가졌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신에게 달린 문제이며 인간이 이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흄의 대답은 재미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면 인간들이 의학기술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또한 잘못일 거라고 반박하고 있다. 자살은 신이 정한 자연의 질서에 개입하는 거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박할 수 있다. 자살이 신이 정한 질서에 개입하는 것으로서 잘못된 거라면, 집을 지어서 비바람을 피하고, 땅을 일구어 소작을 늘리는 등 인간의 모든 문명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흄은 자살이 타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을 편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사회에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될 뿐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 줄 책임이란 것은 우리가 사회로부터 받는 혜택과 관계된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내가 받는 혜택도 없으므로 이익을 가져다 줄 의무 같은 것도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흄은 나의 존재가 사회에 짐이 된다면 자살은 허용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이 대목에선 시쳇말로 흄이 좀 오바한 것 같다. 사회에 짐이 된다거나 득이 된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공리주의적인 태도인데,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불행의 총량을 줄이는 길이라면 고통받는 자들, 궁핍한 자들의 자살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은 도덕의 문제에 관한 한 공리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를 폭로할 뿐이다. 민찬홍 한남대 교수
파산한 사업가의 죽음
자살을 정의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 독자로부터 두 개의 질문을 받았다. 지난 글에서 나는 예수와 소크라테스와 강재구 소령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걸로 취급하고 싶어했는데, 거기서 도달하였던 정의, 즉 `죽기를 원하여, 죽을 의도로 행해진 행동의 결과로 발생한 죽음'이라는 자살의 정의는 정말로 이 죽음들을 제외시키는가 하는 것이 첫번째 질문이었다. 두번째 질문은 정말 이 죽음들은 자살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죽음들이 만인의 추앙을 받을 만큼 훌륭한 죽음들이기는 하지만, 역시 자살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죽음들을 자살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자살'에 대하여 내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두 질문 모두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어서, 도무지 글을 이어가기가 무서워진다. 정말 그렇다. 자살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실상 예수의 죽음도 자살에서 제외시키지 못한다. 한편으로 보면, 예수는 죽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는 죽기를 원하였고 그것을 택하였다. 모든 이들이 인정할 만큼 명백한 자살의 경우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죽기를 원하였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복할 수 없는 파산지경에 몰려 자살을 택한 사업가를 생각해보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죽기를 원하였는가? 그렇다. 그는 죽기를 원했고 그럴 의도로 행동해서 성공하였다. 그는 정말로 죽기를 원했을까? 물론, 그는 정말로 죽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죽기를 원했을까? 이쯤 되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는 결코 죽음을 즐거이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사태를 돌릴 수만 있다면 돌려놓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죽음을 선택함에 있어서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경우와 이 사업가나 다른 명백한 자살의 경우를 가르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 사업가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으면서도, 예수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느끼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