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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高句麗史 연구와 大漢族主義 비판 ☞隋麗戰爭, 唐麗戰爭을 중심으로

개마기사단 |2009.03.27 21:40
조회 137 |추천 0

 

● 특별한 기억의 전승 고구려

高句麗와 隋간의 전쟁이 있은지 780여년이 지난 어느 날 朝鮮王朝의 開國功臣인 旴齋 趙浚은 淸川江이 바라다보이는 白相樓라는 누각에서 明國의 사신 祝盟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詩 한수를 지었다.

'薩水湯湯庭碧虛 隋兵百萬化爲魚 至今留得漁樵語 不滿征夫一等餘 , 탕탕히 흐르는 저 푸른 살수에 수나라 백만 대군 장사 지냈지. 낚시꾼 나무꾼들 신나는 말이 그까짓 대국 놈들 별 것 아니야.'

이 시를 들은 明國의 사신 祝盟은 얼굴을 붉히고 붓을 던져 답변할 시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旴齋는 시로써 조상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明國 先祖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또한 당시 明이 大國이라고 해서 조선을 얕잡아 보지 못하게 한 뜻도 담겨 있었다.

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조선 제9대 국왕인 成宗은 1482년에 기존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는 重試인 進賢試에서 策文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고 전한다.

"寡人이 德望이 적고 事理에 어두운 사람으로서 조상의 큰 起業을 계승하여 지키게 되니 항상 나라를 보존하고 변방을 방비하는 計策을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 요령을 알지 못하겠노라. 돌이켜보건대 우리나라는 남방과 북방에서 敵國의 침입을 받은 일이 많았다. 그러나 고구려에 있어서는 隋, 唐에 능히 대항하여 천하에서 强國으로 일컫게 되었으니 그 敵侵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계책이며 어떤 인재들이었는가?"

成宗에게 있어서 고구려는 治國에 모범을 보인 祖上의 나라였다. 고구려가 어떻게 隋, 唐의 침입을 물리쳤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시대 여러 인물들에 의해 거듭 언급이 되어졌다.

同知中樞院事 梁誠之는 1464년 世祖에게 軍制 문제와 관련해서 올린 上疏에서 "臣이 그윽이 우리나라의 歷代의 일을 보건대, 隋와 唐은 고구려에 大敗하였고 沙寇도 또한 고려에 패배하였습니다. 姜邯贊이 契丹의 삼십만 대군을 막을 때 한필의 軍馬도 돌아가지 못하였고 尹瓘이 女眞을 몰아낼 때에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九城을 쌓았으니 그러한 사실이 역사에 실려 있어서 훤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역대의 자랑스러운 戰史에서 隋와 唐의 침입을 물리친 사실은 언제나 거론되는 일이었다. 梁誠之는 이미 1458년 임금에게 국가에서 제사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인 인물로 12명의 제왕과 24명의 신하들을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의 始祖인 皺牟聖王과 함께 薩水大捷의 주역인 乙支文德과 當代의 고구려 국왕인 嬰陽太王을 함께 추천한 바 있었다.

梁誠之의 추천을 받아들인 世祖 역시 高句麗史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世祖는 兵要를 편찬하면서 武官들에게 쉽게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隋 煬帝와 唐 太宗이 親征을 하였어도 고구려에 승이하지 못한 일 등을 듣게 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로다."

世祖는 고구려가 隋 煬帝와 唐 太宗의 侵攻을 물리친 사례가 조선이 외적을 물리치는데 매우 중요한 교과서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世祖는 평양에 고구려 사당을 만들고 매년 제사를 지냈으며, 嬰陽太王과 乙支文德에게도 제사를 지내주었다.

조선에서는 世宗이 檀君朝鮮과 箕子朝鮮, 三國의 始祖廟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올려주었다. 이에 앞서 世宗은 삼국 가운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특정 국가를 정통왕조로 삼아 一國의 國祖만을 제사지내는 것을 반대한 바 있다.

이후 역대 조선의 군왕들은 고구려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특히 肅宗은 乙支文德을 높게 평가했다.

安鼎福은 東史綱目에서 612년 乙支文德이 탁월한 전략과 뛰어난 용병술로 隋의 대군을 격퇴시킨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후로부터 비록 唐 太宗의 신통한 武德으로도 安市城戰鬪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遼, 金, 蒙古의 흉악한 무리들도 우리나라에 크게 害毒을 끼치지 못했고, 契丹, 盒亂, 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나라의 군대에 의해 섬멸되었으니 천하 후세에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기어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것은 乙支文德이 남긴 功積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평가는 단지 조선시대 사람들만이 가졌던 것은 아니다. 新元史 卷249 高麗列傳의 기록을 보면 元 世祖(蒙古 忽必烈汗)는 고려가 元에 항복을 선언하자 크게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高麗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로 唐 太宗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으나 능히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王世子가 朕에게 와서 항복해오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닌가!"

元 世祖가 당시 왕위계승 문제로 다툼이 벌어지는 도중이어서 고려의 항복이 크게 고무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고려를 고구려의 繼承國으로, 또 唐의 침입을 물리친 강력한 고구려의 후예로써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구려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이 강한 나라로 인식되었음은 安鼎福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1593년 조선을 침략한 倭軍을 함께 물리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조선에 온 明國의 사신 劉原嵬는 조선 제14대 국왕인 宣祖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朝鮮王朝實錄은 전한다.

"貴國은 高句麗 때부터 强國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들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變亂을 초래한 것입니다."

明國의 사신 劉原嵬 역시 조선을 강력한 고구려의 후예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隋, 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은 오래도록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겨 나라를 잃었던 20세기 초에 救國抗日鬪爭을 벌인 의병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는데, 여기에 乙支文德의 이름이 거론된다.

'閑山島에서 倭敵을 쳐서 破하고 淸川江水 隋兵 백만 沒殺하오신 李舜臣과 乙支公의 用陳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怨首 쳐보세. (用陳歌)'

●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고?

그런데, 2003년 6월 24일 중국 공산당의 대표적인 언론으로 알려진 光明日報 역사 지면에 邊衆이 기고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는 글이 실렸다.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이며 고려와 조선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宋史, 明史 등 후대 기록의 잘못 때문이고, 高句麗史는 중국 역사에 속한다는 이 기사는 곧 한국에 소개되었다.

2003년 7월 15일 中央日報에서는 '중국 학계 역사 빼앗기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중국이 高句麗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해석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인 東北工程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어서 2003년 10월 12일 KBS 일요스페셜 '한,중 역사전쟁- 고구려는 중국사인가?"편이 방영되자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다고 여겨 온 高句麗史가 한국 역사가 아니라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종종 있어 왔지만, 방송을 통해 직접 보고 듣게 된 한국인들은 급기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駐韓中國大使館에 항의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거의 모든 언론사가 앞다투어 高句麗史를 지켜야 한다는 보도를 내세웠다. 중국의 東北工程에 대항할 수 있는 한국의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국가의 지원을 받는 高句麗史硏究財團도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은 나름의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그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비판에 앞서 왜 한국인들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였고 왜 한국에서 高句麗史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高句麗史는 특정한 一國의 역사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集團 無意識 속에 잠재된 '大國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구려는 한국인들에게 강력하고 웅대했던 過去史에 대한 憧憬과 鄕愁로 남아 있다. 또한 대륙으로 뻗어 나가려는 미래지향적인 근거이며 한국의 미래적 모델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사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朝鮮史 제일의 聖君으로 일컬어지는 世宗, 壬辰倭亂 때의 전쟁 영웅 李舜臣 장군과 함께 高句麗의 廣開土好太王과 乙支文德이 거론될 만큼 고구려인들은 친숙하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서인 金富軾의 三國史記, 一然의 三國遺事, 李承休의 帝王韻紀 등은 모두 三國을 하나의 역사 공동체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李奎報의 東明王篇에 기재되어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鄒牟聖王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가 저잣거리의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조선시대에 와서 새롭게 고구려에 대한 繼承意志가 생긴 것도 아니고 현재에 와서 갑자기 고구려를 계승하자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고구려는 한국인들에게 1400년 가까이 계승되어 온 한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데 1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고구려를 계승하자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고구려를 멸망시켜야 할 나라로만 인식해왔던 중국이란 歷史共同體가 최근에 와서 高句麗史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된 것은 高句麗史의 귀속 문제이다. 중국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게 된 20세기에 와서 중국인들은 고대 왕국이었던 고구려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高句麗史의 귀속 문제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高句麗史가 전적으로 한국에 속한다는 입장, 國內城을 都邑地로 할 때까지의 高句麗史는 중국 역사에 속하고 427년 平壤遷都 이후의 高句麗史는 한국 역사에 속한다는 입장, 그리고 1998년 이후 새로운 관점으로 등장한 高句麗史는 한국과 무관하게 전적으로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입장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늦게 제시된 입장이 최근 들어 힘을 얻고 있다. 東北工程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馬大正이 高句麗史가 완전한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東北工程에서의 高句麗史 연구는 한국 역사에서 고구려를 완전 분리시키고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임을 입증해 내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에서 격렬한 반발이 초래될 것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高句麗史에 대해 侵略的硏究를 진행하고 있다. 왜 중국은 지금 高句麗史强奪作業에 나서게 된 것일까?

● 정치적 의도가 담긴 중국의 高句麗史 연구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던진 중국의 東北工程을 진행하는 곳은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란 곳이다. 이곳은 1983년에 중국 변방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어 소수민족과 변강 지역의 역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이곳에서 2002년부터 東北三省 지역을 본격적인 연구대상으로 삼고, 東北三省의 사회과학원과 이 지역의 대학과 연구기관을 동원하여 '나라의 통일과 변방 지역의 안정'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것이 東北工程이다.

중국의 東北工程 소개에 의하면, 1976년 개혁, 개방 이래로 중국의 변경지역 특히 동북 지역은 중국의 전략 지역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지역인데 러시아, 북한, 남한, 몽골, 일본, 미국 등 이해 당사국의 소수의 학자와 정치인들이 동북의 역사를 왜곡하는 등의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東北工程은 2001년 6월에 長春에서 중국 사회과학원과 중국 공산당 吉林省衛가 聯合으로 주관한 '東北 邊疆歷史와 現狀 硏究工作 座談會'에서 의사일정이 제시되었고, 8개월에 걸친 준비과정을 거쳐 2002년 2월에 '東北 邊疆歷史와 現狀系列 硏究工程(東北工程)'이란 이름으로 공식적인 출발을 하였다.

東北工程의 이념적 지향점은 전문위원회에서 제시한 5가지 의식으로 대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정치의식으로 국가통일, 민족단결, 변강안정의 목표에서 출발하며, 두번째는 전체의식으로 동북변경이 연구의 주체지만 統一的多民族國家와 東北亞 전체의 전략구도에서 연구하며, 세번째는 책임의식으로 국가, 인민, 역사에 책임을 지고 非科學性과 實用主義를 단호하게 배척하며, 네번째는 精品意識으로 東北工程은 정부의 정책을 돕고 후세의 연구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며, 다섯번째는 誠信意識으로 자율과 성실의 원칙을 겸하여 임무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의식 가운데 정치의식과 전체의식이야말로 東北工程에 담긴 진정한 중국의 속뜻이다. 東北工程의 출발부터 정치적 요인의 변화에 기인하였음을 그들 스스로 명확히 밝히고 있고 이 때문에 학자들에게 정치의식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東北工程에 참여한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지키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연구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어렵다. 철저히 중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연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光明日報에 실린 時論은 東北工程을 추진하는 중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 글의 결론을 정리하면, '고구려는 중국의 일부니 정치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글 자체가 대단히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의도적으로 작성되어 보도된 것임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이다.

東北工程의 연구과제에는 間島問題를 포함해 동북 지역의 역사와 정치, 한국, 러시아와의 관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東北工程에서 高句麗史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의 하나이다. 邊疆史地硏究中心의 홈페이지에는 南沙群島, 釣魚島, 투바공화국, 突厥, 疆域史理論 문제 등과 함께 高句麗史를 중점적인 연구대상으로 선정하고 있고, 부가적인 설명 글도 있다. 李大龍의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란 글에는 고구려는 중국 경내에 있는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으로 줄곧 중국 역대왕조와 신속관계를 유지하고 결코 중국의 바깥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고구려인의 대다수는 중화민족에 융합된 나라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아직 선언에 불과하다. 때문에 중점적으로 더 깊게 연구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완전한 正論으로 삼고자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영토분쟁 지역인 南沙群島와 釣魚島를 자국에 귀속시키는 것만큼이나 高句麗史를 자국의 역사로 삼으려고 한다. 중국이 변방 문제에 있어서 현실의 문제만큼이나 과거 역사의 재해석에 매달리는 것은 단지 한국 등 주변국과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변방 문제에 중국이 많은 연구와 투자를 하는 것은 중국의 최대 현안문제인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더 근본적인 이유이다.

● 中華民族과 統一的多民族國家

東北工程 추진과 高句麗史强奪作業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中華民族 國家'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中華人民共和國은 과거의 중국과는 다르다.

20세기에 광풍처럼 몰아딕친 민족주의와 전 세계적인 國民國家의 성립을 목격한 孫文, 蔣介石 등의 중국의 지도자들은 女眞族이 세운 淸國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건국된 근대적 민족국가인 중국의 구성요소인 중국인의 범주에 어떻게 소수민족을 포함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특히 淸을 계승하는 입장에서 女眞族을 포괄하는 형태의 국가를 완성해야 하는 입장에서 있었기 때문에 '오직 漢族만이 중국인이다.'는 개념으로는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孫文은 중국 민족의 구성 요소로 漢, 滿, 夢, 回, 藏의 五族共和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漢族人口에 비해 漢族이 아닌 자는 적이므로 중국은 하나의 민족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이 발전하여 1949년 中華人民共和國이 성립된 후 새롭게 '統一的多民族國家'를 형성한 中華民族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中華民族이란 '漢族을 주체로 하고,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민'이다. 中華民族은 일반 민족의 개념을 넘어서는 상위의 민족 개념으로 흡사 스탈린이 제시한 목표로서의 현대 민족에 해당하는 것이다.

1982년에 채택된 중국 헌법 전문에서는 중국의 민족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中華人民共和國은 전국 각 民族人民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多民族統一國家다. 평등, 단결 상호원조의 사회주의적 민족관계가 이미 확립되었으며 계속 강화될 것이다. 민족의 단결을 지키는 투쟁에서는 大民族主義, 大漢族主義에 반대하여 또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는 전력을 기울여 전국 각 민족의 공동의 번영을 촉진한다.'

중국 헌법에서 밝힌 민족원칙은 어디까지나 中華民族의 건설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한 선언적 명제일 뿐 중국의 현실적 민족상황과는 큰 괴리가 있다.

중국은 1950년 티베트 침공을 비롯해서 지방민족의 분리주의 성향을 철저히 억압해왔다.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모든 민족문제가 해결된 통일된 나라임을 주장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민족문제를 갖고 있다. 특히 최근의 중국의 민족갈등은 지역 간 경제발전의 격차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중국의 동해안의 도시 지역과 내륙 농촌 지역간의 이른바 동서격차는 민족적으로는 바로 漢族과 소수민족 간의 경제발전의 격차와 동일하다.

중국은 개혁, 개방 정책의 실질적 목표로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의 현대화를 내걸었는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로 '민족문제의 해결'을 일직부터 설정하고 있다. 중국의 현대화는 중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민족갈등의 정확한 정리나 해결을 통한 민족 간의 조화로운 공존질서 형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中華民族의 한 구성집단인 漢族에 대해서 그 주체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각 구성 민족 간의 평등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漢族이 똑같은 조건에서 평등하게 소수민족과 같은 가족을 형성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중국은 애국주의, 곧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며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과업을 진행하는데 열을 올린다. 하지만 여기서 민족주의는 개개 민족의 정서를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의식이 아니라 中華文明을 형성하고 공유해온 中華民族의 집단적인 의식을 지칭한다.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중국의 의도는 애국주의와 사회주의를 일치시켜 체제에 대한 신념과 中華民族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고취시켜 중국 내 다수 민족을 결집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애국주의 고취를 위한 역사 교육 분야는 주로 근현대사에 치우쳐 있다. 중국의 고민은 전근대사에 있어서 각 소수민족, 漢族과 소수민족 간의 싸움 가운데서 어느 쪽을 편들 수 없다는데 있다.

역사적으로 현재의 중국의 영토에는 단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중국 역사의 주로라고 할 수 있는 중원의 역사 외에도 중국인들의 소위 邊疆이라 불리는 곳에 중국과 다른 역사공동체가 있어 왔다.

서로 다른 역사공동체들을 포괄해서 단 하나의 중국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진 中華民族 개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매우 필요한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곧 민족 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의 역사학계에서 연구의 내재적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다.

이는 '중국 역사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漢族을 주체로 한 다수와 소수민족들이 중앙과 지방과의 연대관계 속에 하나의 중국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으며, 중국 영토 내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中華民族의 구성원으로 존재했으며 결코 독립된 다수의 국가로 존재한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것을 입증해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의 범주는 또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다. 중국의 역사와 이민족의 역사를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이론도 있었고, 현재의 중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해서 그 안에 있는 역사만을 중국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1980년 이후로는 1840년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 판도를 기준으로 그 범위 안에서 활동한 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淡機亮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이미 확정된 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란 결론 위에 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 大漢族主義와 高句麗史

현대 중국이 갖고 있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역사 연구가 동원되고 있고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한 일환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東北工程이 시행되고 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 연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大漢族主義에 있다. 중국의 최대 영토 위에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는 결코 단일한 하나의 역사가 아니었다. 漢族과 55개 소수민족, 과거에 사라졌던 많은 민족들이 이루어낸 복잡다기한 역사였다.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주변의 다른 종족들을 미개한 야만족이라고 여겼던 漢族의 역사와 四夷라고 표현된 변강 지역의 역사는 확연히 다르다. 여러 邊疆의 하나인 解岡(臺灣), 信江(西域)의 역사는 전혀 동질성을 가질 수 없는 별개의 역사였다. 이들을 하나의 역사로 표시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2002년 12월부터 논란에 휩싸인 岳飛 논쟁은 현대 중국 역사학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가장 극명히 드러낸다. 漢族 위주의 通史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多民族國家에 걸맞는 새로운 역사관 간의 충돌로 생긴 岳飛 논쟁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의 평가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는 중국의 國史라고도 불렸던 漢族의 역사는 주변의 여러 소수민족들과의 기나긴 투쟁의 역사였다. 때로는 漢族들이 소수민족을 제압하기도 했지만 소수민족이 漢族을 이긴 경우가 많았고 漢族이 살던 땅에 들어와 漢族을 지배하기도 했다. 五胡十六國時代가 그랬고, 北魏를 비롯한 北朝 국가들이 그랬다. 특히 遼, 金, 元, 淸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1천년의 중국 역사는 태반 이상이 소수민족이 漢族을 지배한 역사였다.

중국은 지금 漢族과 격렬하게 투쟁했던 소수민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漢族으로서 이민족에 대항하여 격렬히 투쟁했던 자들, 즉 宋의 武將 岳飛는 漢族의 영웅이자 중국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漢族의 영웅일 수는 있지만 중국의 영웅은 될 수 없다. 도리어 岳飛가 목숨 걸고 항전했던 金國과 화친을 도모했던 秦檜와 같은 자들이 시대를 앞선 영웅이 된다. 대다수의 漢族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岳飛가 충신이고 영웅이라고 어릴 적부터 배워왔는데 지금 간신의 대명사였던 秦檜가 도리어 영웅이 된다면 漢族들의 가치관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中華民族의 본질은 실은 漢族의 외연적 확대이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漢族이 1억도 훨씬 넘지만 여전히 漢族에 비해 숫자가 적은 소수민족들을 漢族의 주도하에 통합하기 위해 새로 민든 민족개념이 中華民族인 만큼, 소수민족과의 평화 공존을 위해 漢族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기존의 역사인식마저 다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은 역대로 中華史觀이라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 中華史觀이란 華를 높이고 夷를 낮추는 역사관이다. 모든 문명은 華가 만들며, 夷는 華를 따르며 존중하는 형태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고 보는 역사관점이다.

이것은 인간의 태생적 불평등성을 강조하는 편협한 역사관이다. 中華史觀이 수천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漢族들은 자신의 이름이 靑史에 남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겨 많은 사료들을 남긴 반면 유목민족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전승으로 남긴 것은 많아도 기록으로 남긴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록의 불평등은 결국 동아시아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심각한 문제, 즉 中國病이란 문제를 발생시켰다.

편견이 담긴 기록들에는 소수민족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어떻게 전개시켜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더구나 명분만을 앞세운 중국의 기록들은 실체와 다른 내용도 매우 많다. 특히 외교 관계에 잇어서 과거 중국은 온 세계를 大國인 중국과 小國인 다른 나라로 나누고 세계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臣國의 지위에서 君國인 중국에 복종하고 朝貢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하고 표현해왔다. 조공의 허위성은 1793년 淸과 영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국의 McCart-ney 대사가 통상과 외교관계 수립 제의를 위해 北京에 왔을 때 淸 高宗은 그를 먼 곳에서 조공을 바치려고 온 사신처럼 접견하고 그 대사의 모든 제의를 거절한 바 있다.

四夷를 낮추어 보는 華의 시각은 高句麗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남긴 고구려 관련 기록들은 공정한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이 진정으로 漢族과 주변 소수민족이 평등에 기초로 한 中華民族의 역사를 서술하려면 곽의 역사 기록 속에 불평등하게 기록되어 잇는 소수민족의 역사를 평등한 입장에 서서 공평하게 기록해주어야만 한다. 즉 과거 역사 서술에서 빚어졌던 漢族 중심의 역사상을 새롭게 고쳐야만 하는 것이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조성한 과거의 역사적 성취를 中華民族의 성취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수민족의 역사도 中華民族의 역사에서 공정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 티베트의 영웅인 松贊干布나 고구려의 乙支文德, 匈奴의 冒頓, 鮮卑의 檀石槐 등도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唐 太宗, 岳飛, 袁崇煥 등과 더불어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중국 역사학에서 과연 이런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大漢族主義를 부정하고자 한다면 과거 역사 연구부터 중원 중심의 일원적인 역사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억지 주장을 포기하고 중국과 변방을 병렬하는 동등한 역사적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직까지 중국은 中華民族 가운데 漢族을 주체민족으로 놓고 중원의 지배자 역시 漢族이며 漢族 중심으로 문화와 권력이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그들의 이상적인 민족관과 배치되는 패권주의적인 大漢族主義의 연장인 것이다.

현재의 중국 학계에서는 隨, 唐과 高句麗간의 전쟁은 統一的 多民族의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기 위해 수행한 전쟁이지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해 일으킨 침략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隨와 唐의 침공을 과연 통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내방한 같은 中華民族의 선량한 군대라고 여겼을까? 중국과 고구려는 원래 동족의 나라이며 隨와 唐이 고구려를 공격한 전쟁이 이민족에 대한 정복전쟁이 아닌 통일전쟁이라 한다면 그에 걸맞는 역사서술, 즉 乙支文德도 중국의 戰爭史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대 중국 학계의 그 어느 논문과 책에도 乙支文德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는 全無하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므로 과거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현재적 관점에 앞서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과거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대를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현재 중국은 고구려와 隨, 唐이 같은 中華民族의 일원이라고 결론짓고 있지만 당시 고구려와 隨, 唐은 과연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과연 그 시대에도 서로에 대해서 동족이란 관념이 존재했는지, 아니면 서로를 전혀 별개의 세계로 여기고 있었을지를 살펴보자. 그러면 현재 중국의 역사해석이 大漢族主義의 연장선 위에 있는 침략적인 역사관인지, 아니면 시대를 관통하는 탁월한 역사해석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隨와 唐의 사람들은 高句麗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612년 隋 煬帝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명분을 적은 詔書를 보면 당시 隨國 사람들이 고구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미물들(高麗小醜)은..... 詔勅으로 내리는 嚴命을 한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入朝하는 의식에도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斥候를 놓아 우리의 封侯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契丹의 무리들을 아울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靺鞨의 무리를 이끌고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하며, 해변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 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들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 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天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勅使의 행차는 屬國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隋 煬帝의 눈에는 고구려가 죄악으로 가득한 나라였으며 중국의 변방을 수시로 침략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무리로 보였다. 또한 다른 나라가 隨國을 섬기는 것을 막고 隨國의 사신을 거절하는 중국 왕조의 臣國이 아닌 敵國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隋 煬帝는 고구려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나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隨國은 陳과의 南北朝 統一戰爭에서 동원한 50만 대군의 두배 이상인 113만 8천여명이라는 大兵力을 동원해 고구려를 정벌하러 간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통합을 위한 통일 전쟁이 아니라 말살을 목표로 한 정벌 전쟁이었다.

唐의 創業主인 高祖는 622년 高句麗 榮留太王에게 보낸 공문 편지에서 '唐과 고구려 두 나라는 서로 和平을 통하게 되었으니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이미 찾아 모으게 하여 찾는 대로 곧장 돌려보내려고 명령하였다. 高句麗王도 그 곳에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을 석방하여 돌려 보내줘야 한다.'라고 했다.

唐은 隋의 繼承者임을 자처하고 있었기에 612년 고구려가 隋麗戰爭에서 포로로 잡은 隨國의 사람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唐 高祖에게 고구려는 당연히 外國이었고 화친의 대상일 뿐이었다.

舊唐書에 의하면 唐 高祖는 신하들에게 "명분과 실제의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구려가 隨國에 신하로 칭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隋 煬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朕은 만물 중에 공경받으나 교만하고 귀하다고 여김을 받고 싶지는 않고 다만 살고 있는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함께 힘쓸 뿐이지 무엇 때문에 반드시 稱臣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귀하고 크다 함을 자처하여야 되겠는가? 즉시 朕의 이 심정을 조술하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평화롭게 교류해야 할 나라이지 고구려를 불편하게 할 唐國의 명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고구려를 하나의 중국에 포함시키기 위해 통일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별개의 他國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에 대해 侍中 裵矩와 中書侍郞 溫彦博은 "중국에 있어서 夷狄이란 태양에 있어서의 列星과 같으므로, 이치상 존귀한 존재를 격하시켜서 蕃國과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고 반박했다.

裵矩와 溫彦博에게 고구려는 그저 唐國을 빛내주기 위한 조연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고구려와 唐 사이에 같은 中國이라는 공통의 의식도 없었다. 상대를 통일시켜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상대를 먼저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상대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정벌의 대상이지 통일의 대상은 아니다. 裵矩와 溫彦博이 이치상 결코 동등한 나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고구려가 결코 같은 中國의 왕조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648년 고구려 정벌에 거듭 실패한 唐 太宗은 고구려에 대해서 대단히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 자신이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쫓겨서 遼澤으로 도망쳐 오다가 병이 들어서 거동조차 불편해졌기 때문이며 天策神將이란 칭호로 불리던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고구려 정벌을 꿈꾸고 있었다. 이에 太宗의 충복인 房玄齡이 죽어가면서 上疏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는 변방에 있는 오랑캐로 천한 무리입니다. 仁義로서 대우할 가치가 없으며 통상적인 도리로써 질책할 수도 없습니다. 옛날부터 그들을 물고기와 자라로 간주하였으므로 마땅히 관대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풀을 베고 부리를 제거하듯이 대한다면 막다른 골목깢 쫓기던 짐승이 방향을 돌려 달려들듯이 완강하게 저항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房玄齡은 唐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하등의 이득도 없는 것이며 고구려 침공이 당나라에 커다한 害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上疏에서 고구려를 물고기나 자라와 같이 간주한 것은 당시 唐國 사람들이 갖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과 편견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또한 당시 고구려가 唐과 함께 번영할 존재가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생각 속에는 高句麗와 唐간의 전쟁을 民族統一戰爭이라고 보는 현대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629년 唐 太宗은 突厥의 부락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후, 대신들에게 변방을 안정시킬 정책에 관하여 토의하도록 조서를 내린 바 있다. 이때 中書令 溫彦博은 突厥族을 회유할 것을 주장했고 秘書監 魏徵이 이들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匈奴(突厥)는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이니 우리와 동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강성해지면 반드시 침입하여 약탈하고, 쇠약할 때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며 우리에게 복종하여 은혜와 신의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天性입니다."

하지만 唐 太宗은 魏徵이 아닌 溫彦博의 의견을 받아들여 突厥族의 회유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唐 太宗은 이민족에 대해 包容政策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초급중학교 교과서에는 唐代를 중국의 統一的多民族國家 발전의 중요한 시기로 서술한다. 특히 唐 太宗은 비교적 진보적인 민족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그가 "예로부터 모두가 중국은 귀하고 오랑캐는 천하다고 하였으나 朕은 유독 한결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과연 唐 太宗은 오랑캐를 한결같이 사랑했을까? 貞觀 13년 突厥의 무리가 자신을 습격한 사건 이후 突厥을 믿지 않았고 과거 突厥 부족을 중원 일대에 안치시킨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주위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원의 백성은 확실히 천하의 근본이고 외부의 이민족들은 모두 枝葉에 속하오. 근본을 해쳐 지엽을 무사하게 함으로써 영원히 안정되게 다스려지기를 구함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오. 처음 朕은 魏徵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나날이 소란스럽고 낭비가 심해짐을 느끼게 되오. 영원히 다스려지는 방책을 거의 잃게 되었소."

이러한 관점은 이미 아주 오래된 것이다. 貞觀政要에 의하면 揚州都督 李大亮은 太宗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上疏를 통해 이런 말을 했었다고 전한다.

"중국 백성들은 천하의 근본이며, 사방 이민족은 지엽에 해당합니다..... 春秋에서는 융적은 승냥이나 이리와 비슷하여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周國은 백성들을 아끼고 外族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8백년 역사를 지속했습니다."

주변 종족과 중국이 결코 같은 민족일 수가 없다는 李大亮의 이 말은 周代 이래로 아주 오래된 역사적 인식이며 당시 唐國 사람들의 보편적 사고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통일의 대상이 아니어서 고구려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唐 太宗은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隨가 네번이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취하지 못했으니 자신이 중국을 위해 子弟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으며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를 평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통일된 中華民族 국가를 건설하자는 비전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고구려를 정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에게 고구려는 같은 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고 중국에 害를 끼치는 '악의 축(an axis of evil)'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와 隨, 唐간의 전쟁을 통일 전쟁이라고 일컫는 것은 마치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이유를 '악의 축'을 물리치려는 행동이라고 현재의 미국인이 말하였는데, 후대 역사학자들이 미국과 이라크는 본래 같은 민족의 나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 되는 것이다.

● 高句麗 사람들은 隨와 唐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는 隨, 唐을 같은 동족이나 통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고구려가 떠받들어야 하는 宗主國으로 여기고 있었을까?

당시 고구려가 隨와 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몇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자. 먼저 唐과 高句麗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가 唐의 요구를 거절하고 신라를 침공했다는 점이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唐은 相里玄奬이란 자를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唐國은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압박했지만 고구려는 唐의 사신에게 모욕을 주고 함부로 대했기에 唐의 관리들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고구려 최고의 실권자였던 淵蓋蘇文은 唐의 사신 莊嚴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고구려에 간 唐의 사신 중에 李義琛이란 자는 고구려 국왕이 부르자 怖伏을 하며 엎드려 절을 했다고 新唐書는 전한다. 唐에서는 그가 匍匐拜伏한 것에 대해서 고구려에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다만 李義琛이 배짱이 없다는 정도로 그쳤다. 만약 최근 중국 학계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唐國의 지방정권이라면 어떻게 중앙정부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신을 포복하며 엎드려 절을 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646년 8월,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唐 太宗은 고구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淵蓋蘇文이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 비록 사신을 보내 문서를 바쳤으나 그 말이 모두 궤탄하고 또 唐의 사신을 대우하기를 거만하게 하였고 항시 변방의 틈을 엿보고, 누차 勅命으로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거늘 침략하고 능멸함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부터 고구려에서 오는 공물을 받지 말고 다시 토벌할 계획을 세워 詔書를 내릴 것이니라."

645년 唐麗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淵蓋蘇文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唐에 전쟁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충분히 요구할 수가 있다. 따라서 唐 太宗이 고구려 문서를 보고 궤탄한다고 말한 것은 그 내용이 고구려가 唐에게 勝戰國으로서 敗戰國에 대한 요구를 한 것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唐國에서 굴욕감을 느낀 것이라고 하겠다.

668년 고구려가 男生 형제의 내분으로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을때 唐 高宗은 정벌군을 보내고서도 고구려를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여 賈言忠이란 자에게 전쟁 상황을 물었다. 이때 賈言忠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고 新唐書는 전한다.

"지난날 唐 太宗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고구려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軍에 내응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男生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는 고구려의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臣은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645년 唐이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 唐 太宗이 이기지 못한 원인이 고구려에게 틈이 없었다는 뜻은 당시 唐 太宗이 내건 전쟁 명분이 고구려인에게는 하등의 설득력이 없었으며 고구려인들은 一致團結하여 唐의 침략과 맞서 싸웠다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는 자기 역사와 문화를 파괴하고 백성들의 평화로운 삶을 빼앗아가려는 隨와 唐을 상대로 치열한 抗爭을 펼쳤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隨, 唐과의 통일은 생각하지 않았고 이들에게 순순히 항복하여 중원의 통일국가에서 살겠다는 마음도 전혀 없었다. 고구려에게도 隨, 唐은 고구려의 이익을 방해하는 '악의 축'일 뿐이었다.

● 隋麗戰爭과 唐麗戰爭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高句麗와 隨, 唐이 이렇듯 서로 상대를 다른 세계로 여겼다. 문제는 현재의 인식이다. 統一的多民族國家理論에 바탕을 둔 중국 역사학계의 고구려를 비롯한 변강 지역 역사 연구는 본질적으로 漢族과 중원문화인 華를 높이고 변강과 소수민족의 문화인 夷를 낮추는 中華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새롭게 만들어진 中華民族 역시 다수의 漢族이 55개 소수민족을 포섭하기 위한 大漢族主義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漢族 중신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서 소수민족의 역사를 漢族의 역사와 동일한 관점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와 隨, 唐간의 전쟁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양측의 대응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한다. 612년 隋麗戰爭에서 남아 있는 기록은 대체로 隨國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에서 빠져 있는 부분들, 즉 당시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113만 8천여명이나 되는 隨의 大兵力을 격파할 수 있었는지, 특히 遼河交戰, 遼東城防禦戰, 平壤戰鬪, 薩水大捷에서 고구려군이 어떻게 역량을 발휘했으며 고구려 자체의 승리의 원인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隨國과 같은 비중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645년 唐麗戰爭의 경우, 남아 있는 사료는 철저히 唐의 입장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대의 전투는 6월 21일부터 23일까지 벌어졌던 駐必山戰鬪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唐國 군사들은 고구려군 3만여명을 참살하고 15만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唐 太宗은 고구려군 포로 15만여명을 모두 풀어준다. 중국 학자들은 이를 唐 太宗의 어진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전쟁 상식을 무시한 지나친 唐 太宗과 기존 기록에 대한 변명이다.

만약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唐國 군사들이 요동 지역의 성들을 뒤로한 채 곧장 烏骨城을 공격하고 鴨綠水를 넘어 平壤으로 직접 진격하자는 안이 나왔을 때에 長孫無忌가 新城과 建安城에 고구려군 10만명이 있으니 공격할 수 없다고 두려워한 것에 太宗 역시 이에 동의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전쟁은 장난이 아닌 승리를 위해 수십, 수백만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정치적 행위인데 단지 唐 太宗이 고구려군 포로들이 불쌍해서 15만명을 풀어줬다가 그들 때문에 전쟁에서 다시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문을 더해간다. 唐國 군사들은 고구려군 주력부대를 격파했다고 해놓고서도 6월 23일 이후 9월 18일까지 駐必山과 安市城 주변에서 머물 뿐 제대로 진격조차 하지 못한다. 퇴각할 때에도 여유 있게 퇴각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遼東道行軍이 최초로 진격해왔던 柳城에서 玄菟城에 이르는 평탄한 길이 아닌, 죽음의 땅인 요택으로 성급히 퇴각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唐軍의 이상한 행보는 고구려군의 역할이 없다면 설명할 수가 없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唐軍을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고구려가 唐의 藩屬國이었다는 주장만을 강조하여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현재의 중국 학계의 高句麗史 연구는 사실에 앞선 당위만을 강조하는 역사 왜곡일 뿐이다.

고구려와 隨, 唐간의 전쟁은 598년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 그리고 이후 고구려 부흥군의 對唐抗戰까지 약 100년에 걸친 大戰이다. 이 전쟁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것은 國際戰爭이요, 文明大戰으로 보아야 한다.

5세기에 고구려인이 남긴 廣開土好太王 勳積碑(永樂紀功碑)와 中原高句麗碑, 牟頭婁墓誌銘 등에는 그 어디에도 고구려가 中國을 의식한 문구가 보이지 않는다. 5세기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 국가이며 가장 신성한 땅이었음을 자랑하는 자부심 넘치는 글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高句麗는 新羅와 百濟, 契丹, 靺鞨, 北燕 등을 諸侯國으로 여긴 巨大王國이었다. 중국식의 皇帝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구려가 獨立國이 아니라는 주장은 中國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는 편견의 산물이다. 고구려는 永樂紀功碑에서 보듯이 太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太王은 諸國의 帝王들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帝王이란 의미의 호칭이며 單于, 可汗, 皇帝와 같이 'Emperor'로 번역되는 말이다. 또한 廣開土好太王이 사용한 永樂, 長壽太王이 사용한 建興 등의 年號는 고구려가 皇帝國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朝貢을 바쳤다는 기록은 오직 중국 측의 史書에 있을 뿐이고, 三國史記는 이를 재인용하였을 뿐이며 金石文 등에서 이와 같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 스스로 변방국가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고구려가 北魏, 隨, 唐 등과 대립하고 隨와 唐과 전쟁까지 치른 것은 천하에 존재하는 다원화된 文明權의 竝存과 高句麗 文明權의 繁榮을 위한 것이었다. 5~6세기 고구려는 劉淵, 北魏, 宋 등과 함께 동아시아 천하를 주도하는 4대 강국의 하나였다.

고구려가 大帝國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약소국과 달리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을 때에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도리어 좁다. 약소국은 신흥 강대국과 동맹을 맺거나 유화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반면, 기존의 강대국은 약소국과 달이 자신의 무기력함을 보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도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위협적인 신흥 강대국에 대해 자신의 열세를 만회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고구려는 기존의 고구려 중심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제국의 생존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 隨, 唐과 100년간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이 되어서 고구려의 행동을 그대로 평가해주는 노력이 중국 학계에서는 너무도 부족하다.

과거 역사의 정통성의 계승은 단지 구호만으로 "내가 계승하겠다. 과거의 역사가 나의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통성은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그 가치를 옳게 평가해주고 그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高句麗史의 귀속문제도 정통성 문제로 풀어보면 자연히 해답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 高句麗史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중국이 최근 들어 東北工程을 시행하고 高句麗史를 한국 역사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아닌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역사연구는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漢族과 55개 소수민족의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過去史 연구가 아니라 漢族의 역사, 중원의 역사인 華를 중심에 놓고 夷에 해당하는 변강 지역과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낮추어보는 在來의 漢族들의 中華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변국의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며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는 식의 패권주의적 역사관과 편협한 중화사관을 중국이 계속 고수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도한 중국 내 소수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평가하기를 거부한다면 진정한 中華民族의 통합 또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중국이 진정으로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번영하고자 한다면 변강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부터 실시해야 할 것이다. 大漢族主義를 중국 스스로 비판한다면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漢族 중심의 華夷論부터 혁파하고 진정으로 소수민족과 漢族과의 평등한 關係史를 서술해야 할 것이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동아시아가 근대에 들어와서 후진사회로 기억된 것은 동아시아 역사의 다원성이 상실되고 중원 중심의 단일하고도 폐쇄적인 역사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발전은 다원성에서 시작된다. 동아시아에 꽃피웠던 다양한 역사공동체에게 각자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다면 동아시아 역사의 다원성은 상실되고 특정 집단의 패권주의가 더욱 노골화될 것이다.

중국의 高句麗史强奪作業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결코 고울 수가 없다.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고민은 이해하지만 그 가운데 숨겨진 大漢族主義를 배경으로 한 패권주의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高句麗史 연구는 근본적으로 고굴를 자신들의 역사의 주류로 평가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高句麗史의 귀속문제는 정통성의 계승문제이지 누가 인정한다고 결정될 문제는 아니다. 중국이 高句麗史가 한국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햇 한국인들이 고구려를 한국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역시 중국에 高句麗史를 연구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高句麗史를 더 이상 왜곡하지 말며 올바르게 학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연구하라는 비판은 당연히 해야 한다. 패권주의적 역사관, 편협한 中華史觀을 버리고 진정한 평화와 협력을 위한 연구를 중국 역사학계가 해주기를 강력히 권고해야 하겠다.

한국과 중국이 공정한 시각에서 高句麗史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한 공동연구의 날이 오기를 희망해본다. 지금과 같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서 高句麗史를 빼앗고 지키고 하는 행태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들이 아닐 것이다.

高句麗史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해주고 그 역사를 바르게 계승 발전시킬 大人의 마음가짐에서 정통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선언적인 몇가지 논설이나 발언으로서 과거 역사의 정통성이 어디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자부한다면 중국보다 더 많이 高句麗史를 사랑해줌으로써 그 정통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高句麗史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고구려를 바로 알고, 제대로 연구하고, 고구려의 경험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 미래 모델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 중국의 역사 빼앗기에 흥분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출처; 범우사 版 '대고구려(大高句麗)의 역사, 중국에는 없다.' (2003년)

해설; 김용만(金容滿)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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