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세계 문화의 중심 국가라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과대망상(誇大妄想), 그리고 이 허장성세와 과대망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날조(歷史捏造)의 정신 병력을 캔다!
⑴ 아오모리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일본의 아오모리현[靑森縣] 산노헤군[三戶郡] 신고무라[新鄕村] 헤라이[戶來]라고 하는 곳에 가면 세계 3대 성인(聖人)의 한 분이며, 세계 최대 종교인 기독교(基督敎)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유적이 있다. 신고무라 야쿠바[役場]에서 서쪽으로 ‘그리스도 가도’라고 이름붙여진 국도 454호를 따라 3k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그리스도 공원’ 앞 버스 정류장과 ‘그리스도의 무덤’이라고 씌인 도로표지판이 나온다.
조그마한 주차장을 뒤로 하고 보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약간의 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흙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무덤 위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꽂혀 있어 한 눈에도 무덤의 주인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신고무라의 교육위원회에서 만든「헤라이의 그리스도」라는 책자에 나와 있는 이 무덤에 대한 설명을 보자.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 무덤이 도라이즈카[十來塚]라고 하는 예수의 무덤이고, 왼쪽이 쥬다이보[十代墓]로 예수의 동생인 이스키리와 예수의 모친인 성모(聖母) 마리아의 무덤이다. 예수의 무덤을 도라이즈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일본식 이름인 도라이 타로 다이텐쿠우[十來太郞大天空]에서 유래한 것이며, 경건한 마을 사람들이 하얀 밤나무 막대기에 글자를 새겨 무덤 위에 세워 놓았다. 쥬다이보는 성모 마리아의 유골과 동생 이스키리의 머리털과 귀를 장사지낸 것으로, 이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신고무라 교육위원회의 이같은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세계에서 두번째로 개신교(改新敎) 신자가 많은 대한민국의 이웃에, 바로 그 기독교의 개조(開祖)인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었다니! 물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일 리가 없다. 성서(聖書)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해서 40일 동안 이 세상에 머물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천국(天國)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지구상에는 그의 무덤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엄연히 이 헤라이 마을에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사와구치[澤口] 가문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한 마을의 특산품으로 ‘그리스도 마을’이라는 브랜드의 지자케[地酒]도 만들어 팔고 있다.
물론 일본 국민들 가운데서도 아오모리현의 헤라이 마을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고, 설사 안다 해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아오모리현의 주민들을 비롯한 일부의 일본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주장하고 또한 믿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어째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며, 근거는 있는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⑵ 성경(聖經)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루가복음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및 요한복음의 이른바 ‘4대 복음서’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4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아버지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의 목수인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한다. 마리아는 요셉의 도움없이 오직 성령으로 임신하여 예수를 출산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 즉 서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기 1년에 예수가 태어났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서기(西紀)를 처음 만들어낸 스키타이(Scythia)의 수도승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533년에 기독교 기원의 시작을 확정하려고 할 때 큰 실수를 저질렀다.
우선 기원전 1년과 기원후 1년 사이에 영(Zero)년을 집어넣는 것을 잊어버렸다. 당시 유럽에서는 제로와 마이너스의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다음에 재위한 황제인 티베리우스와의 공동 통치기간 4년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엑시구스는 루가복음 3장 1절의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린 지 15년째 되던 해..."와 23절의 "예수 그리스도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 때는 30세쯤 되셨다."는 내용을 기초로 계산했다.)
그리고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헤롯 임금 때에 태어났고,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헤롯 임금은 기원전 4년에 죽은 사람이므로 예수의 탄생은 최소한 기원전 4년보다는 이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방 박사들이 보고 찾아올 정도라면 평상시와 다른 특별히 빛나는 별이었을 것이다.
17세기 초만 하더라도 그 별이 혜성(彗星)이나 신성(新星)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603년 케플러가 목성과 토성이 겹치면서 마치 크게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한 이래, 동방 박사들이 본 별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하여 계산해 본 결과 기원전 7년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최근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대체로 기원전 6~7년경으로 모아지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태어난 예수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정보 제공으로 헤롯 임금이 두 살 이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이집트로 피난하여 헤롯 임금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낸다.
예수는 열두살 되던 유월절(逾越節)에 부모와 함게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유태인(猶太人) 랍비들과 문답을 하며 지혜와 총명을 과시한다. 성서에서 언급된 예수의 어린 시절은 여기까지이며, 이어지는 예수의 기록은 이른바 공생애(公生涯)라고 하여 30세쯤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13세부터 30세까지 18년간의 예수의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것이다. 이 18년간의 공백기간 때문에 야마네 기쿠[山根菊] 같은 망상가들에 의해 예수의 일본 도래설(渡來說)이나, 인도 불교 유학설(留學說) 등 기이한 주장이 나오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30세쯤 되어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어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으나 무난히 통과하였으며, 갈릴리 지방 전도를 시작으로 4년간의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다.
예수는 열두명의 제자와 더불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이 이스라엘 각지를 돌아다니며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온갖 병자를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리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유태인 보수세력인 제사장, 율법학자 및 바리새인들과의 마찰로, 그들의 책동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로마인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아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다. 예수는 사흘만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 부활을 증명하고, 40일 후에 영원히 천국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⑶ 다케우치 기요마로와 다케우치 문서
일본의 아오모리현[靑森縣] 헤라이[戶來] 마을의 예수의 무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5년, 다케우치 기요마로[竹內巨磨]가 고대사 연구자 토야 반잔[鳥谷幡山] 일행과 함께 헤라이 마을을 반문하고나서부터이다. 그들은 촌장 사사키 덴지로[佐佐木傳次郞]의 안내로 마을을 이잡듯이 조사하여 얕으막한 언덕 위 덤불 속에 있던 두개의 흙더미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예수와 그 동생 이스키리의 무덤이다.
다케우치 기요마로는 고대 야마토[大和] 조정에서 3백년 가까이 살면서 활동했다고 하는 전설상의 인물로 신공왕후(神功王后)를 도와 신라를 정벌하여 한반도 남부를 일본의 영토로 삼았다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口]의 66대 후손이라고 한다. 이 다케우치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서(古書)가 있었는데, 그것은 감추어진 일본 고대사에 대한 내용으로 보통『다케우치 문서[竹內文書]』로 불리워진다.
『다케우치 문서』는 지금으로부터 1천 5백여년 전에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손자인 헤구리노 미토리[平群眞鳥]가 엣츄[越中]의 황조황태신궁(皇朝皇太神宮)에 전해 내려오는 신대문자(神代文字)로 기록된 고문서를 한자·가나 혼용문으로 번역한 것이라 한다. 이 자료는 초고대로부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사료까지 포함한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케우치 문서』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수십만년 전 초고대의 일본 열도는 지구의 배꼽으로서 세계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지금의 도야마현[富山縣] 오미진산[御皇城山]을 중심으로 한 히다[飛擇]의 노리쿠라[乘鞍] 일대야말로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다카마가하라[高天原]이며, 모든 인류를 위한 신사인 황조황태신궁이라는 웅장한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고대의 신(神)들은 하늘을 초고속으로 날아가는 오늘날의 비행기나 우주선같은 아메노우키부네[天浮船]를 타고 세계를 순행했다고 한다. 또한 태고의 지구는 불안정하여 천재지변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그때마다 지배자들은 아메노우키부네를 타고 우주로 피난했다고 한다.
일본인은 원래 신과 같은 종족이었으나 지상에 오랫동안 정착하게 되면서 오히려 퇴화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래 만살까지 살 수 있던 인간의 수명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일본의 역사시대는 초대 텐노[天皇]인 신무제(神武帝)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다케우치 문서』에서는 신무제 이전에 ‘우가야 후키아에즈[彦波武草葺不合尊] 왕조(王朝)’ 72대, 그리고 그 이전에도 수십대의 제왕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일본 열도는 인류의 발생지인 동시에 세계의 조국(祖國)이며, 자연 전세계를 통일하고 있었으나, 여러 번에 걸쳐 지구에서 발생한 대재해 때문에 초고대 황금문명이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도 일개 소국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과거를 말살하기 위하여 고문서를 불태우고, 이리하여 초고대의 비밀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 줄리어스 시저, 이슬람 제국 칼리프의 도서관 파괴 및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으로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세계 각국의 태고의 기록의 대부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남은 문헌과 유물들을 보존하여 대대로 지켜온 것이 바로 일본의 ‘다케우치 일족’이라는 것이다.
『다케우치 문서』에 의하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히브리 문자, 그리스 문자, 이집트 상형문자, 알파벳, 산스크리트어, 중국의 한자, 거란·몽골 문자는 물론 한국의 한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내노라 하는 문자는 모두 고대 일본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것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에서 2천 5백년 사이에 세계적으로 위대한 종교인·철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중국만 하더라도 공자(孔子)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등장했으며, 그리스에서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소크라테스 등 많은 철학자가 동시에 배출되었다. 인도에서는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나왔고, 그리고 가장 늦게 중동지방인 이스라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
또한 그 시기를 전후하여 모세, 석가, 공자, 예수 등이 자국민을 비롯한 세계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머나먼 일본까지 스스로 찾아왔고, 여기서 세계의 바람직한 이상을 배우고 귀국하여 자국의 통치자의 압정에 대항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설파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다케우치 문서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 가운데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으로 한국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한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도쿄대학교 교수와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게 병합을 요청해서 1910년에 식민지 지배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타쿠쇼쿠대학교 교수 등 저명한 지식인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
⑷ 다케우치 문서 등에 의한 예수의 생애
『다케우치 문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기원전 37년 1월 5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이스키리이며, 같은 해 12월 6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동방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기 위하여 마굿간을 방문한다든지, 헤롯 임금이 예수를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유태인(猶太人) 어린아이를 모두 죽였으나,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가호로 이집트로 도피하여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성서의 내용과 같다.
이윽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예수의 가족들은 고향인 나사렛에 자리를 잡고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하며 예수를 키우게 된다. 예수는 열두살이 되었을 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교리에 관한 문답을 하며,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천재적 능력과 강고한 신념과 의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수는 자라가면서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더욱 강해져 부모, 동생과 떨어져 홀로 인도에 건너가 석가(釋迦)의 가르침인 불교에 심취한 후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가 처음 일본에 도착한 곳은 동해 연안의 이시가와현[石川縣] 노토[熊登] 반도 호다츠[實達] 해안으로, 예수의 나이 열여덟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엣츄[越中] 지방에 있는 황조황태신궁(皇朝皇太神宮)의 신관(神官)인 타케오고코로[武雄心] 친왕(親王)의 제자가 되어 5년간의 수행을 시작했다. 그 동안 예수는 목숨을 걸고 비술(秘術), 문자학(文字學), 제사(祭祀), 역사, 천문학 및 제정일치의 근본적 학문을 배우고, 마침내 국왕의 인수(印綬)를 천황(天皇)으로부터 받아 이스라엘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가 일본을 떠나기 전 황실의 화가인 히코후토 히토가타 즈몬미코토가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국화 무늬가 있는 국왕의 의복을 입고, 그 위에 왕관과 조복을 걸친 모습으로 현재 황조황태신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스라엘로 돌아온 예수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지상의 평화, 정신의 존엄함을 설파하였으나, 보수적인 유태교도와 그의 가르침을 위험시한 로마의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니 이때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와 한살 차의 동생 이스키리였다는 것이다. 동생 이스키리가 형인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예수 자신은 사흘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건재를 과시하며 부활의 기적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절대 죽어서는 안된다는 천황의 칙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탈출한 예수는 북유럽을 경유, 유럽 대륙을 남하하여 아프리카에 이른다.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시베리아 동쪽 끝에서 건너편 알레스카로 건너가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내딛는다. 예수는 계속해서 남북 아메리카를 일순하며 각지에서 가르침을 전한 후 다시 알레스카로 돌아와 해로를 이용하여 일본을 향했다.
예수가 탄 배가 현재의 아오모리현[靑森縣] 하치노헤[八戶] 마츠가사키[松ヶ崎]에 도착한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4년이 지난 수인제(垂仁帝) 재위 33년인 서기 4년 2월 26일이었다고 한다. 예수는 마츠가사키에서 2개월을 보낸 후 헤라이 마을로 돌아와 헤라이신궁[戶來神宮]에 참배하며 이제까지의 경과를 보고했다. 같은 해 9월 처음 일본에 왔을 때 공부를 했던 황조황태신궁을 방문하여 스승인 타케오고코로 친왕과도 재회를 한다.
예수는 이름도 일본식으로 도라이 타로 다이텐쿠로 개명하고 유미코라고 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병으로 일찍 죽었으나 장녀는 헤라이 마을의 사와구치[澤口] 가문에, 차녀는 다츠코쵸[田子町]의 가이모리[貝守] 가문에, 삼녀는 사이고시[西越]의 노구치[野口] 가문으로 각각 출가하였다고 한다.
헤라이 마을에서 예수는 특별히 포교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언어·풍속·인정 등을 살피는 한편 서민구제에 힘썼다고 한다. 그후 예수는 경행제(景行帝) 재위 11년인 서기 81년 12월 25일 헤라이산에서 118세의 천수를 다하였다고 한다(신고무라에서는 106세로 되어 있다.).
오늘날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하여 개신교(改新敎)·천주교(天主敎)·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등 3대 기독교(基督敎) 교파(敎派)의 신자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非基督敎人)들도 들뜬 마음으로 지내는 축제일이 되었으나, 사실은 예수의 기일(忌日)로 조용히 명복을 빌어야 하는 날이라고『다케우치 문서』는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헤라이산에서 풍장(風葬)을 하였고, 4년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매장을 한 것이 바로 오늘날 남아있는 도라이즈카, 예수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⑸ 일본 학자들이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서(遺言書)
1935년 5월 26일 소위 만국고대문학연구회(萬國古代文學硏究會)라는 단체 소속 고고학자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서’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예수가 일본에 오게 된 경위 및 이스라엘 개나리리 언덕에서 예수의 동생 이스키리가 형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 내용과 그후 예수의 일본으로의 귀환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로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복음 15장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발언)”라고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발언을 한, 성인답지 못한 말투도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예수가 아닌 그의 동생 이스키리였기 때문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유언서’는 현재 아오모리현의 헤라이 마을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지어져 있는 ‘그리스도 전승관(傳承館)’에 전시되어 있다.
이밖에도 두 통의 유서가 더 있어 예수의 유언서는 모두 세 통이나 되는 셈이다. 이 유언서에 의하면 예수는 21세부터 33세까지 12년간 일본에 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보다 더욱 오래된 고대 문헌으로 전해지는『다케우치 문서[竹內文書]』의 내용과도 차이가 있다. 『다케우치 문서』에서는 예수가 18세에 일본에 와서 5년간 공부를 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라이 마을 사람들은 도라이즈카[十來塚]와 쥬다이보[十代墓] 두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관(墓所館)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어째서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 몰랐었는데, 일본의 학술단체인 만국고대문학연구회에서 ‘예수의 유언서’를 발견함으로써 그 유례가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묘소관 근처 사와구치[澤口]라는 곳에 ‘미코[神子]의 흔적’이라 불리는 집이 있다. 이 집안은 1800년 이상 된 오랜 가문으로 대대로 이 무덤을 지켜왔다고 한다. ‘미코의 흔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神·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며, 이 가문은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 지명인 사와구치를 성(姓)으로 쓰게 되았다고 한다.
사와구치 가문에서는 선조 대대로 네 발 짐승은 먹지 않는다고 하며, 가문의 문장(紋章)이 도라지인데, 이것을 도형으로 나타내면 ☆ 모양이 되어 유태인(猶太人)의 심벌 마크이며 이스라엘의 국기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다윗의 별’과 같은 꼴이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 묘소관 근처에 사와구치 가문 이외의 사람이 주거를 마련하면 영락없이 그 집에 이변이 일어나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⑸ 야마네 기쿠의 ‘예수·석가 일본 도래설’
‘예수 그리스도의 일본 도래설(渡來說)’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야마네 기쿠[山根菊]이다. 1895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태어난 야마네 기쿠는 일찍이 개신교(改新敎)에 관심을 가져 요코하마의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복지 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한편 고대사 연구에도 열심이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전도 및 종교 활동은 계속하였다.
그녀는 급속한 변화를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에서 종교의 무력함을 느끼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일본부인단(日本夫人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그녀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또한 다케우치 기요마로[竹內巨磨]를 만남으로써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본인 말로는 일본 고대사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일본 도래설 연구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야마네 기쿠는 1937년 일본 각지에 있는 유적 및 풍습 등을 조사하여 예수의 일본 도래를 입증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책을 출판했다. 내용이 내용인만큼 미국의 여러 신문에도 소개되고, 일본 국내에서도 문화영화·잡지·신문에 실려 학계 및 종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군국주의가 한창인 비민주적인 시대이므로 이 책은 발매금지 처분 등의 탄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후(戰後) 더욱 연구에 정진을 한 그녀는 많은 성과를 얻었고, 그 사실을 공표하여 예수의 영혼을 위로하고 세계의 참 모습을 전하려고 새로이「그리스도는 일본에서 죽었다」라는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서 야마네 기쿠는 예수뿐 아니라 불교의 개조인 석가의 일본 도래도 주장하고 있다. 예수의 무덤이 일본에 있는데 석가의 무덤이 없어서야 말이 되지 않는가? 석가의 무덤이 있는 곳은 아오모리현[靑森縣] 오우본선[奧羽本線] 다이샤카역[大釋迦驛] 근처에 있는 본쥬산[梵珠山] 위에 있다.
⑹ 야마네 기쿠[山根菊]의 연구에 의한 석가(釋迦)의 일본 도래설(渡來說)
야마네 기쿠의 주장에 의하면 석가모니(釋迦牟尼)는 19세 때에 수행을 위해 왕궁을 나섰다고 한다. 석가의 인도에서의 본명은 ‘싯타’이며 우리가 오늘날 흔히 알고 있는 ‘싯다르타’는 숙부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숙부의 아들, 즉 사촌인 다이와는 걸인처럼 지내는 싯타를 구박하였으나, 불도(佛道)를 구하려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싯타는 후키아에즈[不合] 왕조의 제왕인 아마츠 테루오노오[天津照雄之男] 천황의 후손인 카라라 선인(仙人)을 만나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은 후 일본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52세의 싯타는 제자들을 떠나 탁발(托鉢)을 하면서 스리랑카까지 오게 되었는데, 마침 걸인 하나가 큰 나무 밑에 쓰러져 숨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싯타는 그 불쌍한 걸인에게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도(道)’를 설파한 후, 서로의 옷을 바꿔 입었다고 한다. 그리하면 싯타를 찾아 헤매던 제자들이 발견해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걸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때 싯타는 그 걸인의 시체를 덮기 위해 머리부터 거적을 덮어 주었는데, 이것이 칠조가사(七條袈娑)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후 일본에 오게 된 싯타는 이름을 석가로 바꾸고 장수(長壽)를 하다 116세로 죽었으며, 그 시신은 아오모리현의 본쥬산에 묻혔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일본의「호치신문[報知新聞]」에 인도 북부의 동굴 속에 새겨져 있는 한 장의 초상 사진이 실렸었다. 처음에는 석가의 초상으로 알려졌으나, 야마네 기쿠가 17, 8세 무렵의 예수의 모습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기독교(基督敎)의 개조(開祖)인 예수 그리스도와 불교(佛敎)의 개조인 석가모니(釋迦牟尼). 세계의 양대 성인(聖人) 모두 일본에 와서 여생을 마쳤다는 이 주장을 모든 일본인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허황(虛荒) 치고는 정말 스케일이 크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 출처; 최천기(崔川基) 著『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나라 일본(日本)』학민사版(2005년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