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반도 침략 통치 시기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한국의 민족사를 말살하고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과「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했다는 점은 역사탐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의 북쪽 지역은 중국의 한(漢) 왕조가 점령하여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통치했으며, 한국의 남쪽 지역은 왜국(倭國)이 점거하여 통치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 형성’은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왜국은 낙랑군을 통해 중국 세력과 활발히 교류하여 한족(漢族)의 문물을 흡수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피식민지역의 조선인들에게「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교육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국내의 역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의 망령을 떨쳐내지 못한 채「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교육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여전히 낙랑군이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설치되었다고 기술(記述)한다. 일본서적 출판『중학사회』32쪽은 ‘진(秦)·한(漢) 제국과 동아시아’라는 단원이다. 본문은 "진나라가 강해져 기원전 23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다.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한나라는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넓혔고, 조선 서북부를 정복하여 낙랑군 등을 두었다."는 내용이다. 상단에 ‘한의 최대영역’이라는 지도와 중국과 만리장성 사진을 나란히 장식해 놓았다. 이 지도는 한반도를 중국의 한나라와 같은 황토색으로 칠해 놓고는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표시해 놓았다. 한편, 경상남도 지역은 왜(倭)와 같은 흰색으로 표시하고는 ‘한(韓)’자를 써 놓았다. 일본은 ‘한(韓)’을 ‘가라(加羅)’로 읽으며, 김해가락국(金海駕洛國)을 일컫는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지방인 길림성(吉林省) 쪽에 표시하여 현재의 한국 땅에 없었다고 기술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교육처럼 한국에는 독립적인 통치체제가 없었다는 내용인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2세기경의 지도’라는 작은 지도를 실었다. 여기에는 함경도와 두만강 건너 중국 영역에 걸쳐 고구려를 표시하고, 평안도·황해도·충청도와 중국 요령성(遼寧省) 일대를 낙랑군과 대방군, 한국 남부의 동쪽을 진한(辰韓), 그 남쪽을 변한(弁韓), 서쪽을 마한(馬韓)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지도를 제시하여 왜국은 2세기 이전부터 존립하고 있었고, 한국에는 2세기 이후에야 삼한(三韓)이라는 정치세력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건국연대는 신라 중심의 서술로 그 정확성이 매우 미약하지만, 신라는 기원전 57년·고구려는 기원전 37년·백제는 기원전 18년·김해가락국은 기원전 43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지도는 이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내용 역시 기원전부터 가야의 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진출, 정착하여 선진문물을 심어준 야요이[彌生]문화의 진실을 부정하려는 의도이다.
또한 이 교과서에서 강조하듯이 한나라가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郡縣)을 설치,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다는 서술을 역사적으로 검토해보면 그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 수 있다. 한(漢)는 유방(劉邦)이 진(秦)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202년에 개국한 나라이다. 왕망(王莽)이 한나라의 국권을 탈취하여 서기 9년에 신(新) 왕조를 세운 약 15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신나라 이전까지를 전한(前漢)이라 하며, 다시 한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여 후한(後漢)시대로 이어진다. 후한은 후주(後周)에게 멸망한 950년까지 존속하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이 교과서에서 ‘한(漢)’이라고 기술한 것은 전한과 후한을 합친 기간을 말하는 모양인데 “중국의 한나라가 한국 땅을 1152년간이나 낙랑군을 설치해서 지배했다”는 주장이 된다.
일본 군국주의 실권자들은 일본의 개국연대를 기원전 660년이나 상향 조작해 놓고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키기 직전인 1940년, 거국적인 ‘건국 2600년’ 축제를 벌여 침략의 광기를 고취시켰다. 그러나 일본의 정론파 사학자들은 기원전 660년 개국설을 믿는 사람은 없었고 황당무계한 왜곡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도 군국주의자들은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낙랑군 평양 설치설」과「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는 공작을 벌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근거 마련을 위한 유적발굴에 광분했으나 자료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삼 교육에 도입하고 있으니 괴이한 일이 아닌가!
⑵ 왜곡(歪曲)을 위한 날조극(捏造劇)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의 근거를 찾기 위한 발굴단에 참가한 일본의 고고학자 세키노 다타시[關野貞]는 1910년 발굴 도중에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는 평양의 토성이 있는 ‘낙랑군 왕검성(王儉城)’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낙랑군은 25현을 통괄한 큰 군(郡)이었다는데, 그 협소한 지역에 낙랑군 왕검성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하여 세키노 다타시의 학설을 비판하였다. 이 지역은 13만 5천평에 지나지 않아 낙랑군 관청을 설치할 만한 넓이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은 고구려군 병사들에게 생포된 낙랑인(樂浪人)들의 포로수용소가 있는 대동강 서안의 청암리 토성을 낙랑군 관청이 있었던 곳이라고 정략적으로 서둘러 발표했다. 역사학계의 검증도 없이 강권으로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발표를 계기로 교과서에 ‘한국 땅 전역은 낙랑군이 점거했다’고 기술하여 교육시키기 시작했다.「낙랑군 평양 설치설」의 날조극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세키노 다타시 등은 평양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물로 낙랑군 태수의 분묘에서 출토됐다는 봉니(封泥)를 들고 나왔다. 봉니는 중요한 문서를 봉합할 때 전달자가 개봉하지 못하도록 노끈으로 문서함을 묶은 다음 아교질의 진흙으로 묶은 매듭을 봉하한 뒤, 그 위에 관인(官印)을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봉니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행방조차 묘연하다. 그런데 낙랑군 태수 분묘에서 발굴되었다는 봉니가 시중에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낙랑군의 근거라는 어용학자들의 외침에 현혹되어 골동품상·군인·고관들이 소장용으로, 선물용으로 봉니를 구입하기에 너도나도 나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가짜 봉니가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군 간부와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국사날조발굴단(韓國史捏造發掘團)’이 돈에 눈이 멀어 봉니의 위조품을 만들어 진품으로 속여 고가로 파는 사기꾼 노릇을 했던 것이다. 한국 침략의 역사적 명분으로 삼았던「낙랑군 평양 설치설」이라는 것이 ‘가짜 봉니 사건’으로 망신만 산 셈이다. 역사왜곡(歷史歪曲)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다.
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평양 지역에 낙랑유적과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오랜 전란을 피해 평양으로 망명한 낙랑인들이 거주한 흔적이며, 이들을 통해 평양지방에 낙랑문화가 접목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⑶ 역사서와 낙랑군의 진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권28하(下)에 ‘한(漢)시대의 낙랑조선(樂浪朝鮮)은 중국 요서(遼西)지방의 물이 풍부한 지역에 있었고, 크고 작은 하천이 46개나 흐르고 있으며, 그 길이는 3046리에 달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진서(晉書)』권14에는 ‘백제(百濟)의 분서왕(汾西王)이 군사를 일으켜 낙랑서현(樂浪西縣)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있다. 낙랑서현은 오늘날 중국 북경(北京) 북부 요서(遼西)지역인 남만주(南滿州)의 금주(錦州)지방이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에도 ‘낙랑군(樂浪郡) 대방현(帶方縣)’ 관련 기사가 보이는데, 역시 남만주의 금주지방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서들은 낙랑군이 현재의 중국 영토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고려 중기에 전한(前漢)의 학자인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본따서『삼국사기』를 저술했다. 조선왕조 태조(太祖) 재위 23년에 진의귀(陳義貴)·김거두(金居斗)가 내용을 고쳐 다시 간행하였고, 중종(中宗) 재위 7년에 다시 이계복(李繼福)이 개간한 경위가 있다.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운영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의 중화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 정객들의 농간으로 중국의 한족(漢族) 왕조인 명(明)의 구미(口味)에 맞게 개찬한 것이다. 정사(正史)로 믿고 있지만 상처가 많은 역사서다. 한·일 양국의 학자 가운데는 요즘도 이를 비판 없이 취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삼국사기』에 “백제국(百濟國)이 중국 본토로 뻗어 나간 고이왕(古爾王) 13년 8월에 낙랑군(樂浪郡)을 습격, 함락시켰다.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태수( 朔方太守) 왕준(王遵)을 앞세워 고구려를 총공격하여 환도성(丸都城)을 쳤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강력한 군주였다. 형제를 살해하고 부황인 고조(高祖)을 강압하여 왕위를 탈취, 629년에 즉위했다. 그는 천하통일을 완성하자 율령 제정과 군제 정비, 역사 편찬에 주력했다. 모든 중국 역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중국 역사를 우월성만으로 개찬했다. 이세민은 직접 역사집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중국 대륙에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이 진출하여 항전한 일이 많았으므로 원한을 품고는 과거 중국이 점령당한 사실이나 패전 등의 수치스러운 일들은 모두 삭제하여 정반대로 승리한 것으로 변조했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재위기에 여진족(女眞族)인 아골타(阿骨打)가 만주에서 거병하여 금(金)을 창건하여 황제로 군림한 직후, 고려에 고대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딸을 예종(睿宗)의 왕비로 바쳐 외손자인 왕해(王楷) 태자(太子)를 신황(新皇)으로 옹립한 후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은 평장사(平章事) 이자겸(李資謙)을 매수하여 군신(君臣)관계를 강요하는 한편, 고대의 역사를 금나라의 우월성으로 개편하도록 조종, 압박했다.『삼국사기』는 금나라 조정의 검열을 받은 역사서인 것이다. 그 후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들은 유적을 파헤치고 역사기록을 변조하여 한국 역사를 송두리째 왜곡했다. 한국 역사는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러한 경위를 외면하고 역대 중국의 패권을 잡은 폭군들의 강요에 의해 개찬한『삼국사기』구절에만 눈을 밝혀 약점으로 집어내어 인용하는 한편, 중국와 왜국간의 사소한 교류기록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일본우월주의(日本優越主義)’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교과서 집필 학자들은 애써 “한국사는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 공언하기도 한다. 한국사를 정통으로 연구하여 참고한다면 일본의 역사는 성립되지 않고, 역사 교과서를 ‘일본지상주의(日本至上主義)’로 저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사는 한국사의 연장임을 알고 있을 것인데도 학문적 양심이 고갈되어 ‘외눈박이’ 역사관에 사로잡혀 한국사를 멸시하는 교육이 체질로 되어버린 것이다.
▶ 출처; 최성규(崔性圭) 著『일본의 역사는 없다.』아시아문화사編(2000년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