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사(古朝鮮史)에는 두가지 위설(僞說)이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교묘하게 위장되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중심으로 한예족(韓濊族)에 의해 건국된 고조선이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된 기자(箕子)를 통해서 중국인 정권으로 교체되고 기원전 195년에 연(燕)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쿠데타로 또 다른 중국인 세력이 고조선을 통치하게 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전한(前漢) 세종(世宗)이 기원전 108년에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해 식민지로 삼았는데, 그 위치가 지금의 평안도·황해도 지역이라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가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국 민중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 지방에 있었다는 역사 날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한사군의 설치 여부와 위치는 만주에 대한 지배권 사수와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야욕을 지닌 중국의 역사 왜곡 프로젝트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학계는 고조선의 영역이 압록강 이북을 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고조선 옛 영토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내라는 것이다. 한사군은 과거 조선총독부처럼 한반도내에 설치했던 식민통치기관으로서 한족(漢族) 관리들이 지배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설은 8·15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한국 주류사학계에 의해 정설로 인정되고 있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의 한사군 위치 비정이 사실과 부합하다면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사군에 대한 고대 문헌 기록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따라야 할 것이다. 이제 그것을 검토해보자.
⒜ 한사군에 대해 엇갈리는 중국의 기록들
한사군(漢四郡)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와 있다. 한나라의 대군이 공격했지만 고조선은 1년 넘게 무너지지 않았고, 전쟁에 지친 조선의 지배층이 분열되면서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王儉城) 함락으로 고조선이 멸망하는데, 그 사실에 대해『사기』「조선열전」은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군을 설치했다”라고만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그 사군의 이름을 적지 않은 이유로 지금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동·서양을 통틀어 위대한 역사저술가로 손꼽히는 사마천이 생전에 목격한 한사군의 이름을 왜 적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고조선의 항신(降臣)들이 받은 제후(諸侯) 관직도 그렇게 자세하게 적은 사마천이 가장 큰 전과인 사군의 명칭은 왜 빠뜨렸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사군을 설치했다”는 문헌에 대해 심지어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삽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사기』의 다른 본문과 주석들이 한사군을 모두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것 또한 이런 의심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나라가 고조선에 군현(郡縣)을 설치했다는 기록은『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도 보인다. “한나라가 양신(楊信)을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한나라는 동쪽의 예맥(濊貊)을 뿌리 뽑고, 조선에 군(郡)을 설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수절(張守節)은『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현도(玄菟)·낙랑(樂浪) 2군(二郡)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물론 배인(裵絪)의『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이다”라고 4군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보다 앞선 배인의 주석을 못 보았을 리가 없는 당(唐)의 장수절은 왜 전한(前漢)이 고조선의 영토에 설치한 군현(郡縣)을 현도군(玄菟郡)·낙랑군(樂浪郡)의 2군뿐이라고 주장했을까? 더구나『사기(史記)』본문에서 “4군(四郡)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면 장수절은 왜 “현도·낙랑 2군이다”라고 본문과 다르게 적었을까?
한사군의 명칭은『사기』본문에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약 2백여년 후에 편찬된『한서(漢書)』「세종황제본기(世宗皇帝本紀)」에 비로소 등장한다. “겨울에 조선에서 우거왕(右渠王)의 목을 베고 항복하니 그 땅을 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番)·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다.『한서』「오행지(五行志)」에는 ‘원봉(元封) 6년(기원전 105년)조’에 “이전에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三郡)을 열었다”라고 하여 3군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사기(史記)』와『한서(漢書)』가 2군(二郡)과 3군(三郡), 4군(四郡)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기백(李基白)의『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은 한사군의 위치를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진번군은 자비령 이남에서 한강 이북까지’, ‘임둔군은 함경남도 일대’, 현도군은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이라고 비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고대 기록에서는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우론(愚論)이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끌어들인 것을 8·15해방 후에도 이병도(李丙燾) 같은 한국인 친일사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한(前漢) 세종(世宗)이 일으킨 고조선 정벌전(征伐戰)이 한나라의 승리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조선의 지배층이 분열해서 한군(漢軍)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한나라는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은 것이다. 명목상의 승리였기 때문에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토 전부를 지배할 수 없었다. 고조선의 항신(降臣)들이 제후(諸侯)로 책봉된 지역이 산동반도(山東半島)·발해(渤海) 지역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왜 그들은 모두 산동반도와 발해 지역의 제후로 책봉받아야 했을까?
⒝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없었다.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군현(郡縣)은 낙랑군(樂浪郡)이다. 바로 한사군의 수도(首都)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한국인 제자들은 낙랑군이 오늘날 평양(平壤) 지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등은 대동강(大同江) 일대에서 출토된 한나라의 유적·유물들을 낙랑군의 움직일 수 없는 실증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때 출토된 유물들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한 전한(前漢) 때의 것이 아니라 후한(後漢) 때의 것이라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에 앞서 역시 중국의 고대 자료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갈석산(碣石山)이다.『사기(史記)』「하본기(夏本紀)」에 인용된 갈석(碣石)에 관한『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의 주석에 그 단초가 나와 있다.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長城)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인데, 여기서 장성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말한다. 곧 갈석산이 있는 곳이 낙랑군이며, 바로 만리장성의 기점이라는 것이다.
한국 주류사학계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이병도(李丙燾)는『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수성현에 대해 “지금의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썼다.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의 수(遂)자가 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의 수(遂)자와 같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가 이런 비실증적인 주장을 한 이후 낙랑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군으로 둔갑했고, 이곳이 졸지에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변했다. 이로써 오늘날 중국의 여러 박물관 지도들은 만리장성을 황해도까지 연장해서 표시하고 있다.
그럼 갈석산은 어디에 있을까?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 북쪽에 있는데, 창려현은 만리장성의 동쪽 끄트머리인 진황도(秦皇島)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현(縣)이다. 갈석산은 담기양(譚其釀) 주편(主編)으로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만든「중국 역사 지도집」‘진(秦)·서한(西漢)·동한(東漢) 시기’에도 진황도와 난하 사이 창려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창려현과『사기』에 나오는 수성현은 과연 연관이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의 창려현이『사기』에 나온 수성현의 후신(後身)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오랜 논쟁은 종지부를 찍는 셈이다.
『수서(隨書)』「지리지(地理志)」‘상곡군(上谷郡)조’를 보면 “수성(遂城)은 옛날의 무수(武遂)이다. 후위(後魏)에서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하자 영주(營州)에서는 5군(五郡) 11현(十一縣)을 비준했다. (수성의)용성(龍城)·광흥(廣興)·정황(定荒)은 창려군(昌黎郡)에 속한다”는 구절이 있다.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했다는 사료이다. 수성현은 당나라 때에는 북경(北京) 서쪽의 역주(易州)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이로써 갈석산이 있던 낙랑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임을 의심할 바가 없게 되었다.
이런 견지에서 현도군(玄菟郡)을 찾아보자.『한서(漢書)』「지리지」‘현도군조(玄菟郡條)’를 보면, 현도군은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주는 현재 북경 부근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동(遼東)의 일부를 뜻한다. 현도군은 현재의 북경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番郡)도 마찬가지이다.『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예(濊)조’에 따르면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년) 임둔(臨屯)과 진번(眞番)을 폐지하여 낙랑에 병합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임둔군과 진번군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설치된 지 30여년이 못 되어 폐지되고 낙랑군에 병합되었다. 폐지된 이유는 고조선 유민들의 저항 때문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임둔군이 함경남도 지방에 있었고,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에서 한강 이북까지 걸쳐져 있었다면 오늘날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있었던 낙랑군과 병합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 둘 역시 오늘날 낙랑 부근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612년에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수(隨) 양제(煬帝)는 개전(開戰) 직전에 북경 북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서 112만 대군을 좌군 12군과 우군 12군으로 나누어 길을 정해주며 평양성(平壤城)으로 모이도록 하라는 작전 지시를 내리는데, 그 진격로(進擊路)에 한사군(漢四郡)의 이름이 대부분 나온다.『수서(隨書)』「양제본기(煬帝本紀)」에 따르면, 좌군의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를 거쳐, 제8군은 현도도(玄菟道), 제9군은 부여도(扶餘道), 제10군은 조선도(朝鮮道),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를 통해 평양성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우군의 제4군은 임둔도(臨屯道), 제11군은 대방도(帶方道)를 거쳐 평양성으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양제가 고구려 침략군에 정해준 각군의 진격로에 현도·낙랑·임둔이 등장하는 것이다. 좌군 제12군은 낙랑을 거쳐 평양성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낙랑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라면 양제의 이 명령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탁군에서 낙랑(평양)을 거쳐 다시 평양으로 집결하라는 작전 명령이 되기 때문이다. 탁군에서 현도·임둔·대방 등을 거쳐 평양성으로 집결해야 하는 다른 부대들도 모순이 발생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있었다면 도저히 내려지기 어려운 칙명(勅命)일 수밖에 없다.
⒞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은 다르다.
그럼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 나오는 중국계 유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고조선을 침공했던 전한(前漢)의 유물들이 아니라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의 신(新)을 무너뜨리고 다시 한조(漢朝)을 일으킨 후한(後漢)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된다는 점이다.
서기 8년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낙랑군(樂浪郡)을 낙조군(樂朝郡)이라고 개칭했지만 이는 다시 낙랑군으로 환원되었다. 이 무렵 낙랑군에서는 낙랑의 토착민인 왕조(王調)가 반기를 들어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大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자칭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기록한『후한서(後漢書)』「세조본기(世祖本紀)」에 의미심장한 주석이 있다. “낙랑(樂浪)은 군(郡)이며 옛 조선국(朝鮮國)이다. 요동(遼東)에 있다”는 구절이다. 이는 낙랑군이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있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사건으로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후한은 영향력을 상실한 남부도위(南部都尉)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폐지하고, 그 지역의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縣侯)로 봉하여 이른바 조공관계(朝貢關係)를 맺었다.
이는 사실상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한 것으로서, 낙랑군의 세력은 이 조치로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후한서』「군국지(郡國志)」는 낙랑의 속현(屬縣)이 18성(城), 호수(戶數) 6만 1천 492호, 인구 25만 7천 50명으로 축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후한의 환제(桓帝)·영제(靈帝) 재위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세력을 확장해 낙랑군을 장악했는데, 237년에 그의 손자 공손연(公孫淵)이 연왕(燕王)을 자칭했다. 연(燕)은 전국(戰國) 시기 요서(遼西) 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로서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238년에 삼국 중 하나였던 위(魏)는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공손연을 참살하도록 했다. 그 후 낙랑군은 위나라를 대신한 서진(西晉)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다시 고구려와 모용씨(慕容氏) 선비족(鮮卑族)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이다가 313년에 설치된 지 약 420년만에 고구려(高句麗)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사에는 ‘낙랑(樂浪)’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정치세력이 또 있었다.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 외에 낙랑국(樂浪國)이 있었던 것이다. 낙랑군과 낙랑국의 차이점, 그리고 그 위치 확인은 한국 상고사 연구에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이는 단순히 두 정치세력의 위치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금껏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유물들을 낙랑군의 유물로 단정해 비정해왔던 고조선의 위치 문제는 ‘낙랑국(樂浪國)’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게 된다.
낙랑군과 낙랑국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지금껏 의문에 쌓여 있던『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30년조(條)’의 기록이다.
「낙랑(樂浪)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 변방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한데에 쌓아둔 곡식 더미가 들판을 덮는 것을 보고 서로 일러 말했다.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우리가 몰래 군사를 끌고 와서 그들을 습격함은 도둑과 다름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소?”
이에 군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신라(新羅)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원년조(기원전 4년)에는 낙랑이 신라를 침공하는 기사가 있다. 낙랑의 군사들이 서라벌(徐羅伐)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자 군왕은 “지금 이웃 나라[隣國]가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어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가?”라고 걱정하자 신하들이 “국상(國喪) 중에 군사를 이끌고 오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낙랑의 군사들은 곧 물러갔다는 기록이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3년조(서기 36년)에도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해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이 신라를 거듭 공격하는 이런 기사들에 대해 지금껏 김부식(金富軾)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현재 우리의 역사 지식에 맞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 지식을 다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역사 연구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태도다. 이를 잘못된 기사로 본 배경은 여기 등장하는 낙랑을 한사군의 낙랑군이라는 고정관념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낙랑 관련 기록은『삼국사기』「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조’의 기록에도 나온다.
「4월에 왕자(王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 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마침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혹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묻고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여기서 최리를 ‘낙랑태수’가 아니라 ‘낙랑국왕’이라고 표현한 점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낙랑‘군(郡)’과 별도로 낙랑‘국(國)’이란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신라를 공격한 의문의 낙랑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해석할 때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이다. 이 낙랑국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호동왕자(好童王子)간의 유명한 로맨스 끝에 서기 32년에 고구려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하는 것은 이보다 281년 후인 미천왕 재위 14년(서기 313년) 때이다. 대무신왕 재위 15년에 망했던 낙랑이 어떻게 미천왕 재위 14년에 다시 멸망할 수 있을까?
이는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낙랑이란 이름의 정치세력이 둘이 있었음을 뜻한다. 하나는 최리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군의 낙랑군이다. 앞에서 거론했던「신라본기」 남해차차웅 원년조 기사에서 신라의 ‘이웃 나라[隣國]’는 낙랑국이다.
그렇다면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앞의「고구려본기」대무신왕 15년조 기사에서는 고구려를 북국(北國)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낙랑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신라본기」유리이사금 13년조의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낙랑국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
『후한서』「동이열전(東夷列傳)」‘부여조(夫餘條)’에는 서기 111년에 “부여왕(夫餘王)이 보기(步騎) 7·8천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공격하고 이민(吏民)을 살상한 후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북쪽에 있던 부여의 국왕은 과연 7·8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영토를 무사히 통과해 대동강 유역에 있다는 낙랑군을 공격한 후 또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까? 게다가 북만주(北滿洲)의 부여(夫餘)는 왜 남쪽 멀리 대동강 유역에 있다는 낙랑군을 공격해야 했을까? 북만주에 있는 부여가 대동강 유역에 있다는 낙랑군과 군사적 충돌을 해야 할 피치 못할 이해관계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부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중국의 사료가 이런 추론을 사실로 입증해준다.『후한서』「세조본기」‘제일하(第一下)’에는 “처음 낙랑인(樂浪人) 왕조(王調)가 낙랑군(樂浪郡)에 근거해 불복했다. 가을에 낙랑태수(樂浪太守) 왕준(王遵)을 보내 격퇴하자, 낙랑군의 관리들이 왕조를 죽이고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대해 중국 측 주석은 “낙랑(樂浪)은 군(郡)이며 옛 조선국(朝鮮國)이다. 요동(遼東)에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도 고조선의 중심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유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조’의 “9월 가을에 후한(後漢) 세조(世祖)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樂浪)’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해 군현(郡縣)을 만드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유수(劉秀)가 군대를 파견해 공격·점령한 ‘낙랑’은 낙랑군(樂浪郡)이 아니라 낙랑국(樂浪國)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세조 자신이 자국의 군현을 공격했다는 것으로서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살수는 현재의 청천강(淸川江)을 뜻하므로 낙랑국은 청천강 아래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들은 이때의 유물들인 것이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한사군을 설치한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서기 24년) 때의 것은 없고 후한(後漢, 서기 25년~219년) 때의 것만 출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대동강 유역은 전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군 지역이 아니라 후한 세조 때에 바다를 건너 공격해 일시 군현으로 삼았던 지역임을 뜻한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은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이는 신(新) 섭황제(攝皇帝) 때에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나라는 서기 8년부터 23년까지 15년간 중국을 통치한 왕조로서, 고조선이 멸망하는 기원전 108년보다 약 100여년 후의 왕조이다. 그러니까 화천이 낙랑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도 전래 시기를 감안하면 후한 세조 때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에 있던 국가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며, 낙랑군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 낙랑국이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의해 멸망된 때는 서기 32년인데, 후한(後漢) 세조(世祖)가 이 지역을 공격해 군현으로 삼은 때는 서기 44년으로 불과 12년 후이다. 이는 세조가 이 지역을 공격하는 이유가 낙랑국의 멸망과 관련이 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한 낙랑국의 왕족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후 후한 세조에게 구원병력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한 세조가 공격한 낙랑(樂浪)이 정확히 어떤 정치조직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들이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大同江) 유역에 있었다는 물증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낙랑군은 부여(夫餘)와 군사적 이해를 다투던 만주 지역에, 낙랑국(樂浪國)은 대동강 유역에 그 중심지가 있었던 것이다.
☞ 출처 : 이덕일·김병기 共著『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역사의 아침編(2006년版)
☞ 해설 : 이덕일(李德壹)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