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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8)

리드미온 |2004.04.17 00:52
조회 6,193 |추천 0

밤사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간신히 출근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진우, 또 집에서 내 가출이 어떻게 처리되었을지 걱정되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우는 나를 찾아온 그 여자 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 친구와 외박을 한건지 아침에 내가 출근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집에서는 전화 한통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 불안했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다.

진우가 이렇게 자주 집을 비워준다면 나로서는 좋은 거고, 집에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별 걱정 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점심 시간이 다가올 때 쯤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는 내가 휴대폰으로 하면 전화를 안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회사 전화로 걸었다.

발신자 표시가 뜨지 않는 회사 전화를 나는 안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 시간에 나올 수 있지? 회사 쪽으로 갈련다. 나와라."

 

"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가출에 대해서 겪어야할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만나면 뭐라고 얘기해야할지 열심히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쩐지 요즘 너를 보면 불안했었다. 어떻게 된 거니?"

 

점심시간에 엄마를 만나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갔을 때 엄마가 꺼낸 첫 마디였다.

엄마는 내 예상과 달리 너무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엄마가 고문관이라도 되어 테이블이라도 내려치며 화를 내며 이것저것 따질 줄 알았는데 물 한모금을 마시고 그렇게 묻는 엄마는 아주 이성적인 모습이었다.

 

"나도 나이가 있잖아."

 

엄마 앞에서 이런 말은 처음 해봤다.

나도 나이가 있다...엄마는 항상 나보다 앞선 나이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 이런 말은 웬지 금지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널 낳은지 엊그제 같은데 내가 널 낳았을 때보다 더 훨씬 나이가 먹었지."

 

그제서야 정말로 엄마에게 하고 싶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난 갓난 아이가 아니에요.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생각을 하며 산다고요.'

 

항상 나를 어린애 대하듯 엄마의 말투나 태도에 불만이었다.

 

"모아 놓은 적금으로 집을 구했어."

 

"그래...장하구나."

 

엄마는 갈증이 나는지 다시 물을 마시며 말했는데 그 말이 날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칭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내가 알아서 살게요."

 

나는 엄마가 어떤 말을 할지 걱정하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이런 내 모습도 엄마에겐 아직 걷지도 못한 갓난 아이가 철없이 내뱉는 소리로 보일지도 몰랐다.

 

"민아야. 그거 아니?"

 

엄마는 뭘 묻고 싶은 걸까...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근래 들어 아니 스무살 넘어서 엄마와 진지한 대화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그거...라고 물은 것을 난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엄마가 음대 중퇴한 거?"

 

그건 알고 있었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학력을 써넣을 때 엄마는 꼭 '대퇴'라고 쓰라고 했었다. 나는 차라리 낮춰서 고졸이라고 쓰던지 아니면 높여서 대졸이라고 쓰던지 굳이 그렇게 '대퇴'라고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강조를 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엄마의 학력 옆에 '대퇴'라고 썼었다.

아마도 이번 회사에 가족 사항을 쓸 때도 '대퇴'라고 썼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대퇴'인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한번도 엄마에게 묻지 않았었다.

다만 외갓집 친척들을 통해 엄마가 음대 중퇴를 하고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단순히 엄마와 아빠가 서로 아름다운 연애를 해서 엄마가 학업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늘 권위주의적이었고 엄마는 거기에 맞추어 살고 있는 것 같아 엄마 아빠의 로맨스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말이다. 언젠가 너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나한테 숨겼던 것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30년 가까운 비밀?

언제나 조용하던 엄마에게 숨겨진 비밀이란 무엇일까...

 

"뭐?"

 

"그냥 피아노가 참 좋았다. 그 피아노도 니네 큰 삼촌 때문에 시작한 거지만..."

 

큰 외삼촌은 음대 교수였다. 엄마가 큰 외삼촌 때문에 피아노를 좋아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집안에선 여자가 피아노치거나 대학 가는 거 다 반기지 않았어. 혼자 연습하고 혼자 시험봐서 대학도 붙었지. 그리고 피아노 아르바이트 해서 다니고...그러다 피아노 아르바이트 하던 여학생의 오빠로 만난 사람이 너희 아빠였는데..."

 

왜 나는 엄마 아빠의 연애에 대해 한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마치 엄마와 아빠는 오래 전부터 그냥 부부인 것처럼 그렇게 박재된 인생을 사는 사람들로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임신을 했지..."

 

내가 첫딸이니까 그때 임신을 했던 아이란 말인가?

 

"정말 그땐 아무 것도 몰랐었다. 손만 잡으면 임신된다고 믿던 때에...."

 

60을 바라보는 노부인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잠시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와 순수함은 역시 비례하는 것이 아닌 듯 싶었다.

 

"그래서 아빠랑 결혼한 거야?"

 

"그래...근데 그 후부터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결혼했는데 결국 그 아이가 유산됐어. 내 인생의 가장 암흑기였던 것 같다. 피아노도 못하고...그러다 다시 네가 임신된 거지..."

 

그렇다면 나는 결국 엄마를 현실에 눌러 앉게 만든 존재라는 걸까?

 

"근데..희한한 건...네가 피아노보다 더 좋았단다....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언젠가 피아노를 다시 해야겠다...생각하고 있었지..."

 

내가 피아노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던가? 엄마한테? 그러기엔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어제 네가 아무 연락 없이 안돌아오는데 네 아빠는 자꾸 나한테 뭐라고 하지...그런데 문득 생각난 게 피아노였다. 너를 찾기 보단 피아노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이 집을 나갔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도 이해가 안되지만 말이다..."

 

나는 왜 진작 엄마와 이런 대화를 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피아노늘 하고 싶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집에서 나와 백화점 문화센터에 재즈 피아노 신청했다. 그리고 너한테 전화한 거다."

 

나는 갑자기 엄마의 피아노에 질투가 느껴졌다.

내가 엄마의 갓난 아이가 아니라고 맘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던 것처럼 엄마는 피아노보다 좋았던 나에게서 이제 피아노로 마음이 옮겨간 것인가?

 

"너...능력도 있으니까 잘 살거야. 걱정 안 한다. 하지만 엄마는 힘들 때면 언제나 찾아와도 되는 존재란다. 그거 하나는 알아둬라."

 

나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 가족을 속이고 가출을 하고 또 내 집도 아닌 낯선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되면서 깨달은 걸까...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 이중 계약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엄마가 날 믿어주는데 배신감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네가 부럽다. 내가 너 같은 용기가 있었다면 아빠와 결혼 안하고 계속 피아노를 했을 거야. 그랬다면 나도 지금 서혜경처럼 되지 않았을까?"

 

나는 엄마가 서혜경이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너한테 여러모로 고맙다. 내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게 해준 것도 너니까...자식 키워봤자 소용 없다고 하는데 꼭 자식이 뭘 해줘서가 아니라 자식이 커나가면서 깨닫는 게 많은 것 같아. 그게 자식이 부모에게 해주는 거겠지..."

 

엄마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들으며 오히려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을 해야할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그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 나 잘 살거야. 걱정 마."

 

나는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방금 나온 새우볶음밥을 한 입 떠 먹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하고 싶던 말은

 

'엄마, 나 힘들어. 도와줘'

 

였다.

 

엄마가 지금까지 나의 적으로만 생각하던 내 스스로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엄마는 나의 영원한 아군이었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미운 현수이지만 그래도 레종의 사료 그릇을 아침에 채워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우는 현수가 집을 아껴서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레종 때문에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가 집에 돌아온 것은 그가 말한대로 12시가 넘어서였다.

정말 본인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안녕?"

 

진우가 나를 발견하고 너무도 뻔뻔스럽게 인사를 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뺨을 갈겨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고 물었다.

 

"이 집을 여자 친구에게도 본인 집이라고 했나보죠?"

 

"어?"

 

진우는 놀란 눈빛이었다.

 

"이거 보세요. 댁 때문에 제가 뺨을 맞았다고요. 당신 애인이래요."

 

"누구지?"

 

정말 대책 없는 남자다. 애인이라고 하는데 '누구지?'란 질문은....플레이보이가 하는 질문 아닌가...

 

----------------클릭, 시기적절한 남자 9편 보기---------------

 

추신1: 오랫만에 주말 인사드립니다. 여러분과 약속한대로 자주 업데이트 하기 위해 10시 넘어서까지 야근하고 돌아와서 글 올립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추신2: 여러분은 어떤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저는 좋은 일 하나도 없는 날들만 이어지고 있답니다. 오로지 여기에 소설 올리는 일만이 기쁨이네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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