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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소설] Memories... <제 5 회>

박준욱 |2004.05.05 20:25
조회 545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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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25일 토요일...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많은 차들로 도로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난 조수석에 앉아 운전만 하고 있는 석재를 멀뚱히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외면한 듯 했습니다.

 

"야, 송재석!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느닷없이 사람 불러 놓고는 여태 아무 말도 없고 말이야."

 

그는 일순 히죽거리더니 짧게 입을 열었습니다.

 

"가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깐 조금만 참으라고."

 

그의 말과 히죽거림에 나의 의문은 더욱 극에 달했지만, 더 이상 추궁해봤자 그가 함구할

것임을 알기에 그저 한숨만으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쓸데없이 인내한 끝에 차가 정차한 곳은 시내의 어느 공용주차장이었지만 이곳이 최

종 목적지인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내 예상대로 주차하고는 다시 시내 중심부로 걸음하기 시작했고 10분쯤 되서야 최종 목적지

인 듯한 어느 카페에 달했습니다.

넓은 실내와 비록 인조일지라도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런 감성에

빠질 경황은 없었습니다.

그저 카페에 들어서 종업원의 안내에도 무시하고 앞서가는 석재의 뒤를 쫓기에 바빴습니다.

어느덧 한 여자가 홀로 앉아있는 자리에 달했고 석재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덜썩 그 여자

의 맞은 편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세희야, 내가 좀 늦었지?"

"괜찮아. 나도 금방 도착 했는 걸."

 

이 둘은 아는 사이인 것 같았습니다.

난 그저 멀뚱거리며 서있기만 했는데 석재가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습니다.

 

"임마, 멀뚱히 서서 뭐하냐? 어서 앉아."

 

난 최소한 그 여자와의 시선을 마주 치지 않은 채 조심스레 석재의 옆에 앉았습니다.

그때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고 우리들에게 하나씩 건네줬습니다.

먼저 그녀는 익숙하게 내게는 너무 낯선 커피 종류의 하나를 주문했고 난 그저 무난하게 코

코아를 주문하고는 다시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석재는 자기는 금방 갈 것이라며 아무 주문도 하지 않은 채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

네는 것이었습니다.

금방 간다고?

그럼 나는 물론 내 앞에 있는 여자도 굳이 주문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고 물어볼 찰

나에 석재는 먼저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준우야, 이쪽은 정세희. 너랑 동갑이야."

 

난 결국 그녀와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어색하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

를 대신했습니다.

석재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세희란 여자를 보며 말했습니다.

 

"준우는 소개 안 해줘도 되지?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깐."

 

그녀는 석재의 말에 동의하듯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습니다.

난 오늘 '정세희'란 여자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에 대해서 잘 안다며 고개까지

끄덕일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석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내 소임(所任)은 다했으니 난 이제 갈게.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뭐?! 어째고 어째?! 둘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석재는 능청스런 웃음을 짓고는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그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최소한 그의 입에서 상황설명이라도 들어야 했습니다.

 

"저기... 잠시만요...!"

 

난 세희란 여자에게 툭 던지듯 양해 같지 않은 양해를 구하고는 급히 석재의 뒤를 쫓았습니다.

석재가 카페 출입구에 달할 찰나에 겨우 그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생전 처음 본 여자 앞에 나만 남겨놓고 가버리기나 하고."

 

석재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나의 손을 슬쩍 뿌리치고는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

습니다.

 

"세희랑 잘해봐. 세희, 정말 좋은 여자야."

"저 여자가 좋은 여자든 나쁜 여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누가 네 녀석보고 여자를 소개

시켜 달라고 했어?!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괜한 오해는 하지마. 누가 여자를 소개시켜 줬다고 그래? 내가 네 녀석 성깔을 아는데 미

쳤다고 아무 말 없이 일벌이겠어? 저 세희라는 여자가 널 만나고 싶다면서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그랬어. 그래서 난 소개시켜 준 것뿐이라고."

"뭐?!"

 

또 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분명 '정세희'라는 여자와 초면인데 그 여자는 나에 대해서 알고 있고 나를 소개 시켜

달라고 석재에게 부탁했다니...

 

"저 여자가 날 어떻게 아는데?"

"그건 네가 직접 물어봐. 게다가 넌 세희한테 고맙다고 해야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현이 임신했을 때 너도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 도와줬지만 세

희가 얼마나 힘써줬는데. 병원도 더 좋은 곳으로 옮겨주고..."

"저 여자가 지현이도 알아?"

"잘 모르지."

"그럼 어떻게...? 혹시 너가 저 여자한테 나에 대해서 다 떠 벌였니?"

"글세...?"

 

말끝이 흐린 것으로 보아 분명 그가 말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보다 빨리 돌아 가봐. 저렇게 여자를 혼자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라고."

 

석재의 말대로 상황이 어찌되었건 간에 다시 그녀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가야함이 옳았습

니다.

물론 불편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선 한 숨을 크게 내쉬었습니다.

 

"좋아, 너 입장도 있으니깐 오늘은 너 말대로 하지. 자세히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난 등을 돌리고 긴장한 나머지 이미 정갈하게 되어 있는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는 중에 석재

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준우야..."

 

난 등을 돌려 지금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그의 얼굴을 다시 봐야 했습니다.

 

"왜?"

 

당연히 나의 말투는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와는 달리 그의 표정엔 어느새 침울하게 까지 보였습니다.

 

"웬만하면 세희랑 잘해봐라. 너의 존재조차 모르는 여자를 사랑할 바에야 저렇게 예쁘고 착

한 여자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시끄럽다! 그건 내 일이야."

"하지만 그 여자한테는... 아니다, 어서 가봐."

 

순간 석재가 말은 거두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한테 뭐? 말해봐."

"아니, 혹시 그 여자한테 남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지만..."

"하긴, 그럴 수도... 일단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 여자, 많이 기다리겠어."

 

석재와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다시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한 그 자리

로 돌아갔습니다.

어느새 그 테이블에는 나와 그녀가 주문한 것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난 거의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수줍게 대답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잠시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난 그저 내 앞에 놓여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름 모를 커피를 조심스레 마시고는 먼저 말했습니다.

 

"처음에 봤던 준우씨랑 지금의 준우씨는 너무 다르네요."

 

뜬금 없는 그녀의 소리에 그저 의아해 하며 나도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 쪽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대략 1년 전쯤인데... 기억나지 않으세요?"

 

대략 1년 전...?

그때라면 내가 사춘기란 변명으로 반항과 방황을 일삼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 내 머릿속 어딘가에 봉인한 상태였으니... 아니, 봉인

하고 싶었으니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을 수밖에... 기억하고 싶지 않음이 당연했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대략 이 맘 때쯤이었을 거예요. 그때 J 나이트 뒤에서 이상한 남자들로부터 제 친구랑 저

를 구해 주셨잖아요? 그 당시에 준우씨는 석재랑 그리고 키가 좀 큰 친구 분이랑 있으셨는데."

 

그제야 얼핏 기억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철없이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는지라 당연히 나의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의 속이 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그때 준우씨 모습보고 정말 반해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석재를 만나게 됐고 준우

씨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됐죠. 준우씨를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어요. 솔직히 여태 2명

의 남자와 교제를 했었는데 준우씨 만큼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녀의 진심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은 칭찬이지만, 그래도 칭찬이니 순간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그때처럼 어리석은 짓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기에 낯선 그녀이지만, 그때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함으로써 그녀가 내게 갖는 이상한 환상을 없애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너무 철없이 굴었던 때라 지금하곤 많이 다를 거예요. 물론 가끔... 아주

가끔... 옛날 버릇이나 성격이 나올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너무

나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 "

"아뇨!"

 

문득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에 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로 향했습니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정말 어여쁜 외모였기에 웬지 모를 수줍음에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전 지금의 준우씨가 더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도 느꼈지만, 지금도 준우씨는 정

말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준우씨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가슴이 얼마나 뛰는 줄 모르죠?"

 

그녀의 과분한 칭찬에 난 그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나의 모습에 오해라도 했는지 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준우씨? 내가 그렇게 못생겼어요?

 

난 여전히 내 앞에 놓여진 코코아가 담긴 잔만을 쳐다보며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아뇨..."

"그런데 왜 내 얼굴을 안 봐요. 일부러 피하는 것 같고."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거부라고 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습니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가졌습니다.

 

"예뻐요. 아주 예뻐요."

 

그녀는 나의 말이 흡족했는지 아주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고마워요, 준우씨."

"고맙긴요, 세희씨 같이 예쁜 사람이 오히려 저 같은 사람을 좋게 봐줘서 제가 고맙다고 해

야죠."

 

난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참에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을 은근슬쩍 재빠르게 훑어보았습니다.

그녀의 빼어난 외모를 제외하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느다란 손목에 걸친 까르

띠엘 시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구찌 토트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끝으로 그녀의 전체적인 옷차림을 포함한 행색으로 보아하니 좀 전에 내가 보았던 것이 모

조품이 아니라 대략 몇 십 만원에서 몇 백 만원씩이나 하는 진품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

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예쁘고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보이는 사람이 내게 마음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꿈만 같았습니다.

또 한편으론 혹시 석재와 도모해서 나를 놀리는 건 아닌지 괜한 긴장감마저 들었습니다.

난 그녀와의 사소한 대화에도 긴장했고 그녀도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모양인지

애써 가벼운 농담도 하며 전체적인 대화를 이끌어갔습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다양한 방면으로 다양한 상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최

근에 승마를 배우는데 무척이나 재밌다니 L호텔에 있는 불란서 요리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그녀는 나와 다른... 헤어진 그 사람과 동일한 부유한 부류의 사람이란 것

을 점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녀가 날 진심으로 좋게 생각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비록 짧은 시

간일지라도 그녀의 인상을 비롯한 말투나 미세하게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를 눈여겨본 나로

서는 '정세희'라는 여자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 역시 점점 입을 여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녀는 내가 얘기만 하면 우습지 않은 이

야기라도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그녀와 내 앞에 놓여진 잔들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그녀가 슬쩍 자신의 손목에 걸쳐있는 고급스런 시계를 보고는 말했습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준우씨, 배고프지 않아요?"

"약간..."

"그럼 나가죠.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

"아뇨, 어떻게 여자한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습니다.

 

"혹시 어떻게 여자한테 얻어먹을 수 있냐는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을 하신 건 아니겠죠? 예

전 일에 대한 답례로 대접하는 것이니 준우씨가 자존심 상하거나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미리 예약도 했으니깐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순간 당혹스러웠습니다.

내가 할 말을... 내 생각을 그녀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독심술(讀心術)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정세희'란 여자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눈치가 무지 빠른 것 같습니다.

난 그녀의 말을 회피하려 얼른 계산을 하고는 카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시커먼 하늘 아래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곧이어 그녀도 카페에서 나왔습니다.

 

"제 차가 여기에서 좀 떨어진 주차장에 있는데 같이 가주실 거죠?"

"물론이죠. 근데 차도 있어요?"

"네. 왜요? 준우씨는 여자가 운전하는 거 싫어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선 가죠."

 

가만히 보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차도 가지고 있고, 집도 부유하고 학벌이나 외모도

뛰어나는 것을 보면 헤어진 그 사람과 많이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좀 전의 그 어색함들이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대화를 나누면서 나란히 시내를 거닐고 있지만 난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걸음이 옆으로 한 발 물러서지는 것

이었습니다.

그녀도 나의 이런 행동들을 알고 있는지 느닷없이 나의 팔짱을 끼고는 말했습니다.

 

"왜 자꾸 절 피해요? 정말 준우씨는 제가 싫은 모양이죠? 난 준우씨랑 이렇게 가까이 걷고

싶은데..."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행여나 그녀의 마음에 상처가 생

길까 가감하게 뿌리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추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말해봐요? 왜 자꾸 절 피해요? 저랑 이렇게 걷는 게 창피할 만큼 제가 그렇게 못 났나요?"

 

그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걷고 있는 가운데 지나가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흘낏 쳐다보고 지나갈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빼어났으니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표현이 옳았습니다.

그녀의 끝없는 추궁에 말은 해야겠고 결국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꼴사나운 농담을 했습

니다.

 

"세희씨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서..."

 

일순 그녀는 거의 경직된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꼴사나웠는데 그런 말을 들은 상대방은 얼마나 더 꼴사납게 볼지는 뻔

한 일이었습니다.

난 그저 내가 자초한 말에 막막해하며 어색한 웃음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준우씨도 농담할 줄 아는군요. 정말 재밌어요. 정말 준우씨가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일 줄은...!"

 

그녀는 말도 제대로 잊지 못하고 여전히 웃어댔습니다.

물론 나도 웃었습니다.

비록 어색한 웃음이지만 말입니다.

문득 지현에 관한 석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기, 세희씨... 지현이를 아세요? 석재말로는 세희씨가 지현이가 출산할 때까지 많이 도와

주셨다는데...?"

"아니에요. 제가 도와준 건 없어요. 그냥 아는 언니가 산부인과 의사이고 하니깐 단지 소개

시켜 준 것뿐인데..."

"제가 듣기에는 병원비도 세희씨가 지불하셨다고 하던데요."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흠... 사실은 석재로부터 준우씨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현씨 일도 알게 되었고

요. 물론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좀 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전 준우씨를 좋아하고... 아니,

지금까지 짝사랑하고 있었어요. 물론 준우씨는 저란 사람을 오늘 처음 알았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그래요.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그 남자가 나

란 존재에 대해 알든 모르든 간에 그 남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저의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준우씨를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좀 전의 그렇게 밝던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세희씨한테 고마워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얼굴은 다시 밝아 졌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난 그녀의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고마우면 내 부탁하나만 들어 줄래요?"

"말해봐요. 제 능력이 다하는 데까지는 들어드리도록 하죠."

"그래요? 그럼 말할게요.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날 사랑하도록 노력해봐요."

 

그녀의 부탁은 사실상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내 마음속에는 헤어졌던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지

만 서서히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 모를 그녀가 있었습니다.

'정세희'라는 여자는 내게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예쁘고 좋은 여자임이 이제서야 확신은 오

지만, 그녀의 마음까지 받아줄 여력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말이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지금 솔직한 나의 감정을 말하지 않는

다면 나중에 더 큰 상처를 그녀가 받을 것임이 극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난 마음속으로 굳게 결의를 다지고 입을 열 찰나였습니다.

하지만 난 어떠한 말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한 채 일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사람이... 학교에서 잠시 스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녀가 화사한 옷차림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것이 꿈인지 생신지 이성적인 판단도 제대로 서기도 전에 나의 가슴이 먼저 요동치

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희도 아주 잠시뿐이었습니다.

분명 지금도 그녀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만, 그녀만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하얀 손에 깍지까지 끼며 다정한 모습으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 남자가 나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은 그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느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습니다.

그렇듯 그녀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불과 몇 시간에 전에 석재와 잠시 나눈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한테는... 아니다, 어서 가봐."

"그 여자한테 뭐? 말해봐."

"아니, 혹시 그 여자한테 남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마 석재는 그녀에게 이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석재 입장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아무리 좋아한들... 아니, 사랑한들 이미 사랑하

는 사람이 있는 그녀를 가로챌 박력이나 무모함 같은 것은 없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

명했습니다.

물론 나의 모습은 석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박력이나 무모함 따윈 없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지금은 웬지모를 박력이라기보다 무모함이 발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눈으로 똑똑히 이미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단념은

커녕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한층 더 부풀어올랐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자신의 연인과 나를 스쳐간지 오래지만 아직도 내 눈엔 그녀의 모습이

선했습니다.   

물론 세희란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고 그녀는 계속 말하지만 내 귓가에는 그녀의 말 따윈

전혀 들여오지 않았습니다.

이젠 나를 스쳐간 그녀의 모습을 떠나 그녀와 함께 거닐던 그 남자의 모습까지 어렴풋이 떠

오르니 당연히 나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옆에 다른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희란 여자는 커다란 두 눈으로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우

뚱거렸습니다.

 

"준우씨, 어디 불편하세요? 갑자기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난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애써 무색함을 거두려 어색한 웃음이라도 지었습니다.

 

"아뇨. 잠시 딴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했는데요?"

"그게..."

 

세희란 여자가 좋은 여자임을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은 낯선 여자에게 내 생각과 감정을 말

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왕 말을 뱉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고 순간 문득 떠오른 물음에 대해 넌지시

물었습니다.

 

"만약에... 세희씨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럼 세희씨는 어떡할 거예요? 포기하나요? 아니면... 비록 나쁜 짓이지만, 자신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나요?"

 

난 그저 가볍게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나의 물음에 그녀는 뜻밖에 신중하게 고민한 듯 했습

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고는 원인 모를 미소를 지었습니다.

 

"혹시... 그거 준우씨 얘기 아니에요?"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습니다.

나는 애써 부정했습니다.

 

"아니, 그냥..."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석재한테 준우씨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어요. 그런

데 안타깝게 그 여자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석재가 그렇게 말하던 가요?"

"네...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뭐, 대충은..."

 

역시 나의 짐작이 옳았습니다.

석재는 이미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를 생각해준다는

핑계로 내겐 말하지 않는 것임을 다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세희란 여자의 말은 계속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경우라면... 그 상대가 준우씨 같은 남자라면 어떡해서든 내 남자로 만들겠

어요."

"너무 세희씨 욕심만 내는 것이 아닌가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내가 그 상대방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확신만 있

다면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나요? 물론 준우씨 같은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거예요."

"전 세희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정말 이해가 안되네요. 왜 나 같은 남자를 좋

아하는지...? 세희씨 주변엔 나보다 더 멋진 남자들이 많을 텐데..."

 

그녀는 나의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절래 흔들었습니다.

 

"준우씨,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볼게요. 준우씨는 그 여자분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조건이 좋고 그렇게 예쁜가요?"

 

나도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자 고개를 절대 흔들었습니다.

 

"아뇨, 난 그녀가 얼마나 잘 사는 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그녀가 아주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

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냥 좋아요. 자꾸만 설레고 자꾸만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는 내게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져요."

"나 역시 그래요. 준우씨는 자기 스스로를 비하까지 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낮추지만, 제가

보기엔 준우씨는 참 매력 있고 좋은 사람이에요. 준우씨가 그 여자분을 보고 느끼듯 나도

준우씨가 날 구해준 그 이후로 준우씨만 생각하면 자꾸만 설레고 자꾸만 보고 싶었어요. 그

만큼 준우씨는 내겐 멋진 남자에요."

 

도저히 현재의 나로서는 그녀의 말을 수긍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정말 세희씨는 나를 잘못봐도 한참이나 잘못보고 있군요."

 

나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은 나의 입가에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괜스레 뒤를 돌아보며 이미 스쳐간지 오래된 그녀의 뒷모습을 찾았습니다.

이미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함에도 말입니다.

이런 한심한 내 모습에 결국 나의 입에선 짧지만 깊은 한 숨이 터져 나올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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