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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만들기 1

세실 |2004.05.08 22:45
조회 640 |추천 0

어릴 적 백마 탄 왕자를 꿈꾼 적이 있다.

책속에도, 드라마속에도, 만화속에도,

백마 탄 왕자님들은 넘쳐나서 난 어른이 되면

당연히 그들이 나를 구하러 오겠거니 했다.

왕자님에 대한 기대는

그 흔한 앙케이트 팅 한 번 안한채로 나를 버티게 했고,

남녀공학인 학교를 다니면서도

남자교사쪽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게 했다.

(심지어 나는 같은 학교 남자 아이들의 얼굴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머리스타일이 똑같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정말 진심어린 내 변명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내 처절한 지조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까지....

왕자님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헉......... 

 

 

 

 

"술은 얼마나 하세요?"

 

얼굴이 펑퍼짐한 그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정장에 와이셔츠 윗단추까지 꼭꼭 여며잠근 품새를 보며

나는 그가 기다릴 법한 대답을 유추했다.

 

"분위기 맞춰주는 정도요. 사실 알콜은 좋아하지 않아요.

기껏해야 과실주 두 잔 정도죠."

 

흡족한 듯한 그의 미소..

 

"그렇죠? 지나친 술은 여자들한텐 독이죠."

 

남자들한테도 독이지.

역시, 오늘도 글렀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밥이나 먹으러 가죠."

 

그래도, 먹을 건 먹고 헤어지자는 것 또한 내 신조다.

 

 

 

 

"감자탕 먹으러 가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그는 의외라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얼마나 얼큰하고 맛있는데... 전 써는 건 질색이라서요."

 

싱긋이 웃어보였더니 살짝 경직되어 있던 그의 표정도 풀어지며 이내 웃어버린다.

 

"사실.. 이런 덴 가는 거 아니라고 코치받고 왔는데..."

 

"네?"

 

"이런 덴 첨이라서요.."

 

그래서, 서툴렀구나.

솔직해진 그를 보니 웬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지?

 

 

웬지 3차를 가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그를 가까스로 보내고,

(알뜰한 그는 시외버스를 타고 온 타지 사람이었던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섰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망설임이 커져 갈 무렵,

72번이 도착했다.

우리 집앞까지 가는 몇 안되는 직통버스..

나는 망설임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빈자리는 많았다.

이제 한숨 자면 도착하려나..

눈이 슬슬 무거워질 즈음,

버스는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붐기기 시작했다.

 

 

"이봐요."

 

"이봐요."

 

멀리서 들려오는 환청.. 인가..

생각보다 피곤했던 모양인지 쉬이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봐요. 아줌마!!"

 

아플 정도로 세게 내 어깨를 스치는 누군가의 손..

 

"아!!"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내 눈앞에는 정말 백발마녀처럼 희고 성성한 머리칼을 지니신 꼬부랑 할머니가 한 분,

그리고, 한심스럽다는 듯, 나를 째려보는 낯선 총각 하나..

또, 그 외의 기타등등 구경꾼들이

눈을 시퍼렇게 뜬채 펼쳐지고 있었다.

 

"아..야.."

 

나는 아마도.. 저 할머니를 두고도 열심히 졸았나 보다.

정말 잔건데.. 저 총각외 등등은 내가 조는 척 했다고 보는 건가..

잠에서 덜 깬 채로, 차마 아픔을 호소하지도 못한 채로,

나는 수많은 눈들 사이로 일어서야 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편합니까?"

조금은 경멸어린 듯한 말투..

이 총각 너무 하는 거 아냐?

 

"저 할머니 타신 거 몰랐거든요."

 

"그러셨겠죠."

 

"그리고, 아줌마도 아니거든요."

 

"그러세요?"

 

그가 잔뜩 비웃는 미소를 띤다.

보자보자하니까..

 

"이보세요? 저 본 적 있어요?"

 

"금방 봤지 않습니까?"

 

"정말.. 시비거는 게 취미예요?"

 

"인간성 더러운 사람들한텐 종종 걸죠."

 

"이봐요. 댁이 뭔데.."

 

본격적으로 한 판 붙어볼 참이었다.

공간이 복잡한 버스 안이든지, 집이 가까워오든지..

성질 나 죽겠는데 뭔 상관이람.

 

"샥시.. 그만햐. 그 총각 고맙구먼.."

 

나를 슬며시 잡아끄는 할머니의 여윈 손만 아니었더라면,

그 꿰뚫는 듯한 눈빛에, 그 가녀린 몸짓에

난 오히려 뺨을 붉혀야 했고,

그 오지랖넓은 총각에게 다음 말도 날리지 못한 채 내려야했다.

아.. 꿀꿀한 내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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